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주식엔 있고 한국주식에는 없는 것"
"이사회는 만장일치로 합병 계약 및 이에 따라 예정된 거래가 공정하고 회사와 회사의 주주들에게 최선의 이익이 된다고 결정했습니다"
미국 나스닥 상장 바이오기업 아베오 파마슈티컬스(AVEO Pharmaceuticals, 이하 아베오)가 지난 10월 18일 미국 전자공시스템(EDGAR)에 발표한 8-K(우리나라의 주요사항보고서에 해당) 공시에 담긴 내용입니다.
미국식품의약국(FDA) 승인 신장암 치료제를 보유한 아베오는 이날 이사회를 열고 외국의 다른 회사와 주식 매각 계약을 체결했다고 발표했는데요. 1주당 매각가격은 15달러로 공시 발표 전날 종가(10.48달러)보다 43%의 프리미엄을 얹은 것입니다.
비즈니스워치 공시줍줍팀은 이 공시에서 한국의 기업공시와 매우 다른 몇 가지를 발견했습니다.
첫 번째는 주식 전부를 매각한다는 겁니다. 소수 주주는 쏙 빼고 최대주주만 고가의 경영권 프리미엄을 받고 지분을 매각하는 관행에 익숙한 한국기업과 달리 아베오는 모든 주주의 주식에 동등한 프리미엄을 얹어서 매각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결정을 한 아베오 이사회가 밝힌 내용, 즉 "이번 거래가 공정하고 회사와 회사의 주주들에게 최선이 이익이 된다"는 문구에도 주목해봤습니다.
아베오가 발표한 공시의 영어 원문은 이렇습니다.
The board of directors of the Company has unanimously determined that the Merger Agreement and the transactions contemplated thereby, including the Merger, are fair to, and in the best interests of, the Company and the Company’s stockholders.
회사(the Company)와 회사의 주주(the Company’s stockholders)를 각각 별개로 지칭하는 'the'를 넣음으로써 아베오 이사회가 주식매각 결정때 회사의 이익뿐 아니라 회사 전체 주주의 이익을 함께 고려했음을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죠.
아베오의 법적 본사는 미국 델라웨어주에 있는데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고향이기도 한 델라웨어는 '기업의 천국'이라 불릴 정도로 친기업적인 정책과 법률체계를 갖춘 곳이어서 아베오는 물론 구글, 테슬라 같은 유명회사들의 법적 본사가 집결해 있는 곳.
하지만 델라웨어 회사법에는 이런 문구 하나가 들어있습니다.
"회사 또는 회사의 주주에 대한 이사의 충실의무(duty of loyalty)를 위반했을 때는 이사의 책임을 감면해주지 않는다." (델라웨어 회사법 제 102조 (b)항 (7)호)
델라웨어 회사법에 근거해 정관을 갖추고 경영 판단을 내리는 아베오 같은 회사의 이사진은 주주 이익을 충실하게 고려하지 않을 경우 자신들이 소송을 당해 막대한 금전적 배상의무를 질 수도 있음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물적분할 후 재상장' 같은 행위를 굳이 명시적으로 금지하지 않아도 시도조차 하지 않습니다.
아무튼 미국은 이렇습니다. 그런데 "그건 미국 얘기이고 우리는 다르잖아?"라고 반문하실 수 있을 텐데요. 맞습니다. 우리는 아직 이러한 법률도, 판례도, 정관도, 그 무엇도 없습니다.
하지만 아베오의 얘기를 꺼낸 건 우리와는 너무 거리가 먼 미국 얘기를 '이상향'처럼 하고자 한 게 아닙니다. 아베오의 주식 전부를 인수하기로 한 회사의 정체가 LG화학이기 때문입니다.
아베오가 미국 전자공시시스템(EDGAR)에 이런 내용을 공시한 날(10월 18일) LG화학도 우리나라의 전자공시시스템(DART)에 '타법인 주식 및 출자증권 취득 결정'이란 제목의 공시를 발표했습니다.
LG화학은 자그마치 8000억원이 넘은 자금을 투입해 아베오 주식 100%를 인수한다고 했는데요. 그러나 LG화학 공시에는 이런 거래를 위해 이사회를 개최했다는 내용과 계약조건만 있을 뿐 그 어디에도 '회사와 회사 주주의 이익을 위해 이런 결정을 했다'는 문구는 없습니다.
LG에너지솔루션 물적분할 후 재상장으로 소수 주주가치 훼손 논란을 야기한 LG화학이 미국기업을 인수할 때는 모든 주주의 주식에 프리미엄을 지급하는 것.
