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긴장 국정감사서 후배들 칼퇴근하면... "설거지는 또 내 몫" 세종관가 '낀' 과장 [직장인 A to Z]

이진한, 박동환 2022. 11. 16.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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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쩌다 회사원 ◆

【게티이미지뱅크】

한국 사회에서 X세대(1975~1984년생)는 직종과 성별을 가리지 않고 '낀 세대'로 불린다. 위로는 베이비붐세대가 버티고 있고, 밑으로는 MZ세대의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사내 문화'가 보수적인 관가에선 더욱 그렇다. 주로 과장급인 이들은 여전히 상사들 눈치를 봐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MZ세대 부하직원들한텐 자칫 '꼰대'로 비칠 수 있어 매사에 '줄타기'하듯 균형을 잡아야 하는 부담감이 상당하다. 조직에서 어쩔 수 없이 두 세대를 잇는 '가교' 역할을 맡고 있는 이들 '낀 세대'는 고단하다.

한 경제부처에서 과장으로 근무하고 있는 이유진 씨(43·가명)는 쌀쌀해진 계절 변화가 반갑다. 습관적으로 가벼운 옷차림을 입고 출근하는 후배에게 복장에 신경 쓰라고 잔소리하지 않아도 돼서다. 그는 "민소매 차림으로 출근한 후배 사무관을 보고 실·국장이 개인 메신저로 '한 소리' 하라고 지시해 난감했던 적이 있다"며 "보통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데 그날따라 너무 휴양지 복장이어서 한 소리 했더니 곧바로 얼굴이 굳어져서는 나를 '꼰대'로 대해 당황했다"고 회상했다. 이어 "이런 '세대차이'는 일생생활은 물론 일하는 방식에서도 나타나는데 가끔 업무 결과에도 영향을 미쳐 요즘엔 양쪽을 어르고 달래는 편"이라고 하소연했다.

MZ세대의 공직 진출이 늘어나고 선배 세대인 X세대가 조직 내 관리자 자리에 오르기 시작하면서 이들 사이에서 '낀 세대'로서의 고충을 토로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들 '젊은 과장'은 출퇴근 시간부터 점심시간의 활용 같은 근태 관리는 물론이고 업무분장에서도 개인주의적 성향이 뚜렷한 후배들의 모습에 당황할 때가 많다고 입을 모았다. 기획재정부·산업통상자원부 등 인사 적체가 상대적으로 심하다는 평가를 받는 일부 부처에서는 승진을 위한 '사내 정치'까지 신경을 쓰게 돼 힘들다는 의견이 나왔다.

'낀 세대' 과장들은 업무 분야에서 가장 큰 난감함을 느끼는 순간으로 주말근무나 야근을 지시해야 할 때를 꼽았다. 다수의 후배들이 '내 일이 아니면 나와 상관없다'는 마음가짐으로 나올 때가 많아 업무 지시를 할 때 당황하곤 한다는 설명이다. 이들은 부처의 현안을 총괄해서 다루는 국정감사 기간을 '고난의 행군'이라 칭하며 이 같은 갈등이 불거지는 대표적인 시기라고 증언했다.

한 정무부처에서 과장으로 근무하고 있는 박미영 씨(가명)는 "국감 같은 비상시국에는 자신의 일이 다 끝나더라도 남아서 선배들의 업무를 돕거나 소속 과 또는 부서 전체의 업무를 파악하는 게 관례였는데 최근에는 그런 후배를 찾아보기 어렵다"면서 "간혹 담당자를 따져가며 자신이 할 일이 아니면 알아볼 필요도 없다는 식으로 개인 일정을 우선하는 경우도 있어 놀랄 때가 있다"고 말했다.

업무를 독촉하는 것 또한 금기시되는 분위기다. 사회·정치적 이슈로 급하게 대응해야 할 사안이 생기면 업무 지시 또한 급해질 수밖에 없는데, 이 과정에서 야근 또는 주말근무를 수반하게 돼 결국 자신이 처리하고 만다는 설명이다. 일부 과장들은 부처 특성상 오전에 회의가 많아 정시 출근 시간인 9시보다 일찍 출근하기를 바라지만 그 같은 의사를 쉽게 드러내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환경부에서 과장으로 일하고 있는 김진우 씨(가명)는 "과거에는 중앙부처 공무원으로서 일정 정도의 주말근무를 당연하게 여기는 분위기가 있었는데 최근에는 '9 to 6', 주 5일 근무가 깨지면 얼굴을 찡그리는 후배들을 쉽게 볼 수 있다"며 "그렇다고 위에서 떨어지는 업무를 그냥 둘 수는 없어서 차라리 내가 하고 만다. '앓느니 죽는다'는 표현에 요즘만큼 공감했던 적이 없다"고 자조했다.

