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서적·물리적으로 완벽히 찢어지는 모녀”…영화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플랫]
아이는 왜 넘어지면 엄마를 찾으며 울까. 왜 충분한 돌봄과 공감을 받지 못할 때 아빠가 아니라 엄마한테 더 서운해 할까. ‘모든 여자는 아이를 낳고 싶어 한다’ ‘아이는 아빠보다 엄마가 돌봐야 한다’는 등의 철지난 모성애 개념을 갖고 있지 않더라도, 모성 신화는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따뜻하고 헌신적인 엄마’는 사회와 제도뿐 아니라 개인의 관계와 내면 안에서도 ‘엄마의 표본’으로 자리 잡고 논리와 감정을 휘두른다. 엄마한테 기대하고, 엄마한테 실망하고, 엄마랑 싸우고 화해하게 만든다. 10일 개봉한 영화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는 그런 모성 신화에 도전장을 내민다. 그리고 ‘모성’을 끝까지 ‘두드려 팬다’.‘
영화의 주인공 이정(임지호)과 수경(양말복)은 같이 살며 속옷을 공유한다. 둘은 모녀 사이다. 이정은 20대 중후반이고 학습교재 출판사에 다닌다. 수경은 쑥좌훈방을 운영하는 중년의 여성이다. 둘은 사이가 좋지 않다. 수경은 이정이 원하는 사랑을 준 적이 없다. 직장도 있으면서 아직도 독립하지 않은 이정이 답답하다. 어느 날 마트에서 나와 함께 차를 탔을 때, 운전석에 앉은 수경이 조수석의 이정을 주먹으로 마구 때린다. 참다못한 이정은 뛰쳐나와 차 앞에 선다. 수경이 “죽여버려” 말하는데, 직후 차가 이정을 친다. 이정은 이 사고로 목발을 짚는다. 수경은 ‘급발진’이었다고 주장하는데, 이정은 믿지 않는다.
“아버지와 자식 사이 기대하는 것보다 여자들 사이에서, 엄마와 딸 사이에서 기대하는 것이 많다고 생각했어요. 요즘 가족 관계의 모습이 많이 달라지긴 했지만 여전히 아버지한테는 바라지 않고, 아버지도 자식한테 바라지 않는 것이 있어요. 엄마와 딸에게는 정서적 역할까지 기대를 하면서요. 모성이 한국에서 많은 역할과 책임을 가지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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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일 화상으로 만난 김세인 감독(31)이 말했다. 그는 “저도 엄마와 서로 감정적으로 의지를 많이 하며 가깝게 지내는 사이였다. 제가 영화 감독의 길을 선택했을 때 엄마가 ‘엄마에 대한 배신’으로 느끼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며 “시나리오를 쓰고, 모성 관련 서적을 읽으면서 엄마 한 사람의 잘못이 아니라 사회적인 영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모녀 관계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바라보게 됐는데, 제가 엄마를 이해하면서 해결된 마음을 영화에 담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이정과 수경의 관계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수경에게는 이정에 대한 조금의 죄책감과 미안함도 없다. 영화 후반 “엄마 때문에 내가 이렇게 사는 것”이라며 눈물을 펑펑 쏟는 이정에게 수경은 “젖 줄까? 너는 왜 자라지를 않냐”고 다그친다. 그래도 이 둘이 언젠가는 화해하지 않을까 기대하던 관객은 어느새 포기한다. ‘이제 그만 헤어져.’ 이 말이 절로 떠오른다. 김 감독은 “적당히 하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다소 거칠 수도 있겠지만 두 여자가 어느 정도 타협하거나 서로 스며드는 게 아니라 정서적으로 물리적으로 완벽하게 찢어지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앞뒤 없이 마구 돌진하고 싶었다”며 “좋은 얘기든 나쁜 얘기든 영화를 보고 난 이후 다양하게 오고 갈 수 있는 장을 만들어보고 싶었다. 그러려면 ‘갈 데까지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수경의 행동은 가정폭력으로 비난받을 만하다. 김 감독은 처음부터 이를 피할 생각이 없었다고 했다. 그는 “수경이 아무런 잘못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가정폭력이 맞고, 양육자로서 잘못했다”며 “다만 수경으로 인해 모든 것이 이렇게 된 것이라거나, 이 상황이 오로지 수경만의 책임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두 사람 사이의 골을 일단 다 보여주고, 대신 수경에게 마음을 주고 ‘수경이 왜 그랬을까’ 생각해 볼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자 했다”고 했다
영화는 처음에는 이정의 시선을 따라가다가 수경의 시선으로 옮겨가고, 마지막에는 둘 모두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정의 시선에서 본 수경은 천박하고 우악스럽고 폭력적이다. 그러다 수경은 점점 매력적으로 보인다. 점차 수경이 안쓰러워지고, 수경을 응원하게 된다. 영화 마지막 장면은 엉망진창으로 리코더를 연주하는 수경을 보여준다. 다수의 음이탈을 동반한 ‘헝가리 무곡’을 처음부터 끝까지 들어야 하지만, 엄청난 인내심은 필요하지 않다. 김 감독은 “음이 비틀비틀 대는데도 끝까지 곡을 연주하는 수경에게 관객들이 마음을 주고 응원할 수 있도록 연출하고 싶었다”고 했다. 성공했다.
