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균 칼럼]참사를 수단으로 삼지 않는 예의
박제균 논설주간 2022. 11. 14. 03:03
사람 간 거리 존중 않는 무례한 사회
굶주림, 수단 삼으려 모금 막은 레닌
추모=수단, 목적=퇴진 “퇴진이 추모다”
굶주림, 수단 삼으려 모금 막은 레닌
추모=수단, 목적=퇴진 “퇴진이 추모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거리가 있다. 아니, 있어야 한다. 파리 특파원 시절, 두 사람이 겨우 지나칠 수 있는 좁은 골목이나 복도에서 누군가와 마주쳤을 때. 한국 같으면 그냥 지나쳤겠지만, 그들은 달랐다. 옆으로 비켜서서 먼저 지나가라고 했다.
그런 배려가 처음에는 오히려 어색하게 느껴졌다. 어깨 스치는 것쯤은 다반사인 밀집사회에서 살았던 터에. 그 배려가 고대부터 전란이 잦았던 서구 사회에서 자기 보호를 위한 거리 두기에서 유래했다는 해석도 있다. 어쨌거나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게 훨씬 편안하다는 걸 몸으로 알게 됐고, 나 또한 그들을 위해 길을 비켜줬다. 물론 이런 서구식 매너는 밀집과 속도의 한국으로 돌아온 뒤 금방 잊었지만.
아직 꽃피우지도 못한 젊은이들의 이른 희생과 아닌 밤중에 참척의 슬픔을 당한 분들께 드릴 말씀이 없다. 참사 수습과 위로, 규명과 문책의 시간을 갖되 어쩌면 그런 참사를 막을 수도 있었을 그 무엇에 대해 생각한다. 그 무엇이 바로 사회의 기본이다. 무엇보다 많은 사람을 한꺼번에 때려 넣어도 괜찮은 우리 사회의 문화. 이젠 바꿀 때 됐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를 존중해야 한다. 그것이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이기 때문이다.
버스나 택시, 엘리베이터 같은 밀폐공간에서 알고 싶지 않은 자기 집안 대소사까지 들려주는 통화 매너부터 듣고 싶지 않은 이념 방송을 크게 틀어놓는 공중 매너, 만나자마자 상대의 학력과 재력은 물론이고 자식들 근황까지 파악해야 직성이 풀리는 대화 매너까지…. 사람과 사람의 거리를 존중하지 않는, 무례가 범람하는 사회다.
시위 한답시고 직장도 아니고 집 앞까지 몰려가 이웃 주민까지 괴롭히고, 공인(公人)도 아닌 사인(私人)의 SNS를 터는 것도 모자라 가족까지 털어 인격살인을 자행하며, 떼로 달려들어 댓글 폭탄을 퍼붓는 작태는 사람이 사람에게 지켜야 할 거리를 넘어서는 짓이다.
무엇보다 사회적 참사와 개인의 불행을 어떤 목적을 달성하는 수단으로 삼는 건 인간에 대한 예의의 문제다. 공동으로 장례를 치르든, 추모공간을 만들든 유족들이 자발적으로 하겠다면 도와줘야 할 것이다. 그런데 더불어민주당과 이재명 대표가 먼저 나서 참사 희생자의 얼굴과 이름 공개를 요구하고 있다. 지나치지 않나.
주말마다 “퇴진이 추모다”를 외치는 사람들. “대장동 몸통은 윤석열”이라는 말만큼이나 밑도 끝도 없는 이 구호에는 무엇이 목적이고, 무엇이 수단인지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추모는 수단이고, 퇴진이 목적이다. 정작 추모는 없고, 퇴진만 있는 냉혹한 프로파간다가 아닐 수 없다.
러시아에서 공산주의 혁명을 성공시킨 블라디미르 레닌. 그는 22세 때 기근으로 죽어가는 농민을 도우려고 모금을 하는 친구를 설득해 그만두게 했다. ‘굶주림이 진보적인 역할을 수행해 농민들이 자본주의 사회의 근본적인 현실에 대해 숙고하게 만들어 줄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역사학자이자 저널리스트인 폴 존슨은 저서 ‘모던 타임스’에서 “레닌 자신은 실존하는 인간에게 사랑을 나타낸 적이 거의 없었고 관심조차 없었다”고 평가했다. 레닌에게 기근으로 죽어가는 농민에 대한 연민은 없었다. 그들의 굶주림은 혁명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이런 레닌의 악령이 아직도 한반도의 하늘을 배회하고 있다. 목적 달성을 위해서라면 무슨 수단을 쓰든 합리화하는 세력들. 그 수단이 설혹 남의 불행이나 국가적 참사라 할지라도. 더 비관적인 건 목적이 수단을 합리화하는 데 이골이 난 문재인 정권에 점염(點染)된 많은 국민이 이를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는 풍토다.
다시 프랑스로 돌아가 보자. 2003년 유럽에 섭씨 40도를 오르내리는 대폭염이 닥쳤다. 프랑스에서만 1만여 명의 노인이 죽었다. 피해자는 거의 다 도시가 텅 비는 바캉스 시즌에 홀로 남겨진 노인들이었다. 한국 같으면 정권이 무너질 수도 있었겠으나, 프랑스 정부는 1년이 지나서야 종합 대책을 발표했다.
