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보적 웹툰 : 나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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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을 그리는 작가, 나몬
만화 <정년이>를 그리기로 결심한 순간은 언제였나요?
서사 있는 작업물을 좋아했어요. 영화나 드라마처럼요. 언젠가는 서사 있는 작품을 그려보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을 하던 차에 제가 그린 일러스트를 보고 웹툰 플랫폼에서 연락이 왔고, 이걸 계기로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했죠.
역할의 성격을 부각시키기 위해 작화에 어떤 차별을 주었나요?
무대 장면에서 정년이는 정년 자신이면서도 연기하고 있는 배역으로도 보여야 했거든요. 평소 자주 보이는 익살스러운 표정과 그냥 씩 웃는 표정 외에 어딘가 호소하는 듯한 표정이라든지, 배역에 몰입한 표정을 그려야 하는 부분이 어려웠어요. 어려울 땐 실제 배우들이 감정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안면 근육을 관찰했어요. 그 장면을 기억했다가 필요할 때 곧바로 적용했죠. 그리면서도 지속적으로 확인했어요. ‘이 그림이 그 감정처럼 보이나’라고 계속 자문했죠.
작가님은 선화 위주로 작업하는데, 선화여서 더 잘 보여줄 수 있는 부분도 존재하나요?
요즘은 볼륨감 있고 일러스트 같은 퀄리티의 만화가 많이 등장하지만, 단순한 작화의 매력은 여전히 존재한다고 생각해요. 작화가 단순하면 가독성이 좋고, 대사와 그림을 균형 있게 보여줄 수 있죠. 작화가의 해석이 오직 선에 녹아들어 있죠. 선에 강약을 줘서 캐릭터의 감정을 표현하는 게 매력적이고요. 저는 형태를 예쁘게 그리는 것에 집착하는 면이 있어요. 그래서 선화에 더 집중했던 것 같아요.
작가들마다 자기만의 강박을 안고 살아가더라고요.
그렇죠. 자기도 모르는 습관이 있는 분도 있어요. 저는 정리하는 버릇이 있어요. 선이 지저분하게 삐져나온 걸 못 봐요. 살짝 어긋나거나 흐트러지면 러프한 매력이 살아나고, 개인적으로도 그런 그림을 좋아해요. 근데 제 작화에선 허용 못하는 부분이죠. 이건 제가 앞으로 개선해 나가야 할 부분이에요. 이러한 강박이 제 작화를 딱딱하게 만드는 것 같기도 하고 러프한 매력을 구사하지 못하죠.
<정년이>의 시대적 배경이 1950년대고, 경험하지 못한 시대를 그리는 건 난이도 높은 작업이었을 것 같네요.
참고자료가 많이 필요했어요. 웹 서핑은 기본이고, 1950년대 사진가인 한영수 작가님이 포착한 서울 사진들을 참고했어요. 그리고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서 과거 신문들을 모두 볼 수 있거든요. 당시 여성 국극을 다룬 기사들을 스크랩했죠. 이레 작가님과 함께 여성 국극 다큐멘터리를 만든 PD님을 인터뷰했고, 미디어 아티스트 정은영 작가님의 여성 국극 프로젝트 전시도 감상했었어요. 자료를 모으는 과정에서 1950년대에 흥행한 여성 국극은 중요한 기사 소재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발견했죠. 정말 없어요. 잊힌 장르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이 너무 아쉬웠죠. 계속해서 명맥이 이어져서 지금까지도 여성 국극 공연을 한다면 더 많은 자료를 모을 수 있을 텐데요.
1950년대 풍경에 대한 자료가 부족한 만큼, 그 시대를 상징하는 사물에 초점을 두었나요?
