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차탈선'도 못 막아... '백발의 디바'표 효도상품권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 '이별' '서울찬가' 등 불러
지난달 미국서 귀국해 합주 반복하며 10년 잠든 목소리 깨워
김고은 등 Z세대가 소환한 그의 음악에 응답
9년 만에 돌아온 '가을의 연인'
7일 서울 여의도 KBS 신관 공개홀. 어둠이 내린 무대 중앙으로 흰 막 너머 핀 조명이 떨어지자 객석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꽁꽁 얼어붙었다. 잔뜩 긴장한 채 숨죽이며 무대를 바라보던 관객들은 막이 올라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함성을 쏟아냈다. 무대의 주인공은 K팝 아이돌그룹이 아닌 백발의 패티김(84·본명 김혜자).
"사랑할수록 깊어가는 슬픔에 눈물은 향기로운 꿈이었나". 그는 나직하고 처연한 목소리로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을 부르기 시작했다. 2013년 10월 26일 은퇴 마지막 공연 후 9년 만의 첫 무대다. 1983년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을 발표한 뒤 '가을의 연인'이라 불렸던 패티김은 황갈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절정에 오른 가을을 품은 낙엽을 떠올리게 하는 의상을 입은 그는 무대를 석양처럼 은은하면서도 열정적으로 꾸렸다.
"60년 전 데뷔할 때만큼 설레고 행복"
귀환한 '은빛 디바'의 카리스마는 여전했다. "아, 그대 곁에 잠들고 싶어라, 날개를 접은 철새처럼~" 그 유명한 후렴에 이르자 패티김은 양팔을 새의 날개처럼 들어 올린 뒤 열창했다. 팔순을 훌쩍 넘은 가수의 고음은 예상 외로 단단했다. 박수가 쏟아지자 패티김은 양손을 가슴에 모은 뒤 객석을 지그시 바라봤다. "감사합니다 여러분,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여러분 많이 보고 싶었고". 패티김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다시 입을 뗀 그는 "무대가 그리웠고 노래가 부르고 싶었다"며 "오랜만에 다시 무대에 서니 60년 전 데뷔했을 때만큼 설레고 떨리고 흥분되고 행복하다"고 말했다. 패티김의 목소리는 잠겼고 젖어 있었다. 관객에게 인사하던 그는 왼손으로 왼쪽 눈가에 맺힌 눈물을 훔쳤다.
"범세계적 음악" MZ세대의 재조명
패티김이 돌아왔다. 옛 명곡을 조명하는 KBS2 '불후의 명곡'이 깜짝 복귀의 무대다. 국내 스탠더드 팝의 선구자였던 패티김의 음악은 그의 은퇴 후에도 꾸준히 재발견됐다. 영화 '기생충' 음악감독이자 작곡가인 정재일을 비롯해 배우 김고은, 가수 박기영, 요조, 러블리즈 케이 등은 패티김의 노래를 잇따라 다시 편곡하고 불렀다. "베르터 토마스 미푸네란 독일 첼리스트가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을 리메이크한 적이 있는데 알고 보니 한국 노래였고 그 유명한 패티김의 곡이었다. 한국 노래를 모르는 사람이 들어도 아름답다고 느낄 정도로 범세계적인 음악"(정재일·40)이라거나 "가사가 너무 아름답다"(김고은·31)는 게 MZ세대가 패티김의 음악에 새삼 푹 빠진 이유였다. 세대를 뛰어넘어 곳곳에서 패티김의 음악이 소환되자 '불후의 명곡' 제작진은 그를 다시 무대로 초대했다. 신수정 '불후의 명곡' PD는 "자유곡 경연 때 가수들에게 공연하고 싶은 곡을 받는데 번번이 패티김의 노래가 선곡 리스트에 올라왔다"며 "후배 음악인들, 그리고 명곡을 재해석하는 이 무대가 패티김의 음악을 먹고 자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선생님 은퇴 발표(2012) 10년에 맞춰 섭외했다"고 말했다. 제작진과 패티김 지인들의 말을 종합하면, 은퇴 후 미국에서 지내던 패티김은 이 무대를 위해 지난달 중순 귀국했다. 돌아오자마자 그는 발성에 매달렸다. 오래 잠들어 있던 목소리를 깨우는 게 숙제였다. 노가수는 숙소에서 틈날 때마다 노래를 부르고 합주 공연을 반복했다. 그렇게 무대를 준비한 패티김은 '9월의 노래'와 '이별' 등을 흔들림 없이 불렀다.
이 무대에서 옥주현('사랑은 생명의 꽃'), 황치열'(못잊어'), 빅마마 멤버 박민혜('초우'), 김기태('이별'), 포레스텔라('사랑의 맹세'), 이병찬('가시나무 새') 등은 패티김의 히트곡을 편곡해 다시 불렀다. 후배들의 무대를 보며 패티김은 1958년 미 8군 공연 오디션에서 연습생 신분으로 데뷔한 과정과 그의 영원한 음악적 동지이자 전 남편인 작곡가 고 길옥윤과의 추억을 들려줬다. "미국에서 음악 공부를 하던 길옥윤씨가 전화로 곡을 썼다고 들어보라는 거예요. 원제가 '어쩌다 생각이 나겠지'였는데 곡목이 마음에 안 들더군요. 제가 '이별'이 어떠냐고 제안해서 곡명을 바꿨는데 그 뒤 이혼을 하게 됐죠."
석양처럼 여운 남기고 美로 떠난 'K팝 원조 디바'
패티김은 후배들과 '서울의 찬가'를 부르며 10시간여 동안 진행된 녹화를 마쳤다. 패티김의 깜짝 무대에 이선희도 공연장으로 한걸음에 달려왔다. 이 무대에서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을 편곡해 부른 박기영은 본보와 통화에서 "패티김은 삶의 희로애락을 음악적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킨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음악인"이라며 "그 무대와 음악에 대한 진심을 꼭 닮고 싶다"고 말했다. 이날 공연 관람 티켓 예매 경쟁률은 18대 1. 자식들에게 이 표는 '효도 상품권'이었다. 충남 천안에서 온 변영호(37)씨는 "전날 영등포역 탈선 사고로 열차가 한 시간 반 지연돼 공연 시간에 맞춰 간신히 도착했다"며 "어머니가 패티김을 좋아해 관람 신청을 했고 직장에 연차를 내 어머니 모시고 왔다"고 말했다. "천지를 붉은빛으로 아름답게 물들이는 석양처럼 영원히 기억에 남고 싶다"(KBS '두드림쇼')는 패티김은 이 무대를 마친 뒤 10일 미국으로 떠났다. 패티김의 '불후의 명곡' 일정을 도운 최측근은 "추후 공연 및 활동 계획은 없다"고 했다. 26일 첫 방송.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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