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의학서 ‘불멸의 허브’로 기록… 위장병 · 수전증 · 지혈 등에 효과
■ 지식카페 - 박원순의 꽃의 문화사 - (20) 샐비어
샐비어는 ‘건강한’ 뜻의 라틴어 살베레·種이름 오피키날리스는‘약국’오피키나서 유래… 種마다 색깔 · 향기 다양
우리나라서 깨꽃으로 익숙한 것은 브라질이 원산… 14~15세기땐 요리 향신료로, 18세기 후반엔 관상용 인기
샐비어는 특유의 향과 아름다운 꽃으로 아주 오랫동안 많은 사랑을 받아 온 식물이다. 어린 시절 달콤한 꿀물을 빨아 먹었던 추억 속 사루비아는 샐비어를 일본어식 발음으로 부르던 이름이다. 여름에서 가을에 걸쳐 파란색 꽃이 피는 청세이지 ‘빅토리아 블루’(Salvia farinacea ‘Victoria Blue’), 솜털이 보송보송한 보랏빛 꽃받침에 흰색 꽃이 피는 멕시칸 세이지(Salvia leucantha), 상큼한 꽃과 향기를 지닌 체리 세이지(Salvia greggii)도 모두 우리에게 친숙한 샐비어 종류다.
샐비어는 원래 고대부터 중요한 약초로 쓰였던 식물이다. 기원전 1500년 전 고대 이집트의 의약서 ‘에베르스 파피루스(Ebers Papyrus)’에는 위장병과 치통, 가려움증 치료제로 등장한다. 그리스, 로마의 약초 의학서에도 수많은 기적적 효능이 기술되었는데 심지어 불멸의 허브로 언급되기도 했다.
식물 분류학상 꿀풀과에 속하는 샐비어(Salvia)는 ‘건강한’이라는 뜻의 라틴어 살베레(salvere)에서 유래했다. 샐비어의 영명인 ‘세이지(sage)’라는 이름 역시 같은 어원으로부터 옛 프랑스어(sauge)와 중세 영어(sawge)를 거쳐 형성되었으며 지혜롭다는 뜻을 지닌다.
샐비어는 한해살이풀, 두해살이풀, 여러해살이풀, 아관목 등 1000여 종류가 있다. 주로 멕시코를 비롯한 남아메리카 지역과 유라시아, 그리고 지중해 지역에 분포하며 오랜 역사를 통해 전 세계 여러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샐비어속은 우리나라에서 배암차즈기속이라 부른다. 뱀이 나올 것 같은 수풀이 우거진 들녘에 자라며 차즈기를 닮은 데서 비롯된 이름이다. 참배암차즈기, 둥근잎배암차즈기 등이 이 땅에 자생한다. 샐비어는 다른 꽃에서 보기 드문 강렬한 파란색, 여러 색조의 빨간색과 보라색 등 종마다 꽃 색깔이 다양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종마다 특유의 향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초식 동물을 쫓아내기 위해 샘털에서 분비하는 휘발성 오일 때문이다. 이러한 향유는 대부분 항균 효과와 함께 특유의 약효를 지니고 있다.
전통적으로 약효가 가장 뛰어난 샐비어는 두 종류가 있다. 먼저 지중해 북부 해안가 원산의 목본성 여러해살이 관목인 샐비어 오피키날리스(Salvia officinalis)라는 종이다. 샐비어속의 기준 식물이기도 해서 트루 세이지, 커먼 세이지, 혹은 가든 세이지라고 불리며, 크로아티아 해안에 걸친 달마티아 지방에 많이 자라 달마티안 세이지라고도 부른다. 발칸반도의 구유고슬라비아가 이 세이지 잎과 기름을 가장 많이 생산하는 나라였는데, 오늘날엔 알바니아, 헝가리, 독일, 프랑스 등지에서 널리 재배되고 있다. 약효에 걸맞게 종명인 오피키날리스(officinalis)는 전통적으로 허브와 약재를 저장했던 저장소 혹은 약국을 뜻하는 라틴어 오피키나(officina)에서 유래했다. 약초학자들뿐만 아니라 많은 요리가가 좋아할 만큼 향이 좋고, 은회색 잎과 초여름 장뇌 향을 지닌 연보랏빛 꽃은 관상 가치도 높다.