그렇죠. 풍경은 당시 사진을 캡처해서 3D 프로그램으로 구현할 수 있었어요. 시대적 상징은 의복으로 표현했고요. 한복에도 유행이 있어서, 1905년대에는 저고리가 짧았죠. 서양 문물이 흡수돼서 브로치가 옷고름을 대신했어요. 시스루 한복도 있었고요. 그런 식으로 다양한 포인트를 작화에 녹여냈어요.
나몬 작가님은 여성 서사에 대해 갈증을 많이 느낀 것으로 보여요. 작가님의 여성 중심 일러스트만 보아도요.
제가 접해왔고 알고 있는 여성은 아주 다양하고, 일반적인 서사에 드러나지 않는 면모를 많이 갖추고 있거든요. 하지만 대부분의 영화나 공연은 단편적인 여성의 모습만 다루더라고요. 단편적인 여성의 모습을 주로 이끌어나가는 현상도 특정 장르에만 편향된 경우가 있고요. <정년이>에서는 내가 겪고 사랑했던 여성들을 다양하게 그릴 수 있다는 점이 좋았어요. 제가 그린 일러스트에도 여성이 자주 등장합니다. 작가마다 그리기 좋아하는 대상이 있기 마련이죠. 저는 여성을 그리는 걸 좋아하고, 여성의 이미지는 연출할 수 있는 방향이 다양하다고 생각했어요. 여성은 보편적인 아름다움을 제외해도 피사체로서 가장 흥미로운 대상 중 하나죠.
<정년이>에 등장하는 캐릭터의 모습에서 여성을 다양한 시각으로 바라보는 나몬 작가님의 취향이 묻어나요. 마냥 샤랄라한 작화만 존재하지 않죠.
보편적인 여성성에서 벗어난 캐릭터가 많아요. 무엇보다 남자를 연기하는 여자들이잖아요. 그 점이 완전히 다른 포인트죠. 그래서 톰보이 스타일의 여성을 그려낼 수 있었어요. 우리가 알고 있는 여성은 길고 진한 속눈썹, 긴 머리 등을 갖고 있죠. 이런 클리셰를 담은 여성의 모습도 등장하지만, 톰보이 여성과 함께 어우러지니까 작화가 더 풍성해 보이죠.
서사와 작화를 모두 구상하는 작가와 달리 나몬 작가님은 이레 작가님과 협업해나가죠. 한 회는 어떤 과정으로 완성되나요?
이레 작가님이 대본을 주면, 대본의 지문과 대사를 바탕으로 콘티 작업을 하는 데 하루 정도 소요돼요. 그런 다음 프레임 안에 배경 먼저 배치한 후 스케치를 시작하죠. 3일 정도 스케치가 이어지면, 그 스케치를 깔끔하게 만드는 과정이 이틀 소요되고요. 마지막으로 채색 작업이 이어져요. 채색이 오래 걸려요. 다행히 <정년이> 작화엔 명암이 거의 없어요. 명암 그리는 데 오랜 시간이 요구되거든요.
명암이 필요한 장면도 존재했을 텐데요.
맞아요. 빛과 음영이 주는 힘이 있으니까요. 스펙트럼이 강한 음영을 주고 싶은 장면이 분명 존재했죠. 하지만 다른 장면과의 조화를 고려했고, 최대한 절제해서 쓰자는 생각을 했어요. 아쉽지만 시간 관계상, 전체적인 아트워크상 그냥 넘어가야 하는 장면도 있었죠.
작화를 담당하지만, 스토리에는 얼마나 관여하나요?
인물의 행동 의도와 캐릭터의 배경에 대한 제 의견을 이레 작가님께 드렸죠. 함께 즐겁게 작업할 수 있는 작품이길 바랐고, 납득할 수 있는 이야기를 그리는 게 제겐 꽤 중요하거든요.
가장 그리기 어려웠던 감정 신이 있을까요?
