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태기의 사이언스토리] 우리가 먹는 속이 꽉찬 김장 배추, 우장춘의 ‘김치 혁명’ 덕분이었다
과거 김치는 소중한 식량이었다. 연구에 따르면 1970년대 우리나라는 1인당 하루 평균 무려 300~400g의 김치를 먹었다. 같은 시기 1인당 양곡 소비량이 하루에 450~520g(그중 쌀이 350g)이었으니, 김치는 쌀 못지않은 주식이었다. 2020년 쌀 소비량은 122g, 김치 소비량은 57g으로 줄었지만, 여전히 김치는 쌀, 우유에 이어 셋째로 많이 먹는 음식이다. 육류 소비가 늘어나며 먹거리가 다양화되기 전까지 김치가 어려운 시절을 버티게 해준 것이다.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은 우장춘의 김치 혁명 덕분이다.
1898년 9월, 서울의 일본 공사가 본국에 다급히 연락을 보낸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으로 일본에 망명했던 우범선이 한국으로 돌아와 몰래 잠입했다는 것. 당시 한국은 독립협회의 의회 요구와 만민공동회로 요동치고 있었다. 일본은 이들과 우범선이 연락하며 뭔가를 꾸미는 것을 포착한다. 하지만 미묘한 정세에 우범선이 다시 주목받으면 일본이 난처해질 수 있어 본국의 지휘를 요청한 것이고, 우범선을 설득해 일본으로 보낸다. 이때 일본에는 태어난 지 5개월 된 아들이 있었다. 그가 바로 우장춘이다. 우범선은 우장춘의 호적을 한국에 올려 놓는다.
우장춘이 다섯 살이던 1903년, 우범선은 암살된다. 한때 우장춘은 보육시설에 맡겨지며 어려운 시절을 보낸다. 그 사정을 알게 된 조선총독부의 주선으로 도쿄제국대학 부속 농학실과(일종의 전문학교)에 겨우 진학한다. 이때까지 우장춘은 그렇게 뛰어나지 않은 평범한 학생이었다. 우장춘이 유명해진 것은 1935년의 논문이다. 전혀 다른 종(種)인 배추와 양배추를 교배하면 제3의 종 유채(油菜)가 만들어짐을 보이며 다윈의 이론에 수정을 가하게 된다. 전문학교 출신인 우장춘은 이 논문으로 도쿄제국대학의 박사 학위를 받으며 단숨에 국제적인 명성을 얻는다. 그리고 한국에도 알려지기 시작했다. 우범선의 아들이라는 수식어도 따라붙었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자, 교토에서 대형 종자 회사의 연구농장장으로 일하던 우장춘은 사표를 내고 칩거했다. 한국행을 결심하고 있었다. 나라는 해방되었지만, 종자를 일본에 의존했던 한국 농업은 무너지기 일보직전 상황이 됐다. 한국은 우장춘이 절실했지만, 데려오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가족들의 반대도 심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남긴 호적으로 본적이 ‘서울’임을 증명하며 재일 조선인 수용소로 들어가 한국행을 준비했다. 남은 가족들의 생계에 보태라고 일본 고위 공무원 5년 치 연봉에 해당하는 100만엔을 한국 정부에서 보냈지만 이 돈을 한국에 가져갈 종자를 사고, 서적과 실험기구를 사는 데 다 써버렸다. 주위의 걱정에 “가족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버텨나갈 것입니다. 이 나라에 뼈를 묻을 것을 여러분에게 약속합니다”라고 했다. 빈말이 아니었다. 1950년 3월의 일이다.
3개월 뒤 한국전쟁이 일어났지만, 그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미친 듯이 종자 개발에 집중했다. 식량 해결을 위해서는 채소, 특히 김치의 주재료인 배추와 무 종자 확보가 우선이었다. 1950년 겨울, 딸의 결혼식으로 우장춘이 일본으로 향했다. 사람들은 그가 전쟁 중인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다시 돌아와서 연구에 매진했다. 종자밭 확보를 위해 1951년 제주를 방문했다. 제주가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되자, 대신 귤 재배를 추진했다. 대체지로 선택된 진도에 1952년부터 배추와 무 종자밭을 가꾸었다. 인민군이 물러간 강원도에는 감자를 키웠다. 그에게 전쟁은 핑곗거리조차 안 되었다.
1954년 드디어 무와 배추 종자가 생산되기 시작한다. 우장춘은 조선의 전통 배추, 중국에서 전래한 호배추, 일본에서 수입한 배추들이 모두 김치에 적당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의 육종 기술로 한국의 토양과 한국인의 입맛에 맞는 배추 품종을 만들어 낸 것이다. 우리가 먹는 속이 꽉찬 김장 배추는 그가 수많은 교배와 연구를 거쳐 만들어냈다. 고추 종자까지 개발했다. 하지만 세간의 불신은 상당했다. 이때 들고나온 것이 ‘씨 없는 수박 시식회’이다. 흔히 우장춘은 씨 없는 수박으로 알려졌지만, 이는 교토대학 기하라 히토시 교수의 업적이다. 단지 우장춘은 육종학의 위력을 시범으로 보인 것이다. 이런 노력 끝에 그의 종자들이 퍼지며 한국은 마침내 ‘씨앗 독립’에 성공한다.
우장춘이 교토에 남겨진 가족들과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1958년 4월. 이때 결혼을 준비하던 넷째 딸이 신랑감을 우장춘에게 소개한다. 그의 이름은 이나모리 가즈오(稲盛和夫). 평범한 회사원이었던 그는 12월 결혼했고, 이듬해 4월 교세라(Kyocera, 교토 세라믹)를 창업했다. 교세라를 세계적인 기업으로 키운 이나모리는 교세라 홈페이지에 우장춘과의 인연을 남겼다. 무일푼이던 시절 예비 장인을 만나 격려받고 힘을 냈다는 것이다. 그리고 교세라 홈페이지에 장인 우장춘을 ‘김치의 은인’이라 기록했다. 지난 8월 사망한 이나모리는 수원에 묻힌 우장춘의 묘를 생전에 여러 차례 방문했다.
1959년 우장춘은 한국에서 사망했다. 사망 사흘 전 훈장이 수여되었다. 병상의 우 박사는 “조국은 나를 인정했다”며 눈물을 흘렸다. 아버지 우범선의 묘는 일본에 있지만, 그의 묘지는 수원으로 정해졌다. 약속대로 한국에 뼈를 묻었다. 사랑하는 가족을 두고 한국에 왔을 때 전쟁이 벌어졌지만 후회하지 않았다. 왜 이토록 한국의 식량 문제 해결에 몰두했는지는 알 수 없다. 어떠한 정치적 이념이나 수사보다 과학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완성하는 길이라 믿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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