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춘추] 견디는 힘, 여행!

2022. 11. 17. 17:12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 매경춘추 ◆

검사로 재직할 때 여행은 큰마음 먹고 시작해야 하는 이벤트였다. 짧은 여행이라도 가려면 진행 중인 사건에 지장이 없는지 꼼꼼히 점검하고, 부장·차장·검사장 휴가 일정도 살펴야 한다. 윗분들은 '맘 편히 다녀와'라며 진심 가득한 말을 건네지만, 그 말에 걸림이 있음은 조직 생활을 하는 사람은 다 안다.

지난 9월, 27년 공직을 마치고 가장 많이 들은 말은 '그동안 못 가본 여행을 가라'는 것이었다. 아내와 둘이서 '외국으로 갈까, 국내로 갈까?' 이런저런 궁리를 하며 실행 의지를 다졌다. 외국에 있는 지인은 '최상급 의전으로 모시겠다'며 황송한 초대까지 해 주셨지만, 아쉽게도 여러 이유로 실행하지 못하고, 제주도를 가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자! 떠나자!' 하고 훌쩍 떠나는 여행도 매력적인데, 아내는 여행 계획만큼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짜야 하는 치밀한 철학을 가진 분이라 노트북을 열고 '잠만 자는 숙소는 최대한 싸게, 중요한 것은 맛집이니 그 지역에서 가장 소문난 집으로, 봐야 할 명소와 식당의 동선은 최대한 짧게'라는 중요한 미션을 마치고 나니, 여행을 다녀온 것과 다름이 없었다. 아내의 철저한 준비 덕분에 제주 동부, 서귀포, 서부 세 권역으로 나눠서 숙소를 옮겨 다니며 제주의 참맛을 느끼고 왔다. 비자림의 신령스러움과 상큼한 비자 내음, 애월의 석양, 우도의 바람, 섭지코지의 웅장한 파도, 남아메리카 어느 해안으로부터 파도를 타고 밀려왔을지도 모르는 씨앗 하나가 만들어낸 선인장 군락에 핀 노란 꽃은 밤하늘에 빛나는 별처럼 순간순간 내 맘속에서 반짝인다.

지난 주말에는 통영에 다녀왔다. 검찰 동료로 지내던 변호사의 제안으로 다양한 직역에서 일하는 소중한 사람들과 통영의 예술을 느끼고 오자며 의기투합한 여행이다. 통영 하면 화가 전혁림, 이중섭, 음악가 윤이상, 소설가 박경리, 시인 유치환, 김춘수 등 수없이 많은 예술가가 떠오른다. 1947년 통영여중에는 전혁림, 류치환, 윤이상 세 분이 교사로 재직하였다니 당시 여중생들은 이만저만 복(福)을 받은 게 아니다. 이 세 분의 거장들이 지금은 할머니가 되신 여중생들과 찍은 경주 수학여행 사진을 전혁림미술관에서 볼 수 있다.

여행의 백미는 전혁림미술관과 통영옻칠미술관이었다. 영광스럽게 전영근 전혁림미술관 관장님과 김성수 통영옻칠미술관 관장님께 직접 작품의 내용과 제작 과정에 대한 설명을 듣고 예술혼과 전통 기법을 이어가는 과정에 담긴 숭고하고도 가슴 시린 이야기까지 들을 수 있었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 되기 위하여 중앙과 지방의 치밀하고 체계적인 지원과 창의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이른 우리 일행은 세미나를 방불케 하는 토론을 거듭하며 그들의 마음을 읽어보려 노력했다. '여행인지, 세미나인지' 헷갈린다. 이번 여행의 또 다른 보람과 즐거움이다.

여행에서 얻는 가장 큰 것은 '견디는 힘'이 아닐까?

그 지역의 자연에서, 예술에서, 예술혼을 이어가려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옛사람의 자취가 묻어 있는 거리에서 우리는 또 일주일을, 한 달을, 아니 일 년을 살아갈 힘을 얻는다. 1991년 사법시험에 떨어지고, 전국을 일주하며 보았던 풍광과 그 길에서 우연히 만났던 사람들이 한발 더 앞으로 나아가는 힘이 되었던 기억이 새삼 떠오른다. 삶이 팍팍하고, 정치와 사회 이슈가 내 맘을 어지럽히는 요즘이라면 여행의 적기(適期)일 수 있다. 여행은커녕 여러 사정으로 주말조차 쉴 수 없는 많은 분께 죄송한 마음은 어쩔 수 없다.

[김후곤 법무법인 로백스 대표변호사]

Copyright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