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귀은의멜랑콜리아] 참사, 알레고리

2022. 11. 14. 2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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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참사와 정부의 대응 보며
그 어떤 언어로도 참담함 표현 못해
책임 추궁 받던 공무원들 자살
그들도 부실시스템 희생자 아닐까

#1. 사과할 수 없는 아이

아이가 유치원에서 맞고 왔다. 얼굴 긁힌 자국에 피가 맺혀 있다. 젊은 엄마는 유치원 교사에게 전화한다. 교사는 때린 아이를 교육하겠다고 말한다. 며칠 뒤, 유치원에서 온 아이의 표정이 다시 굳어 있다. 엄마는 유치원에 찾아간다. 뾰족한 수가 없다. 딸을 때린 상대는 딸과 같은 어린아이다.
한귀은 경상국립대 교수 작가
“너도 참지만 말고, 가만있지만 말고, 응?” 엄마는 차마 그 다음 말을 잇지 못한다. 때리라고는 말 못하겠다. 아이는 엄마의 마음을 안다. “나도 때리면 나중에 내가 잘못했다고 사과해야 하잖아.”

이 예민한 아이는 잘못하지 않은 것에 대해 미안하다고 말할 수가 없다. 잘못하지 않았는데 잘못했다고 말해서 자존심이 상하는 것이 아니다. 아이는 자기 기만을 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사과는 기만이고, 이 기만으로 진실을 덮고 싶지 않은 것이다. 자신이 사과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것이다. 사과하는 아이를 어른은 칭찬할지도 모르고, 사과는 면책이겠으나, 그 때문에 문제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왜곡될 것이다.

선생과 부모는 때린 아이에게 사과하라 타이른다. 때린 아이는 곧장 사과한다. 선생과 부모는 만족한다. 사과받은 아이는 고통스럽다. 사과는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지 못하는 자에게 사과를 받아내려는 것은 오히려 사과받는 사람을 거듭 소외시킬 뿐이다. ‘잘못’이 규명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과부터 받는 것은 오히려 잘못한 자를 면죄하는 것이 된다.

이태원 참사엔 원인이 있고, 그 원인은 복합적이며, 그래서 원인을 더 치밀하게 규명해야 한다. 그러나 이 치밀한 규명에 걸려드는 사람은 실무자다. 실무자는 과실치사, 직무유기로 잡혀들어갈 것이다. 대중이 그들에게 분노하는 사이, 그들은 또 다른 희생양이 된다. 철저한 원인 규명의 함정이다. 책임을 물었기에 근본적인 원인은 밝혀지지 않는다.

#2. 죽음이 두려운 아이

다섯 살 아이가 아빠에게 말한다. “아빠, 죽는 게 무서워.” 젊은 아빠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다행히 정신을 차리고 최대한 차분히 응대한다. 건강하면 오래오래 산다, 아빠는 오래 살 것이다, 너도 건강하니까 오래오래 살 것이다. 이 현명한 아빠는, ‘아빠는 죽지 않는다’ 같은 환상으로 상황을 봉합하지 않는다. ‘사람은 다 죽는다’ 운운하며 아이도 모르지 않는 사실을 거듭 확인시켜주지도 않는다.

아이에게 전달된 것은 무엇일까. 아빠가 오래오래 살 거라는 믿음이 아니다. 자신이 무럭무럭 커서 건강한 어른이 될 거라는 확신도 아니다. 아이에게 전달된 것은 아빠가 그 이야기를 차분히 해내기 위해 숨긴 긴장과 불안이다.

아이가 왜 죽음을 두려워할까. 아이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다. 아이는 불안한 것이다. 아이는 자신이 온전히 보호받고 있다는 안정감이 없는 것이다. 그 불안이 죽음에 투사된 것이다. 아이에게 필요한 건 죽음에 대한 지식도, 오래오래 살 거라는 확신도 아니다. 자신이 보호받는다는 안정감이다.

밥벌이가 고단한 젊은 부부는 아이를 더 잘 키우기 위해 잔뜩 긴장했을 것이고, 그 긴장은 아이에게 전이됐을 것이다. 모두가 불안한 시대, 재난의 시대다. 이 세상엔 불안한 이와 불안을 억압한 이가 살고 있다. 아이는 불안했고, 부모는 불안을 억압했다. 그래도 아슬아슬 살아간다. 서로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태원 참사로 그 불안한 균형마저 깨졌다. 불안에, 공포와 슬픔이 뒤섞인다. 국가가 애도 기간을 지정하는 것은 도착적(倒錯的)이다. 책임을 져야 할 국가가 애도를 규정한다는 것도 당착적이다. 애도는 규범으로 정할 수 없다. 우리는 국가의 명령에 따라 애도하는 것인가. ‘애도 기간’이라는 것은 상처받은 개인의 슬픔의 개별성을 삭제한다. 개인은 슬픔을 도난당한 듯한 박탈감을 느낀다. 애도 기간은 그 이후, 애도 부재의 알리바이가 된다. 애도 기간 지정은 오히려 일정 시간이 지나면 일상으로 복귀하라는 국가의 명령에 다름 아니다.

#3. 언어를 얻지 못한 고통

참사 생존자와 희생자 가족은 아직 긴 이야기를 할 수 없다. 조각조각 파편 같은 목소리를 낼 수 있을 뿐이다. 스물한 살 생존자는 그 상황이 기괴했다고 말했다. 물이 차는 것처럼 숨을 쉴 수 없었다고 했다. 압사는 또 다른 익사였다. 물이 차오르는 듯 숨을 쉴 수 없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는데, 2층에서 웃으며 촬영하는 사람이 보였단다. 이제 죽는구나 했을 때, 함께 온 친구의 손을 꼭 잡았다. 정신을 잃었고, 그땐 분명히 발이 땅에 붙어 있었는데, 깨 보니 발이 땅 위에 떠 있었다. 그리고 발밑에 주검이 있었다. 병원에서 친구가 사망했다는 걸 알았다.

그 고통을 듣는 우리도 온전히 이성적일 수 없다. 이 글이 알레고리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알레고리는 표현할 수 없는 일에 대해 고작 선택할 수 있는 발화법이다. 알레고리는 글 쓰는 이의 무능을 증명한다.

두 사람이 자살했다. 참사의 책임 추궁을 받던 공무원이었다. 이 중 한 명은 아직 수사 대상이 아니었다. 희생양 찾기가 전방위로, 최하단까지 뻗쳐 있다는 뜻이다. 수많은 하급 실무자가 죄의식과 억울함과 공포에 노출돼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도 국가의 부실한 시스템의 희생자는 아닐까. 이 시스템의 희생자가 참사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희생양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귀은 경상국립대 교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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