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想과 세상] 복사꽃 아래 서면
복사꽃 아래 서면
문득 내가 비참해진다는 생각이 든다
어느 날은 그 자리에서 그대로 쓰러져
한 사나흘 푹 잠들고 싶어질 때가 있다
몽중에 누굴 호명할 일도 없겠지만
그래도 고단한 한 생을 만나
서로 꽃잎 먹여주며 몹시 취해서
또 한 사나흘 푹 잠들고 나면,
무언가 잃어버린 것 같고
무언가 잊어버린 것 같은
그래서 아슴한 저녁나절 밖으로 나올 때는
딴 세상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처럼
멍한 나를 발견했으면 한다
복사꽃 아래 새들 머문 적 없으니,
언제쯤 헛것에 끌려가지 않고
언제쯤 그물에 떨어지지 않고
아름다운 이 색계(色界),
무사히 걸어 나갈 수 있을까
박노식(1962~)
시인은 왜 “복사꽃 아래 서면” 초라해지기보다 비참해진다고 했을까. 참혹이나 참담, 처절과 비슷한 말인 비참은 몸서리쳐질 정도로 몹시 끔찍하다는 뜻이다. 진저리칠 만큼 무섭고, 놀랍고 싫은 감정이다. 어쩌면 시인은 복사꽃에서 호색과 음란의 도화살(桃花煞)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남녀 불문하고 도화살로, “아름다운 이 색계(色界)”에 빠져들면 패가망신을 피하기 어렵다. 한데 시방 곁엔 “누굴 호명할 일”도, “서로 꽃잎 먹여주며 몹시 취”할 사람도 없다.
혼자 사는 삶은 외롭고 쓸쓸하다. 부끄러움까지 드러낼 것 같은 햇빛 아래서나 화려한 복사꽃 그늘에 서면 고독의 향기는 더 짙어진다. “한 사나흘 푹” 자고 나도 비참한 기분은 나아지지 않는다. 꿈결에 무릉도원이라도 다녀오면 현실은 ‘한바탕 꿈’ 같다. 다른 세상을 사는 듯 멍하지만, 한때 “고단한 한 생을 만나” 서로에 취해 살기도 했다. 과거는 ‘헛것’이며, 그물에 걸린 새와 같다. “무언가 잃어버린 것 같고” 잊은 것 같지만 정신을 차리고 살아가야 한다.
김정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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