이것이 미국 주식시장에는 있고, 한국 주식시장에는 없는 '주주 이익'의 개념입니다.
한국 주식시장에서 '꼬리표'처럼 수십 년간 따라다니는 '코리아디스카운트'의 원인은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비즈니스워치 공시줍줍팀은 [코리아디스카운트, 문제는 거버넌스야!] 시리즈를 시작합니다. 지난 2년간 주식투자자들에게 쉽고 친절한 기업공시 해설을 연재해온 공시줍줍팀이 시야를 좀 더 넓혀 우리 기업이 발표하는 공시 내용에 담긴 근본적 한계, 함께 생각해봐야 할 대안점을 모색하기 위함입니다.
'이사회는 회사의 이익뿐 아니라 일반주주의 이익을 함께 보호해야 한다'는 문구를 우리도 마련해야 한다는 이 분명하고 단순한 해결책을 10년 넘게 주장해온 학자(이상훈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런 내용을 담은 상법 개정안을 발의한 국회의원(이용우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에게 질문을 던져봤습니다.
싱가포르투자자연합(SIAS, Securities Investors Association Singapore)이란 기관을 들어보셨는지요? 인터넷포털 검색창에서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이 기관은 싱가포르 주식시장에서 개인투자자와 상장기업을 연결해주는 단체입니다.
매년 주총시즌 상장기업의 사업보고서를 분석, 상장기업에 질문을 던지고 답변을 받습니다. 투자자들은 이 기관이 게시하는 질문과 답변을 보고 투자 판단을 내립니다. 때론 상장기업이 주주들에게 불리한 결정을 하거나, 상장기업의 이사회가 독립적이지 못하다고 판단하면, 주주들과 힘을 합쳐 강한 목소리를 내고 변화를 이끌어냅니다.
‘주주 이익을 보호하고 가치를 공유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는 이 기관을 한국언론 가운데 처음으로 상세하게 소개할 예정입니다.
홍콩에 있는 아시아기업지배구조협회(ACGA)가 해마다 발표하는 보고서를 보면, 한국기업의 지배구조 수준은 민망할 정도로 최하위 수준입니다. 대체 왜 우리 기업 지배구조에 점수를 박하게 주는지 ACGA에 직접 물어봤습니다.
거버넌스 문제는 결국 이사회의 역할에서 출발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사회가 회사뿐 아니라 회사 주주의 이익도 충실하게 고려해야하는 이유는 한 방향의 목소리만 담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목소리를 담아내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겠죠.
그래서 이사회 구성원의 다양성을 확보하는 일도 많은 나라가 주목하는 과제입니다. 아시아에서 이사회 구성의 다양성 확보를 위해 가장 노력하는 곳은 어디일까요. 의외로 말레이시아입니다. 전체인구의 60% 정도가 무슬림일 정도로 이슬람교 중심의 국가이지만, 상장회사 이사회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이 아시아·태평양 국가 중에서 최상위권에 속합니다. 왜 그럴까요.
ESG(환경·사회·거버넌스)는 이제 더는 선언적 문구가 아닙니다. 기업은 사회와 가치를 공유해야 한다는 점, 그리고 이것이 궁극적으로 지속 가능한 기업가치 및 주주가치 상승을 이끌 수 있다는 점은 현실에서 증명되고 있습니다.
전 세계 자본시장을 움직이는 큰손 자본의 물결이 거버넌스뿐 아니라 기후위기와 사회적책임 분야로 흐르고 있기 때문이죠. 기업은 지속적인 자본 공급을 받아야 성장할 수 있고, 투자자들도 그런 기업에 투자해야 위험을 줄이고 새로운 수익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전 세계 연기금과 기관투자자들이 가입하고 주목하는 에너지·식품·부동산 분야의 지속가능성 연구단체 ARE(Asia Research and Engagement), 세계적 기후변화 투자자 연합체 AIGCC(Asia Investor Group on Climate Change)와 같은 기관에도 질문을 던져봤습니다.
이들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건 당장 오늘의 주식 가치와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일지라도, 전 세계 자본시장의 흐름이 어느 방향을 가고 있는지 이정표를 제시해주리라 생각합니다.
비즈니스워치 공시줍줍팀이 준비한 [코리아디스카운트, 문제는 거버넌스야!] 시작합니다.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박수익 (park22@bizwatch.co.kr)
김미리내 (pannil@bizwatch.co.kr)
김보라 (bora5775@bizwatch.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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