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T현장] 신뢰의 비용

이윤희 2022. 11. 14.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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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희 증권팀장

이윤희 증권팀장

공무원인 후배가 재미있는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언니, 신뢰 보호의 원칙이란 게 있거든, 이 원칙은 사인 간에도 지켜져야 하는 거 아냐? 예컨대 이성이 매일 메신저로 점심 메뉴를 묻는다거나 주말에 만나 시간을 보낸다거나 해놓고, 암묵적이나마 사귈 것처럼 썸은 타 놓고 사귀지 않는 것도 신뢰를 배반하는 거라고."

'신뢰 보호의 원칙'이란 법률이 신뢰를 받는 사회에서 일정한 법적 지위를 형성한 경우, 국가는 국민의 법률행위를 보호해야 한다는 헌법상 원칙이다. 주로 정부 등 행정기관이 국민의 보호 가치가 있는 신뢰를 지켜주어야 한다는 의미로 공무원에게는 교과서적 신념에 가깝다.

그런데 후배는 사회 내에 있는 사인 간에도 이 원칙은 지켜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물었다. 아무리 사적인 관계라고 해도 신뢰 보호 원칙을 지키는 것이 여러모로 바람직하겠지 하고 답했던 것 같다. 헌법이 아니라 상식의 문제니까.

하지만 인간사는 꽤 복잡하다. 마음 같아서는 상대방의 신뢰를 지켜주고 싶지만, 나의 사정은 달라질 수도 있다. 그러니까 썸만 타고 사귀지 않을 수도 있다. 아무 일도 없을 수도 있지만 상대방은 나를 더는 믿지 못할 것이다.

어쩌면 나의 사회적 평판이 추락할 수도 있다. 나는 억울하다. 나도 결단코 사귀려고 했는데 갑자기 상황이 어려워진 걸 어떡하냐고, 애초에 '사귀자'는 말(계약)을 한 건 아니지 않냐고 속내를 토로할 수도 있다.

사실 이 이야기는 최근에 금융시장에서 불거졌던 몇 가지 사건들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레고랜드 사업주체인 GJC(강원도중도개발공사)가 자금조달을 위해 2050억원 규모의 ABCP(유동화기업어음)를 발행하고 강원도가 보증을 섰다. 그런데 강원도가 갑자기 채무보증을 이행하지 않기로 하면서 시장이 큰 혼란에 빠졌다.

이 소식은 최고신용등급의 지자체마저도 돈을 못 갚는 상황이라는 '신호'가 돼 시장에 퍼졌다. 단기금융시장에 돈이 돌지 않았다. 여전채와 회사채 등의 채권 금리가 사상 최고치로 치달았고, 공사채마저 계획한 금액을 다 채우지 못한 채 발행이 취소됐다. 투자자들의 신뢰가 깨지자 그 '신뢰의 비용'이 금리에 더해진 것이다.

그리고 얼마 후 흥국생명이 과거 자금을 조달하려고 발행했던 5억 달러 규모의 신종자본증권에 대해서 '콜옵션'을 행사하지 않겠다고 공시했다. 만기가 30년인 신종자본증권에는 통상 돈 빌리고 5~10년 뒤에 원금을 갚겠다는 약속인 콜옵션이 붙는다.

흥국생명도 발행 5년 뒤인 올해 11월 9일에 콜옵션을 행사하겠다는 조건을 달았었다. 콜옵션을 행사해 원금을 조기에 상환하는 것이 업계의 관행이고, 그렇지 않았다면 투자자를 구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런 경우도 지난 2009년 금융위기 직후 우리은행이 4억 달러 규모의 후순위채권 콜옵션을 행사하지 않기로 한 이후 처음이다.

흥국생명은 이번에 5억 달러를 상환하고 나서 새 채권을 발행해야 하지만 고금리에 자금시장 경색으로 돈을 빌릴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을 것이다. 회사는 스텝업 조항에 따라 더 높은 이자를 투자자들에게 주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국제 금융시장에 이 소식이 전해지자 흥국생명 뿐 아니라 다른 보험사들의 신종자본증권 가격까지 급락했다. 한국물(Korean Paper) 전반에 대한 투심이 악화했다. 한국의 대외신인도를 보여주는 신용부도스와프(CDS·credit default swap) 프리미엄이 6년 만에 최고치를 찍었다.

신뢰에는 돈이 든다. 신뢰가 한 번 깨지면 그 이후의 약속은 또 다시 신뢰가 깨질 수 있다는 가정 하에 설계돼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모든 혼란이 강원도와 흥국생명의 책임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저간의 사정도 충분히 이해한다. 이미 연초부터 단기금융·회사채 시장은 급격한 금리 인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기업들의 자금조달이 어려워진 것도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하지만 한 번 신뢰를 깨면 그 당사자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까지 그 비용을 치러야 한다.

아까 말했듯이 인간사는 복잡하다. 금융시장도 여러 개의 톱니가 맞물리듯 돌아가는데 이해는 다 다르기 때문에 복잡하다. 신뢰가 중요하다지만 자신의 이해에 따라 채무불이행을 선언한 보증 주체나 옵션 행사를 포기한 발행사를 탓할 수 있을까.

아직 잘 모르겠다. 하지만 하나 분명한 것은 '밤 10시 서울 이태원 거리는 안전하다'는 시민들의 신뢰를 지켜주지 못한 것은 분명한 국가의 잘못이란 것이다. 이 자리를 빌어 그들의 명복을 빌고 우리 사회의 신뢰 회복을 기도한다. stels@dt.c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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