최근에는 자신이 수긍하지 못하는 지시에 대해서는 "이름을 빼달라"는 식의 의견을 개진하는 사례도 있었다고 한다. 2019년 감사원의 자료 제출 요구를 앞두고 월성원전 1호기 관련 자료를 삭제해 재판에 넘겨진 산업통상자원부 공무원들의 사례가 발단이 됐다는 설명이다. 한 산업부처 과장 이경준 씨(가명)는 "실·국장 사이에서도 어느 정도 세대교체가 이뤄지면서 과거 '까라면 까' 식의 고압적인 분위기가 상대적으로 많이 줄어들어 불합리한 지시 자체가 줄었다"면서도 "사회적 갈등 수위가 올라간 탓인지 남녀 성대결 등 본인이 책임지고 싶지 않은 사안에 대해서는 아예 관여하려고 하지 않는다. 차라리 담당자 목록에서 자신을 지워달라고 할 정도"라고 부연했다.

'주니어' 과장들은 일상생활에서도 세대 차이가 명확하게 드러난다고 주장했다. 지난 3년간 이어진 코로나19 사태 중 전면적인 재택근무를 경험하면서 이 같은 현상이 더욱 가속화했다는 설명이다. 이들이 가장 먼저 꼽은 변화는 '점심시간'의 활용이다. 과거에는 순번을 정해 실·국장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문화가 관행처럼 있었는데, 이것이 사라지면서 자기계발에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사례가 늘었다고 한다.

이유진 과장은 "과장들 사이에서도 실·국장 동석자 자격으로 식사 자리에 참여하는 일이 줄면서 점심시간 자체가 좀 더 개인적인 시간이 됐다"며 "열성적인 후배 사무관 중에는 그 시간을 다른 부처 사람들과 친해지는 데 사용하거나 운동 등 자기계발에 투자해 기특한 면도 있다"고 말했다. 다만 "특정한 목적으로 점심시간을 활용하다 보니 2시간 넘게 자리를 비운다거나 연락이 안 되는 등 선을 넘을 때도 있어 주의를 줄 때가 있다"고 덧붙였다.

연차 사용은 과장들이 희생해야 할 대표적인 사안으로 꼽혔다. 근무 기간이 쌓이면서 사용할 수 있는 연차의 개수 또한 늘어났지만 이를 다 사용할 수 없어서다. 농·축·수산업 관련 정책 부서 과장인 김정식 씨(가명)는 "일하는 동안에도 워낙 변수가 많아 예정됐던 연차를 무르고 복귀할 때가 있다"면서 "소속 부처에서 있던 일은 아니지만 신혼여행으로 연차를 10일 사용했다는 후배의 이야기를 듣고 '요즘 세대는 확실히 자신의 권리를 당당하게 찾아가는구나' 생각했다"고 일화를 밝혔다.

업무와 생활의 경계가 무뎌지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도 '낀 세대' 과장들의 비애가 이어졌다. 특히 카카오톡, 텔레그램 등 메신저를 통한 업무 지시가 일상화되면서 단체 대화방 안에서 대화 방식이 또 다른 갈등 요소가 된다는 설명이다. 이들은 실·국장들의 발언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아 "대답 좀 하라"는 메시지가 나오는 등의 상황을 과장들이 '총대를 메는' 또 다른 경우라고 예를 들었다. 이유진 과장은 "간혹가다 업무 관련 지시에도 후배 사무관들이 대답을 안 해 대신 대답하고 확인했는지 등을 개인적으로 따로 묻는다"고 부연했다.

일부 부처 과장들은 정부청사가 세종으로 이동한 여파도 있다고 주장했다. 행정기능의 상당 부분이 아직 서울에 남아 있어 고위급 인사들이 서울에 머물러야 할 때가 많은 만큼 세종에 있는 실무자들과 신뢰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예전 같을 수 없다는 설명이다. 인사 적체가 세대 간 간극을 더 벌리고 있다는 의견도 있었다. 과장으로 승진할 수 있는 시기가 과거에 비해 늦춰진 데다, 설혹 승진하더라도 핵심 보직이 아닌 '미관말직'에 머무르다 은퇴하는 사례가 늘어나면서 조직에 대한 충성도 또한 떨어졌다는 논리다. 한 과장은 "결국 공무원 조직에 남아 있기로 결심한다면 승진을 위해 '사내 정치'에 매진할지, 만년 과장 신세에 만족할지 선택해야 한다"며 냉소를 보였다.

'낀 세대' 과장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딜레마에 빗대면서도 세대 간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미영 과장은 "X세대야말로 개인주의가 내재된 세대다. 그런데 조직우선주의가 확고할 때 사회에 진출해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꼴"이라며 "가끔 사회적으로 특이함을 인정받는 후배 세대가 부럽다"고 말했다. 이어 "자신에게 주어진 바를 책임감 있게 처리하는 후배들을 보면 조직을 활용하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싶다. 한 발짝 다가오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이진한 기자 / 박동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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