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기자생활] 지금 필요한 건 기다림

선담은 2022. 11. 17.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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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기자생활]

지난 13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애도와 민주주의의 길 걷기’ 참가자들이 이태원참사 희생자들을 애도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선담은 | 정치팀 기자

“이런 사건이 일어나면 꼭 피해자들이 열심히 투쟁해야 뭔가 나오는 사회 분위기가 있잖아요. 저희는 그러고 싶지 않거든요. 아버지도 절대 그걸 원하지 않으실 것 같아요.”

2년 전 겨울, 중대재해처벌법 제정을 앞두고 만난 산업재해 사망자 유족 ㄱ씨는 자신이 산재 피해자 가족모임에 나가지 않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ㄱ씨 아버지는 그해 강원도 한 시멘트 공장에서 일하다 컨베이어 벨트에 끼여 목숨을 잃은 하청노동자였다. 유족은 원청기업의 사과를 요구하며 한달 가까이 장례를 미뤘다. 이 과정에서 ㄱ씨는 민주노총 지역본부와 함께 몇차례 기자회견과 언론 인터뷰에 나서기도 했다. 그러나 ㄱ씨 동생은 아버지의 산재 사고를 공론화하는 걸 반대했다고 한다. 동생은 공무원 중에서도 조직문화가 보수적인 직군에 종사했는데, 가족 사연이 알려질 경우 행여 직장에서 편견 어린 시선을 받게 될 것을 걱정했다.

동생을 대신해 회사와 고용노동부를 상대했던 ㄱ씨도 그 무렵 많이 지쳐 있었다. 그는 “몇년을 싸우고 있는데도 제자리에 있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고 했다. 가장으로서 앞으로 남은 가족을 책임지려면 하루빨리 슬픔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그치는 모습이었다. 우리에게 익숙한 세월호 참사 유족이나 이제는 노동운동가가 된 고 김용균씨 어머니 김미숙씨처럼 재난·산재로 가족을 잃은 뒤 ‘투사’가 되는 이들도 있지만, 현장에선 그보다 많은 유족들이 ㄱ씨처럼 ‘현실적 선택’을 하는 경우를 본다. 생업을 포기한 채 ‘내 가족이 왜 죽었는지를 알려달라’며 관공서를 찾아다닐 경제적 여유가 없어서일 수도 있고, 과거 사례에 비춰볼 때 정부를 상대로 몇년이 걸릴지 모르는 싸움을 이어갈 자신이 없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처음 기자가 돼서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땐 ‘현실적 선택’을 하는 유족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도 가족이 억울하게 목숨을 잃었는데 끝까지 매달려야 하는 거 아닌가?”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고, 회사와 피해보상금을 합의하고 ‘기사를 그만 써달라’는 유족의 연락을 받았을 땐 “돈 몇푼이 그렇게 중요한가?”라며 그를 ‘매정한 사람’으로 여겼던 적도 있다. 그런데 지금은 잘 모르겠다. 수년 동안 가족의 죽음에 매달리다 어딘가 망가져버린 유족을 볼 때면, 무엇이 정답이라고 말할 자신이 없다. 유족이 어떤 선택을 하든, 그 자체를 존중하는 것이 기자이자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도리라고 생각하는 이유다.

분명한 것은 ㄱ씨 말처럼 “꼭 피해자들이 열심히 투쟁을 해야”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진척되는 사회는 건강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태원 참사와 관련해 ‘경찰이나 소방 인력을 미리 배치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며 책임을 회피한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이나 국정조사를 거부하는 여당의 태도는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정부의 무책임을 이유로 신생 온라인 매체 <시민언론 민들레>가 희생자들의 실명을 일방 공개한 것 역시 유족을 위한 결정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사회적 추모를 통해 재발방지 대책을 마련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그 과정에서 유족의 의사를 배제한 채 희생자 이름을 동원하는 건 폭력에 불과하다. 사전에 유족을 만나기 위해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던 <민들레>는 비판이 커지자 뒤늦게 ‘유족이 이메일로 연락을 주면 이름을 삭제하겠다’고 발을 뺐다. 더욱이 이들과 협업한 <시민언론 더탐사>는 희생자 추모 미사 사진을 배경으로 자신들의 소송비용 마련을 위한 ‘떡볶이 광고 먹방’을 선보였다. 추모는 명분일 뿐, 이들이 돈벌이를 위해 참사 희생자를 이용한 것 아니냐는 지적까지 나온다.

대다수 시민들은 희생자의 얼굴과 이름을 몰라도 이태원 참사에 슬퍼하고 분노한다. 도심 한복판에서 이런 일이 언제든 나와 내 가족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 유족에게 애도의 마음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침묵을 지키고 있는 유족들도 언젠가 세상을 떠난 가족의 이야기를 말하고 싶은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들이 ㄱ씨처럼 먼저 지쳐 숨어버리지 않도록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하다. 참사의 책임을 묻는 일은 희생자 이름 찾기가 아닌 동료 시민들의 목소리를 모으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sun@hani.co.kr

온라인 매체 <민들레> 누리집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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