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 대심도 지하도로
지하 세계는 공상과학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공간이다. 지상에서 쫓겨난 범죄자나 가난한 이들이 모여 사는 장소로 많이 묘사된다. 첨단기술이 발전한 지상과 달리 지하는 과거에 머문 구시대를 뜻한다. 영화 <기생충>에서 보여준 것처럼 지상과 지하는 빈부가 갈리는 양극화의 상징으로도 쓰인다.
국토교통부가 ‘도시지역 지하도로 설계지침’을 개정하기로 했다고 16일 밝혔다. 지하도로에서 차량이 시속 100㎞로 달려도 안전하도록 터널 높이를 높이고, 직진성을 강화하는 내용이다. 상하수도와 가스관 등 지하시설은 대부분 지표 5m 이내인데, 최근 지하개발은 40m 이상 대심도(大深度)에 집중돼 있다. 지난해 개통한 신월여의지하도로와 서부간선지하도로는 지하 70~80m에 건설됐다. 수도권 외곽과 서울 도심을 연결할 수도권광역급행철도(GTX)는 철로와 역사를 지하 40m 이하에 건설하는 대심도 공법을 사용 중이다. 경인고속도로 인천 남청라IC~서울 신월IC 19.3㎞와 경부고속도로 경기 화성~양재IC 32.3㎞ 지하화 구간도 대심도에 건설한다는 게 정부 계획이다.
대심도 개발이 붐인 이유는 지상에는 설비를 확충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도심은 땅값이 비싸 도로나 철도를 새로 건설할 수 없다. 반면 지하는 얼마든지 공간을 활용할 수 있고, 대심도 개발 시 토지주에게 보상할 의무도 없다. 지하로 들어갈수록 암반이 단단해 공사가 안정적이고, 민자를 유치하면 재정 부담도 적다고 한다.
건설사와 정치인의 이해가 맞아떨어진 측면도 있다. 정치인은 교통난과 주민 불편을 해소한다는 청사진으로 대심도를 활용한다. 새 사업을 끊임없이 수주해야 할 건설사에 대심도는 블루오션이다. 하지만 개발에 따른 부담과 후유증은 이용자와 미래 세대에게 돌아간다. 민자도로인 신월여의지하도로 통행료는 ㎞당 319원이다. 경부고속도로 서울~부산(48원)의 6.7배이고, 높은 통행료로 유명한 인천공항고속도로(164원)에 비해서도 2배 가깝다. 서울은 더 과밀화할 가능성이 높다. 땅속 깊이 설치한 구조물은 관리하기 어렵고 장기적 안정성도 담보하기 힘들다. 거미줄처럼 얽히게 될 대심도 지하 교통망은 영화에서처럼 폐허도시가 될 수도 있다.
안호기 논설위원 haho0@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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