“사대부가 난을 쳤다면, 나는 파를 치겠다”

안성/정상혁 기자 2022. 11. 18.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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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회 이중섭미술상’ 수상자
정정엽, 24일부터 수상기념전
경기도 안성 작업실에서 만난 정정엽 화가가 그림‘싹-풍경3’(2020)과 함께 섰다. 뒤쪽으로는 오색 곡식이 쏟아지는 장면의 신작‘열린 벽’이 걸려 있다. /김지호 기자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런데 살아 있었다.

2014년 어느 날, 화가 정정엽(60)씨는 부엌에서 화업의 새로운 전기를 마주한다. “요리하려고 상자를 열었는데 감자에서 초록빛이 보였다. 멈칫했다. 물도 없는 데서 거기서도 살겠다고 싹을 틔운 게 아닌가. 나는 걔를 버려뒀는데 걔는 스스로를 버리지 않았다.” 정씨는 그 처절한 생명을 손으로 고이 들고 책상으로 옮겨 그리기 시작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줄기뿐 아니라 알까지 울퉁불퉁 튀어나왔더라. 생명의 경이와 조형적인 충격, 무심코 대해 온 식량에서 미추(美醜)의 이중성을 비로소 발견했다.”

오는 24일 개막하는 제34회 이중섭미술상 수상 기념전을 앞둔 화가 정정엽(60)씨는 이른바 ‘살림의 화가’다. 곡식이나 과일·채소 같은 “함부로 지나치는 사소함에서 미학을 발굴하는 작업”을 30년 가까이 지속하고 있다. ‘싹’ 연작은 그 대표적 증거다. 자기 자신을 양분 삼아 피어나는 감자 싹을 화면에 꽉 채운 그림이다. “강력함을 드러내려 일부러 큰 사이즈로 그린다”고 했다. 핏줄처럼 사방으로 순을 뻗은 감자가 얼핏 내장처럼 보인다. “우리처럼 적극적인 생명 활동을 한다. 이들은 결코 먹히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수동태가 아니다.”

서울 DDP를 배경으로 감자싹을 그려낸 ‘싹7’(2015). 리움미술관 등의 가장 현대적인 공간에 감자싹을 배치해 미학의 충돌을 드러낸다. /정정엽
시골 생활과 함께 벌레 그림도 시작됐다. 2014년작 '나방2'는 밤마다 통창에 까맣게 들러붙던 나방떼를 관찰한 결과다. /정정엽

작업실을 구하려 이사만 열다섯 번 다녔다. ‘나의 작업실 변천사(1985~2017)’라는 일기식 드로잉 책을 냈을 정도다. 2011년 지금의 경기도 안성 미리내 화실에 연이 닿았다. “시골에서 온전히 사계절을 느껴보고 싶었다”고 했다. 고들빼기, 당귀, 달래…. 밥상에 오르는 나물을 화폭에 옮겼다. ‘살림의 사군자’ 연작도 이곳에서 태어났다. “옛날 양반들은 사군자를 그렸는데, 대개 먹지 않는 것이다. 나는 먹기 위해 파를 다듬으며 파의 아름다움을 느낀다. 사대부가 난을 쳤다면 나는 파를 친다는 심정으로 그린다.” 그래서 그림에는 보이지 않는 여성의 노동이 담겨 있다. 직접 텃밭에서 가꾸거나 야산에서 채취한 것을 씻어 펼쳐놓고 그렸기 때문이다. “1차 노동을 거친 소재다. 그래서 더 풍요롭다.”

시골의 숙명은 벌레다. “밤만 되면 통창에 나방 떼가 달라붙었다. 경악했다. 2년쯤 지나니 ‘이제 얘네와 더불어 살 수밖에 없겠구나’ 싶었다. 그래서 한번 들여다봤다.” 탐스러운 털과 우아한 굴곡, 2014년 작 ‘나방2′에서 보이듯 화가는 그날 이후 나방을 ‘밤의 여왕’으로 다시 바라보게 된다. “백해무익하고 혐오스러운 존재로 여기지만, 얘네가 사라지면 새들이 살 수 없다. 게다가 이곳 원주민은 내가 아니라 얘네들이었다. 친숙해져야만 함께 살 수 있다. 공존해야 한다는 생각이 없으면 그저 밟아 죽이게 된다.”

그의 그림은 정제된 문명에 대한 반성으로 나아간다. 흔하거나 촌스럽다는 이유로 관심에서 추방된 것들, 거기에 “살림의 시선”을 던지는 것이다. “우리는 너무나 매끈하고 깨끗한 것만 추구한다. 원초성을 잊으면 안 된다. 그래야 못생긴 사람도 살 수 있다.” 이번 전시에 출품하는 회화 37점을 관통하는 주제다. 수상 기념전은 24일부터 12월 6일까지 서울 아트조선스페이스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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