영화는 김 감독의 첫 장편 연출작이다. 영화는 제26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뉴커런츠상’, 제10회 무주산골영화제에서 대상, 제24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발견 부문 대상을 받는 등 국내 영화제에서 상을 휩쓸고, 타이베이영화제·멜버른국제영화제·에딘버러국제영화제·도쿄필멕스국제영화제 등 다수의 국제영화제에 공식 초청돼 호평받았다. 일본과 한국을 제외한 곳에서는 <같은 아파트에 사는 두 여자(The Apartment with Two Women)>라는 제목으로 공개됐다. 다른 문화권에서는 성인 영화로 보일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판단에서다.
감독이 많은 욕심을 담아 직조한 세계가 바람대로 흘러간다. 두 모녀의 충돌에 진이 빠질 순 있지만 2시간20분의 긴 러닝타임이 지루하지 않다. 대사와 배경, 소품이 꿈틀거린다고 느껴질 정도로 현실감 있다. 특히 좌훈방에서 중년 여성들이 나누는 대화나 수경의 언행은 1992년생 감독이 썼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생생하다. 김 감독은 “어렸을 때부터 중년 여성이 있는 장소에 많이 갔다”며 “특히 많을 때는 이틀에 한 번씩 목욕탕에 다녔는데, 여탕과 사우나에서 오고 가는 날것의 대화에 계속 노출돼서 자연스럽게 습득한 부분들이 있지 않을까 한다”고 했다.
김 감독은 “태어날 때부터 완벽한 사람은 없지 않나. 영화 속 인물들도 애초부터 분명하게 옳은 선택만을 하는 사람들로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며 “엉성한 사람이 어떤 일을 겪어내면서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첫 번째 장편영화는 그런 이야기를 쓰고싶었다”고 했다. 이어 “세상에 벌어지는 불가해한 일들이 개인의 책임이나 문제 때문이 아니라 사회적 맥락 안에서 시스템의 부재와 같은 이유로 상당 부분 일어난다고 생각한다”며 “영화 속 인물들도 원래부터 이상하고 잘못돼서 이런 것이 아니라 왜 이 사람들이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는지 외연을 조금 바라봐주셨으면 한다”고 했다.
김 감독이 소재와 인물에 대해 언급한 몇 가지 이야기를 덧붙인다.
수경의 리코더
“제가 어렸을 때 학교나 가정 내에서 그게 어떤 세월의 도구로 사용되는 게 되게 흔했다. 본래 의미를 잃어버리고 어떤 폭력의 물건이 되어버린 그 물건을 다시 본래의 의미로 돌아가게 하고 싶었다”
급발진
“급발진 사고에 대한 기사들을 읽었다. 분명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있는데도 승소한 사례가 없다고 했다. 대기업에서 하자 있는 물건을 내보내지 않을 거라는 사회적 믿음이 너무 견고해서 그것에 맞지 않는 사례를 개인이 증명하기가 굉장히 어려운 상황인 것으로 보였다. 모성신화와 그것이 닿아있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했다. 한국에서는 모성이라고 하면 큰 하나의 상을 그려놓고, 거기에서 벗어난 사람은 그 사람이 잘못된 것, 그 사람이 이상한 것으로 판단하고 내친다고 느꼈다. 견고한 믿음, 그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개인의 잘못으로 취급해 버리는 행태. 이 두 가지가 닿아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자동차 급발진을 장면화하게 됐다.
소라의 바이브레이터
“종렬은 수경과 달리 ‘정상 가족’을 만들고 싶어하는 사람이다. 자신이 상정한 ‘정상적’인 것에서 자신이나 주변 사람이 벗어나는 것을 힘들어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딸 소라가 바이브레이터를 사용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도 받아들이지 못한다. 자신은 수경과 섹스를 하지만 ‘우리 딸은 안 돼’ 이런 식으로 좀 나눠서 생각하는 사람이다. 수경은 종렬과 연인으로 지내고 싶어하지만 종렬은 소라와 수경을 자신이 생각하는 가족의 구도에 끌고 와서 앉히려고 한다. 그의 고정된 시각과 편견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다루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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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경민 기자 5km@kh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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