거기에는 △사고 원인 규명 △문책의 범위와 처리 결과 △1년간 대폭 늘린 요양시설 개수 등 노인보호 시스템 개선 결과 △향후 대책 등이 망라돼 있었다. 참사가 일어나도 말만 앞세우며 호들갑 떨지 않고, 더욱이 참사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않으며, 시간이 지나도 가신 분과 남은 분을 기억하고 위로하며, 다시는 이 땅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추모의 길이 아닐까.
그런 배려가 처음에는 오히려 어색하게 느껴졌다. 어깨 스치는 것쯤은 다반사인 밀집사회에서 살았던 터에. 그 배려가 고대부터 전란이 잦았던 서구 사회에서 자기 보호를 위한 거리 두기에서 유래했다는 해석도 있다. 어쨌거나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게 훨씬 편안하다는 걸 몸으로 알게 됐고, 나 또한 그들을 위해 길을 비켜줬다. 물론 이런 서구식 매너는 밀집과 속도의 한국으로 돌아온 뒤 금방 잊었지만.
아직 꽃피우지도 못한 젊은이들의 이른 희생과 아닌 밤중에 참척의 슬픔을 당한 분들께 드릴 말씀이 없다. 참사 수습과 위로, 규명과 문책의 시간을 갖되 어쩌면 그런 참사를 막을 수도 있었을 그 무엇에 대해 생각한다. 그 무엇이 바로 사회의 기본이다. 무엇보다 많은 사람을 한꺼번에 때려 넣어도 괜찮은 우리 사회의 문화. 이젠 바꿀 때 됐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를 존중해야 한다. 그것이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이기 때문이다.
버스나 택시, 엘리베이터 같은 밀폐공간에서 알고 싶지 않은 자기 집안 대소사까지 들려주는 통화 매너부터 듣고 싶지 않은 이념 방송을 크게 틀어놓는 공중 매너, 만나자마자 상대의 학력과 재력은 물론이고 자식들 근황까지 파악해야 직성이 풀리는 대화 매너까지…. 사람과 사람의 거리를 존중하지 않는, 무례가 범람하는 사회다.
시위 한답시고 직장도 아니고 집 앞까지 몰려가 이웃 주민까지 괴롭히고, 공인(公人)도 아닌 사인(私人)의 SNS를 터는 것도 모자라 가족까지 털어 인격살인을 자행하며, 떼로 달려들어 댓글 폭탄을 퍼붓는 작태는 사람이 사람에게 지켜야 할 거리를 넘어서는 짓이다.
무엇보다 사회적 참사와 개인의 불행을 어떤 목적을 달성하는 수단으로 삼는 건 인간에 대한 예의의 문제다. 공동으로 장례를 치르든, 추모공간을 만들든 유족들이 자발적으로 하겠다면 도와줘야 할 것이다. 그런데 더불어민주당과 이재명 대표가 먼저 나서 참사 희생자의 얼굴과 이름 공개를 요구하고 있다. 지나치지 않나.
주말마다 “퇴진이 추모다”를 외치는 사람들. “대장동 몸통은 윤석열”이라는 말만큼이나 밑도 끝도 없는 이 구호에는 무엇이 목적이고, 무엇이 수단인지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추모는 수단이고, 퇴진이 목적이다. 정작 추모는 없고, 퇴진만 있는 냉혹한 프로파간다가 아닐 수 없다.
러시아에서 공산주의 혁명을 성공시킨 블라디미르 레닌. 그는 22세 때 기근으로 죽어가는 농민을 도우려고 모금을 하는 친구를 설득해 그만두게 했다. ‘굶주림이 진보적인 역할을 수행해 농민들이 자본주의 사회의 근본적인 현실에 대해 숙고하게 만들어 줄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역사학자이자 저널리스트인 폴 존슨은 저서 ‘모던 타임스’에서 “레닌 자신은 실존하는 인간에게 사랑을 나타낸 적이 거의 없었고 관심조차 없었다”고 평가했다. 레닌에게 기근으로 죽어가는 농민에 대한 연민은 없었다. 그들의 굶주림은 혁명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이런 레닌의 악령이 아직도 한반도의 하늘을 배회하고 있다. 목적 달성을 위해서라면 무슨 수단을 쓰든 합리화하는 세력들. 그 수단이 설혹 남의 불행이나 국가적 참사라 할지라도. 더 비관적인 건 목적이 수단을 합리화하는 데 이골이 난 문재인 정권에 점염(點染)된 많은 국민이 이를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는 풍토다.
다시 프랑스로 돌아가 보자. 2003년 유럽에 섭씨 40도를 오르내리는 대폭염이 닥쳤다. 프랑스에서만 1만여 명의 노인이 죽었다. 피해자는 거의 다 도시가 텅 비는 바캉스 시즌에 홀로 남겨진 노인들이었다. 한국 같으면 정권이 무너질 수도 있었겠으나, 프랑스 정부는 1년이 지나서야 종합 대책을 발표했다.
거기에는 △사고 원인 규명 △문책의 범위와 처리 결과 △1년간 대폭 늘린 요양시설 개수 등 노인보호 시스템 개선 결과 △향후 대책 등이 망라돼 있었다. 참사가 일어나도 말만 앞세우며 호들갑 떨지 않고, 더욱이 참사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않으며, 시간이 지나도 가신 분과 남은 분을 기억하고 위로하며, 다시는 이 땅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추모의 길이 아닐까.
박제균 논설주간 ph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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