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당 이회영 선생 숭고한 독립정신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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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만주 등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 사상가였던 우당 이회영(1867∼1932·사진) 선생 순국 90주기 추모식이 17일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개최됐다.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우당이회영선생기념사업회가 '아흔 번째 난잎'을 주제로 진행한 이번 추모식에는 이회영 선생 후손인 이종걸 기념사업회장과 이종찬 우당교육문화재단 이사장, 박민식 보훈처장 등 200여명이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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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명 후 이국서 항일운동 헌신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우당이회영선생기념사업회가 ‘아흔 번째 난잎’을 주제로 진행한 이번 추모식에는 이회영 선생 후손인 이종걸 기념사업회장과 이종찬 우당교육문화재단 이사장, 박민식 보훈처장 등 200여명이 참석했다.
1867년 서울에서 태어난 이회영 선생은 1910년 12월 이석영(1991년 애국장)·이시영(1949년 대한민국장) 선생 등 6형제와 가족 등 50여명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중국 만주로 망명,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당시 이회영 선생 여섯 형제는 독립운동 자금으로 쌀 6000석(현재 기준 약 600억원)을 내놨다.
이회영 선생은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이뤄진 1898년 민중계몽 운동, 1905년 을사오적 규탄, 1906년 안창호·전덕기·양기탁·이동녕·신채호·노백린 등과 함께 설립한 비밀결사 신민회 등에서 활동했다. 민족 교육과 독립운동 인재 양성을 위해 1907년 서전서숙 및 1908년 상동청년학원을 개설했다.
1912년에는 청산리전투의 주역들을 배출한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했고, 1931년 항일구국연맹을 조직했다. 선생은 1932년 만주에 연락 근거지를 확보하고 지하 공작망을 조직할 목적으로 상하이에서 다롄으로 배를 타고 가던 중 일본 경찰에 붙잡혀 고문을 당한 끝에 옥중에서 순국했다.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박민식 보훈처장은 “조국 독립을 위해 일생을 바치셨던 선생의 숭고한 희생정신과 애국혼을 엄숙한 마음으로 되새기며 우리 국민이 선생의 숭고한 뜻과 정신을 언제나 기억하고 계승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박수찬 기자 psc@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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