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1930년대 목로주점 순례기

기자 2022. 11. 18.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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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에 술집이란 매우 다양하게 분화되어 있다. 접대받는 비싼 술집부터 정말로 막걸리 한 잔 값만 내고 버틸 수 있는 선술집도 있다. 굵직한 역사적 사건은 언론에서 잘 다뤄서 자료가 많은데, 술집에 대한 기록은 참 찾기 어렵다. 먹는 얘기 하는 건 좀스럽고 선비가 아니라고 했던가. 그래서인지 100년 전 술집 문화를 찾아보려면 신문엔 거의 없고 잡지에서 몇 편 찾아볼 수 있다. 물론 잡지야말로 신문이 다루기 어려운 저자의 바닥을 훑어 깊게 쓸 수 있는 무대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였던 1930년대는 인쇄술과 종이생산이 크게 발달하면서 잡지 출간도 늘어나던 시기였다. 당시 ‘별건곤’은 아주 흥미로운 대중잡지였다. 민중의 술집이라 할 대폿집, 선술집 기사가 있나 봤더니 마침 몇 꼭지가 있다. 서울은 역시 종로가 조선인이 모이는 술집이 많았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선술집으로 어울리기는 종로 ‘대흥주점’일 것이다. 대흥주점 갈빗국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사람까지 있으니까”라고 써 있다. 갈빗국이라면 아마도 갈비탕일 것이다. 이어서 보자.

“그리고 그 위로 목노주점, 이름도 ‘목노주점’이다. 역사가 제일 깊을 것이다. 필자가 코를 줄줄 흘릴 나이에 술을 붓던 색시가 마나님이 된 걸 보면 감개무량하다.”

목노주점이란 목로주점(木爐 또는 木로)이다. 한자를 보면 화롯불을 피우는 술집이라는 뜻, 판자를 깔고 파는 집이라고 해석이 다르다. 둘 다 맞는 말인 듯하다. 이런 술집은 1970년대까지도 전국에 있었다. 만화가게 장의자처럼 나무판자를 길게 이어 붙여 앉거나, 안주가 판자 위에 올라앉아 있기도 했다. 목로주점이란 말은 정작 에밀 졸라의 걸작 <목로주점> 때문에 널리 알려졌다. 이 책을 번역한 출판사들은 보통 50쇄, 100쇄를 찍어댔다. 원제는 불어로 <L’Assommoir>다. 뒷골목의 너저분한 술집이란 뜻이라고 한다. 이걸 목로주점이라고 바꾼 최초의 한글 번역은 정말 멋지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은 그저 평범한 이름인 <이자카야(居酒屋)>였다.

선술집은 대폿집이며 실비집이었다. 대포는 술잔이 박으로 만든 것이어서, 실비란 실비(實費)에서 온 것으로, 싸게 판다는 의미로 붙은 것이라고 한다. 선술집이란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서서 먹는 술집이란 뜻이다. 조선 후기부터 있었는지 일제강점기 무렵에 생긴 건지 확실치 않다. 지금은 그냥 허름한 대중 술집을 그냥 선술집이라고도 부른다. 하지만 어원을 파고들어가면 ‘서서 마시는 집’이 맞는 것 같다. 실제로 몇몇 흑백 사진에서 그런 장면을 발견할 수 있다. 서서갈비라는 상호를 만들어냈던 신촌의 유명한 술집 주인은 “미군이 버린 드럼통을 놓고 둘러서서 돼지비계를 굽거나 하며 술을 마셨다”고 내게 증언하기도 했다. 미군은 우리에게 술상까지 제공하고 건설재료도 주었다. 물론 그럴 의도를 가졌을 리가 없지만,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시레이션 박스 같은 걸로 집을 짓고 사는 사람들이 많았으니까.

시대는 변하게 마련이지만, 이 복고와 레트로의 시대에도 각광받지 못하고 옛 선술집들이 하나둘 사라지는 걸 보면 안타깝다. 그 집들을 지탱해온 할머니들이 퇴장하니, 누구도 대를 잇지 않는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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