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보름 동안의 애도

한겨레 2022. 11. 17.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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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이태원 참사]

지난 5일부터 12일까지 연 ‘이태원 참사 희생자 새크라멘토 분향소 In Memory of The Itaewon Tragedy’. 미국 새크라멘토 한인회와 한국학교 학부모 일동 주관. 사진 안희경

[세상읽기] 안희경 | 재미 저널리스트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을 위한 새크라멘토 분향소를 만들면 좋겠어요.”

지난 2일 수요일 아침, 한국학교 학부모들 독서모임 대화방에 제안했다. 정오 즈음 첫 호응이 올라왔다. 연이어 세명이 더 나섰다. 그날 저녁 화상회의엔 다섯명이 등장했다. 응급실 근무로, 피아노 수업, 회의 등으로 함께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알리는 알림도 이어졌다. 그렇게 모두의 마음이 모였고, 실무 논의로 들어갔다. 한인공동체가 보유한 한국학교에 분향소를 만들고 ‘이태원 참사 희생자 새크라멘토 분향소 In Memory of The Itaewon Tragedy’ 문구를 내걸기로 했다. 희생자라고 명시하고 기억하며 안전한 사회를 만들겠다는 다짐으로 ‘memory’(추모)를 넣었다. 주관은 새크라멘토 한인회와 한국학교 학부모 일동. 한인회는 제안해줘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비용 일부를 맡았다.

회의를 마칠 무렵 왜 이 자리에 왔는지 물었다. “희생자들이 제 아이와 같은 나이입니다.” “어떻게, 걸어가다 죽을 수 있죠?” “그들이 당하는 모욕을 막고 싶어요.” “세월호 때 아무것도 안 했어요. 뭐라도 하고 싶어요.”

금요일 아침, 분향소 설치를 위해 여덟명이 모였다. 검은 벽지를 배경으로 검은 제단을 만들어 흰 꽃으로 단을 돋웠다. 촛대와 향로를 올리고 위패를 모셨다. 꽃을 꽂는 동안 70대 할머니 두분이 다가와 “고맙다”를 연발하며 우셨다. 숙연해지는 시간이 반복됐다. 헤어질 즈음 진희씨가 말했다. 사회로부터 받은 불신과 상처가 위로받기 시작했다고.

토요일 오전 10시, 한국학교 선생님들과 고학년 학생들이 국화를 올리며 분향소 문을 열었다. 그에 앞서 십여분이 무리지어 왔고, 한 중년 부부도 먼 거리를 달려왔다. 저학년 반을 이끌고 나온 선생님은 “한국에서 많은 사람이 돌아가셨습니다. 꽃을 올리며 마음을 전해요”라고 설명했다. 아이들은 생각을 모으며 온몸으로 선생님의 말씀을 따랐다. 한 여고생은 방명록에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라고 적었다.

학교가 파한 뒤, 검은 코트를 걸친 20대 남성이 “분향소 맞냐?”고 물어왔다. 뒤이어 30대 여성도 들어섰다. 한국마켓에 붙은 포스터를 보고 온 이들이다. 알음알음 찾아와 마음을 전하는 이들이 8일 내내 이어졌다. 10대부터 80대 어르신들까지, 직장인들도 출근시간을 조정해가며 찾아왔다. 비 오는 화요일, 두 여성이 분향 약속을 하고 만났다고 했다. 세월호 때 그 나이대 아이들을 키웠는데, 다시 그 또래라며 눈물을 훔쳤다. 양초가 떨어져 들른 한국잡화점에서는 돈을 받지 않았다. 졸업생 아빠인 미국인 케빈씨는 한국인들만의 참사가 아니라며 자청해서 분향소를 지켰다.

순탄한 시간만은 아니었다. 예상치 못한 장소 사용료를 내야 했고, 어린이들 정서에 맞는지 염려된다는 의견과 파티에 갔다가 당한 사고 아니냐는 의아함과도 마주했다. 일요일에는 학교에서 예배를 보는 교회와 시간, 장소가 겹쳐 병풍으로 분향소를 부분적으로 가려야 했다. 그래도 목사님 설교는 분향소 안내로 시작됐다.

닷새 지났을 때다. 건강체조교실에 오신 할머니 몇분이 나누는 얘기 소리가 들려왔다. ‘세월호, 빨갱이, 엄마들이 애들을 물들인다.’ 그 와중에도 할머니 한분이 나와 묵념했다. 분향소 차릴 때 눈물짓던 할머니는 검정 니트를 차려입고 일찌감치 들렀다.

분향소를 지키는 우리의 대화도 익어갔다. 간호사 진아씨는 ‘나도 피해자 혹은 생존자가 됐을 것이다’라고 했다. 병원 복도에서 마주 오는 사람과 맞닥뜨릴 때면 상대 걸음을 파악하고 재빨리 지나쳤다고 했다. 상대가 미안해할 필요 없이 상황을 풀 계산이었다고. 하지만, 곧 기다릴 수도 있었다는 후회가 들었다고 했다. 이태원에 있었다면 ‘통과하자’는 생각에 무조건 나아갔을 거라 했다. 진희씨는 아이 넷을 키우느라 바빠 막내 손을 잡고 나선 올해 비로소 핼러윈을 만끽했다고 말했다. 기괴했던 핼러윈 밤은 일년에 하루 이웃집이 열리는 날이다. 산책하다 스쳤던 사람이 사탕 바구니를 들고 미소 짓는 시간이다. 마을 사람들이 연결되는 밤. 이태원의 핼러윈도 그런 날이다. 처음 본 남과 사진 찍고, 나와 네가 주인공이 되는 신데렐라의 시간. 발산하는 에너지를 담아온 공간이다.

마지막 분향자는 울산 전국장애인체육대회에 미주 수영대표로 참가했던 청년이다. 어머니가 한국계인 이 미국인은 울산에서 뉴스로 봤다며 기도했다. 진희씨가 말했다. 사람들이 오든 안 오든 마음을 다하고 싶었다고. 한시간을 운전하고 나와 나흘을 지켰다. 이태원에 있던 이들에게 ‘내가 여기서 당신을 염려한다’는 진희씨의 마음이 전해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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