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에서] 사망선고 받은 ‘돈 풀기 이론’
올해 세계 경제가 고난을 겪는 이유는 한 마디 요약이 가능하다. 고물가를 경험한 기억이 오래된 나머지 인플레이션의 무서움을 간과하다 역습을 당했다. 코로나 사태를 맞아 풀어놓은 막대한 유동 자금이 다양한 물가 자극 변수와 맞물렸다. 8% 이상의 높은 물가 파도가 미국을 강타하자 방만한 저물가 시절 가려져 있던 ‘거짓말’이 드러났다.
이달초 워싱턴DC의 국제금융연구소(IIF)는 ‘현대화폐이론(MMT) 환상의 종말’이라는 보고서를 냈다. MMT란 정부는 파산하지 않기 때문에 재정 적자를 걱정하지 말고 돈을 찍어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데 써야 한다는 이론이다. 정부의 재정 여력은 무한대라는 주장이다. 좌파 색채가 강한 정치인·학자들의 눈길을 끌었다. 경제학계 이단으로 취급받던 MMT는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제법 길게 유지된 저물가·저금리를 자양분으로 삼았다. 돈을 많이 풀어도 경제 시스템에 별 무리가 없지 않으냐는 주장을 펼쳤다.
그러나 경제 여건은 돌고 돈다. IIF는 올해 급격히 고물가·고금리 시대로 전환되면서 나랏빚의 위험이 부각돼 재정 여력이 무한할 수 있다는 환상이 사라졌다고 진단했다. 특히, 일본이 재정 악화가 국채 금리 상승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억지로 초저금리를 유지하는 과정에서 기록적인 엔화 가치 폭락을 겪고 있다고 지적했다. 영국이 국채값 급락으로 혼쭐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로빈 브룩스 IIF 수석이코노미스트는 “정부 재정이란 희소하고 귀중한 자원”이라고 했다.
미치 대니얼스 퍼듀대 총장도 이달 초 워싱턴포스트 기고를 통해 “MMT는 나랏돈을 낭비하자는 이들만 빼고 모든 곳에서 틀렸다는 게 드러났다”고 쏘아붙였다. 중도 좌파 성향인 폴 크루그먼이나 래리 서머스 같은 경제학자도 MMT에 확실히 선을 그어왔다.
MMT는 미국에서는 주변부 담론이었지만, 한국에서는 문재인 정부 시절 집권당이 엇비슷한 철학을 가졌다. 당시 친여 성향인 일부 인사들이 MMT를 연구·검토하자고 주장했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대선 후보 시절 “개인은 빚을 못 갚으면 파산하지만 국가 부채는 이월이 가능하다”고 했다. 직접 MMT를 언급한 건 아니지만 MMT의 핵심 원리를 그대로 읊은 것이다. 이 대표는 또한 정부가 상환 의무가 없는 영구 국채를 발행하고 이걸 한국은행이 인수한 재원으로 지역화폐를 지급하자는 주장을 한 적도 있다. 중앙은행이 정부 부채를 떠맡기 위해 돈을 찍어야 한다는 구조라서 MMT 방식이다.
미국에서 MMT를 논의할 만했던 건 달러라는 막강한 힘을 가진 화폐를 찍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런 미국에서도 인플레이션 시대를 맞아 MMT에 대해 ‘사망 선고’를 내리고 있다. 이재명 대표든 누구든 대한민국 정치인이라면 빚내서 돈 풀어도 문제없다는 철 지난 주장에 귀를 기울이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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