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 가만히 아이들 이름 불러본다

기자 2022. 11. 14.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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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던 11월12일(토), 경남 창원 합포여중 교사 세 분이 학생 스무명을 데리고 ‘문학기행’을 오기로 한 날이다. 아내와 나는 이른 아침부터 손님맞이 준비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산골 마을에 뿌리 내린 지 17년이 지났지만 우리 마을엔 학생이 한 명도 없다. 다른 마을도 거의 마찬가지다. 지구촌 돌림병(코로나19)으로 오고 싶어도 오지 못하던 도시 학생들과 교사들이 올해부터 가끔씩 찾아오고 있다. 얼마나 기쁘고 반가운 일인가.

서정홍 농부 시인

어느덧 오전 9시40분이다. 반가운 손님맞이하느라 지나가던 바람도 잠시 멈추고, 마을 텃새들이 노래를 부르고, 개가 짖고 소가 울어댔다. 드디어 참나무 아래 넓은 쉼터에 버스가 섰다. 학생들이 하나둘 내렸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 난 뒤, 한 줄로 서서 광목천으로 눈을 가리고 앞사람 어깨를 두 손으로 살며시 잡고 걸었다. 고달프고 바쁜 일상을 내려놓고 잠시 자연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어보는 시간이다. 개울을 지나 오르막과 내리막을 지나 가을걷이 끝난 다랑논으로 가서 논둑에 한 줄로 앉았다. 그리고 광목천을 자기 손으로 천천히 풀고, 다랑논 한쪽에 짚으로 무대를 만들고, 한 사람씩 그 무대에 서서 느낌과 깨달음을 나누었다.

흐르는 물소리와 새소리가 너무 맑고 좋았다는 아이, 햇볕이 이렇게 따뜻한 줄 몰랐다는 아이, 태어나서 논에 처음 들어와 봤는데 어쩐지 몸과 마음이 편안하고 느낌이 부드럽다는 아이도 있었다. “눈만 뜨면 시끄러운 자동차 소리가 들리고 콘크리트 건물이 가슴을 답답하게 했어요. 오늘, 산골에 와서 친구들과 다랑논을 함께 밟아보고 탁 트인 자연 속에 있으니까 여유가 생기는 것 같아요.” 떨리는 목소리로 울먹이면서 말하는 세은이를 바라보면서 함께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어릴 때부터 공부와 경쟁에 지친 아이들이 잠시라도 자연의 품에 안겨 낮은 언덕을 뛰어다니며 감을 따고, 혼자 개울에 앉아 말없이 흐르는 물을 바라보기도 하고, 슬며시 내 곁에 다가와 구절초 한 송이 주고 가기도 하고, 안경 닦으라며 내 손에 작은 수건은 쥐여주기도 하고, “봄날샘, 내일 다시 와도 되지요?” 말하고는 얼굴을 붉히기도 하고, “봄날샘, 제 손 한 번만 잡아주세요? 요즘 골치 아픈 일이 너무 많아서요. 농사짓는 손이 생명을 살리는 손이라 했잖아요. 그 손으로 제 손을 잡아주면 힘이 날 것 같아요” 하고는 손을 내밀기도 했다. 아이들을 돌려보내고 산길을 걸으며 가만히 이름을 불러보았다.

샛별, 혜람, 예빈, 수정, 예은, 예림, 소윤, 보미, 나영, 나영,(학년도 같고 반도 같고 이름도 같은 김나영이는 반 친구들이 생일을 기준으로 봄에 태어난 나영이는 ‘봄나영’, 가을에 태어난 나영이는 ‘가을나영’이라 부르기도 한단다.) 서영, 가현, 서진, 세은, 지현, 수민, 보미, 호정, 정화, 시은이 그리고 아이들이 다칠세라 낮은 돌층계 하나하나 내려올 때도 두 손을 꼭 잡아주고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강은주 선생님, 강은숙 선생님, 김영경 선생님, 프로그램 진행을 도와주고 시낭송까지 해준 버스 기사님 얼굴도 떠올려보았다. 해맑은 아이들 덕일까? 몇 달 만에 비가 내린다. 바짝바짝 말라가던 마늘과 양파와 김장배추와 무가 얼씨구, 좋다! 춤을 춘다.

서정홍 농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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