로마인들은 이 세이지를 뱀 물린 곳, 궤양 치료, 이뇨제, 피부 마취제, 지혈제, 인후통 경감, 여성의 가임력을 높이는 등 효험을 위한 공식적인 약으로 사용했다. 또한 성스러운 허브로 여겨 악령을 쫓아내거나 종교의식에 쓰기도 했다. 그리스의 약물학자 디오스코리데스는 세이지 잎과 줄기를 달여먹으면 이뇨, 상처 치유, 지혈, 기침에 좋고, 특히 백포도주와 함께 곁들이면 이질에 좋다 했다.
약효로 유명한 두 번째 세이지는 잎이 세 갈래로 갈라지는 샐비어 프루티코사(Salvia fruticosa)다. 지중해 동부 원산으로 그릭 세이지(Greek sage) 혹은 지중해 세이지라고 불리는데, 기원전 1400년 전 크레타섬 크노소스 궁전의 프레스코 벽화에 등장할 정도로 역사가 아주 깊다.
중세 시대에도 세이지 종류는 꾸준히 위대한 약초의 명성을 유지했다.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대제(768∼814)는 통치 말년에 발표한 제국 영지 관리에 관한 법령집(Capitulare de villis)을 통해 100종에 가까운 약초와 채소, 유실수를 식재하도록 명했는데 여기에 세이지가 포함되었다. 베네딕트회 수도사이자 저술가였던 발라프리드 스트라보(Walahfrid Strabo, 808∼849)는 정원 재배식물의 치유력을 ‘호르툴루스(Hortulus)’라는 시를 통해 설파하기도 했다. 여기서 그는 세이지를 가장 중요한 첫 번째 허브로 소개하며 기분 좋은 향기와 함께 인간의 여러 질병에 유용하다고 묘사했다.
9세기 설립된 세계 최초 의과대학 이탈리아 살레르노 의학교에서 1480년 발표한 건강 요법(Regimen Sanitatis Salernitanum)에서 세이지는 구세주이자 자연의 조정자로 등장한다. 정원에서 세이지를 기르고 있는데 왜 인간이 죽어야 하느냐는 물음과 함께 세이지 예찬이 이어진다. 비록 죽음에 대항할 약은 없지만 세이지는 신경을 안정시키고 손떨림증을 낫게 해주고 열을 치료해 준다는 것이다. 프랑스에선 차로 마시기 위해 세이지를 생산했는데, 1파운드의 세이지 차가 4파운드의 중국 차와 맞바꿀 만큼 인기였다.
14세기 중세 유럽에 흑사병이 창궐한 시기에 만들어졌다는 ‘네 도둑의 식초(Four Thieves Vinegar)’ 이야기도 유명하다. 백포도주 식초에 향쑥, 오레가노, 세이지 등 허브를 넣고, 정향, 장뇌와 함께 15일 동안 재어 둔 후 걸러낸 액체를 손과 귀, 관자놀이에 문지르면 역병에 걸리지 않는다는 전설의 식초였다. 네 도둑의 정체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는데 당시 죽거나 아픈 사람들로부터 강도질을 일삼았던 네 도둑이 어떻게 전염병에 걸리지 않을 수 있었는지 밝혀내는 과정에서 알려지게 된 비법 레시피라는 이야기도 있다. 그만큼 세이지의 항균 효과가 뛰어남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현대판은 사과식초에 네 가지 허브 종류인 세이지, 라벤더, 로즈메리, 백리향, 그리고 말린 후추 열매를 넣어 만든다.
세이지는 14세기와 15세기 무렵부터 요리에도 많이 쓰였다. 신선한 세이지 잎은 소화를 돕기 때문에 주로 고기와 함께 즐기는 향신료로 사용했다. 소고기에 세이지 잎을 곁들인 이탈리아 요리 ‘살팀보카’가 유명하다. 1393년 출간된 중세 프랑스 여성을 위한 안내서에도 세이지를 이용한 수프와 소스 등이 소개되기도 했다. 16세기 후반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이끌던 튜더 시대 영국에서도 요리용 허브로 세이지가 많이 언급되었다. 이러한 전통을 이어 영국과 미국에서는 오늘날에도 추수감사절에 칠면조나 닭고기에 세이지를 넣어 먹는다.
세이지는 중세 후기 국제적 교역이 이루어졌던 영국 요크셔 지방 해안마을 스카보로 시장을 배경으로 한 전통 민요에도 등장한다. 사이먼 앤드 가펑클이 새롭게 편곡하여 불러 전 세계에 널리 알려진 ‘스카보로 페어’라는 노래에서 세이지는 파슬리, 로즈메리, 타임(백리향)과 함께 후렴구에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여기서 세이지는 수천 년 세월에도 변치 않는 것을 상징한다.