힘들었던 장면은 초반에 등장한 ‘춘향전’ 신이에요. 연재 초반이기도 했고 작화에서 서툰 부분이 많이 발견됐죠. 그리고 마지막에 ‘쌍탑전설’ 무대도 어려웠어요. 쌍탑전설 무대에서 정년이와 영서가 같은 장면을 연기해요. 한 장면을 놓고 영서는 예술혼으로 슬픔을 승화하고, 정년이는 미쳐버린 사람처럼 연기하죠. 같은 텍스트를 캐릭터의 연기에 맞춰 다르게 그려야 한다는 것 때문에 어려웠어요. 어떤 방식으로 각자의 연기를 잘 표현할 수 있을까 고민했죠. <정년이>에서 다뤄야 했던 감정 중에서 가장 난이도 높았는데 많은 독자분들이 몰입해서 봐주셔서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박재범의 ‘Bite’ 뮤직비디오에서 선보인 일러스트가 화제였죠. 더군다나 아이패드로 작업한 그림이라 더욱이요.
기획 단계에서 제시한 방향은 ‘미쳐 있는 듯한 분위기’였어요. 당시 <정년이> 위주의 그림만 그리던 때였는데 제가 그려보지 않은 작화를 선보여야 했죠. 힙합 문화와 뽕 맞은 듯한 느낌과 관련된 이미지들을 수집해야 했어요. 상상이 필요하고 세상에 없는 걸 만들어내는 건 어렵다고 생각했거든요. 그게 아니더라고요. 3년 동안 <정년이> 아트워크에만 집중하다 완전 다른 작화를 그리니까 해방감이 들었고, 사고가 전환된다고 느꼈죠. 추상적으로 표현해도 괜찮구나, 한번 해보니 또 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앞으로도 과감한 화풍에 도전해보고 싶어졌죠.
일러스트를 그릴 때와 만화를 그릴 때 작화에서 차이를 느끼나요?
일러스트는 한 장으로 설명해야 해서 여러 요소를 집어넣게 돼요. 한눈에 봤을 때도 특정한 분위기를 자아내야 하니까요. 반면 만화는 계속 흐르듯이 읽는 거잖아요. 그래서 동작의 연결성과 대사와 행동의 연관성, 감정, 상황을 많이 생각하며 그렸어요.
인물의 감정에 몰입해야 하는 작가 입장에서, 그림 그리는 AI의 등장에 대한 생각이 궁금하네요.
시대의 흐름은 막을 수 없는 거잖아요. 하지만 그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데 관련 법안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림 업계의 미래를 비관하시는 분들을 봤어요. 저는 그들에 동의하진 않아요. 미래가 어떻게 변화할지는 모르지만, 이미지를 만드는 사람들이 사라지진 않을 것 같아요. 결정에 대한 문제 때문인데, 기획이나 시안이 있다면 그걸 선택하는 것은 결국 인간의 몫이죠. 어떤 방식으로 가공할지도 인간이 결정하는 부분이고요. 그래서 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방향은 AI와 인간의 협업이에요. 의료계도 AI가 처방하지만 환자를 진단하는 건 결국 의사거든요. 이미지 업계도 AI가 보조해주는 방식으로 이어진다면 괜찮지 않을까요? 흐름을 막을 수 없다면 그에 잘 맞춰 가능한 방향을 모색해야겠죠.
작화 담당 AI와 협업한다면 가장 요구하고 싶은 툴은 뭔가요?
빛을 샥 그리면 명암이 자동으로 구현되는 툴이죠. 하지만 부피감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아주 어려운 작업이라 제가 원하는 대로 그려질지 모르겠네요. 예를 들어 인물 근육의 다양한 움직임과 형태를 모른다면 그려낼 수 없을 거예요. 그리고 그림체마다 특징이 다르고, 이에 대한 파악이 완료되어도 정확하게 출력되기 어렵겠죠. 시간이 지나면 당연히 완벽하게 보완되긴 할 테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미지 제작자가 사라지진 않을 거예요.
Editor : 정소진 | Photography : 안승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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