근대로 접어들면서 세이지의 종류와 쓰임새에 대한 기록도 점점 더 구체화 되었다. 외과 의사이자 약초학자였던 영국의 존 제라드가 1597년 출간한 ‘약초 의학서(Herball)’에는 일반 세이지와 그릭 세이지를 비롯하여 9가지 종류의 세이지가 소개되었다. 그는 이 책에서 세이지가 특히 뇌에 좋아 기억력을 좋게 하고, 정력을 강화하며, 중풍을 낫게 해준다고 기록했다. 독일의 의사이자 신학자였던 크리스티안 프란츠 파울리니(Christian Franz Paullini)는 1688년 세이지에 관한 414쪽 분량의 책을 펴내기도 했다.
18세기 후반부터는 관상용 세이지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주로 라틴 아메리카로부터 새로운 식물들을 유럽으로 들여온 식물 사냥꾼들에 의해서였다. 대표적인 관상용 세이지로 멕시코 원산의 청세이지(S. farinacea)가 있다. 청자색 꽃에 윤기 나는 잎을 가져 지중해 원산의 세이지와 다르다. 여름 정원용 초화류로 널리 쓰이는 ‘빅토리아 블루’도 이 종으로부터 개발된 품종이다. 역시 멕시코 남서부 고산지대가 원산으로 1m가 넘는 긴 꽃대를 가진 샐비어 론기스피카타(S. longispicata)와 청세이지의 교잡을 통해 ‘인디고 스파이어(Indigo Spire)’라는 유명한 품종이 탄생하기도 했다. ‘사루비아’로 불려왔던 브라질 원산의 샐비어 스플렌덴스(Salvia splendens)는 우리나라에서 ‘깨꽃’이라는 이름의 익숙한 꽃이 된 지 오래다. 원래 1810년대 중반 브라질에서 스칼릿 세이지(scarlet sage)로 불리며 관상용으로 이용되던 것이 유럽 전역으로 퍼졌고, 보라, 분홍, 파랑, 하양, 라벤더, 복색 등 새로운 품종으로도 많이 개발되었다.
오늘날 샐비어는 텃밭이나 허브 정원뿐 아니라, 도시 정원이든 시골 정원이든, 일년초 화단이든, 숙근초 보더든 전 세계 여러 정원에서 빼놓을 수 없는 소재다. 살짝 곁을 스쳐 지나가기만 해도 상큼한 향을 풍기고 늦봄부터 서리가 내릴 때까지 많은 꽃을 피워 오감을 즐겁게 해줄뿐더러, 벌과 나비 등 여러 꽃가루 매개 곤충들에게 귀중한 꽃꿀을 내어 준다.
그리스, 로마 시대부터 약초로 사랑받았던 세이지(S. officinalis)는 삼색 무늬 잎을 가진 ‘트리컬러(Tricolor)’, 보라색 잎을 가진 ‘푸르푸라스켄스(Purpurascens)’, 노란색 무늬 잎의 ‘이크테리나(Icterina)’ 같은 품종으로 새롭게 탄생하여 정원을 빛내고 있다. 물론 세이지의 약효도 여전히 중요하게 쓰이고 있다. 살비제닌(salvigenin) 같은 플라보노이드 성분과 함께 강력한 항산화, 항염증, 항균 효과가 있어, 기침과 감기, 갱년기 여성의 상열감, 잇몸 질환에 좋을 뿐 아니라 강장 작용, 콜레스테롤 감소 등에 도움이 된다. 수천 년간 불멸과 지혜의 상징으로 인간의 곁에 살아온 샐비어는 혼돈의 시대를 살고 있는 지금 우리에게도 깊은 위로와 놀라운 치유의 선물을 주고 있다.
국립세종수목원 전시기획운영실장
■ 세이지(Salvia officinalis)
꿀풀과의 여러해살이 관목으로 내한성이 강하다. 지중해 북부 해안 지역이 원산으로 고대부터 중요한 약초로 사용되었다. 40∼60㎝까지 자라며 회녹색의 잎에서 특유의 향을 발산한다. 초여름에 피는 푸른빛이 도는 라벤더 색깔의 꽃은 입술 모양이며 벌과 나비, 벌새가 좋아한다. 배수가 잘되는 토양과 양지바른 곳을 좋아하고 과습한 곳에서는 잘 자라지 못한다. 씨앗을 뿌리거나 꺾꽂이로 번식하며 봄에 잎을 따 주면 새로운 잎이 더 많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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