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非文 넘치는 민법, 법무부·국회가 개정 나서야

김세중 前 국립국어원 공공언어지원단장 2022. 11. 14. 03:02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법치국가이고 법은 정확성이 생명이다. 오류가 한 치도 없어야 한다. 모든 법은 문장으로 씌어 있고 문장은 문법을 지켜서 써야 한다. 한국의 법률도 당연히 한국어 문법을 지켜야 한다. 이는 상식이다.

그런데 이 상식이 지켜지지 않고 있다. 우리나라 민법에 비문법적 문장이 200개가 넘는다. 심지어 오자(誤字)도 있다.

대한민국 헌법은 1948년 7월 17일 공포되었지만 민법은 1958년에 제정, 공포되었다. 범죄자에게만 적용하는 형법, 상인에게만 적용하는 상법과 달리 민법은 모든 국민에게 적용하는 가장 중요하고 기본이 되는 법이다. 그 민법이 정부 수립 후 10년 동안 없었고 일본 민법을 썼다.

1958년 민법도 일본 민법을 크게 참고해 만들었다. 많은 조항이 일본 민법을 그대로 번역한 것이다. 그런데 번역하면서 국어 문법에 맞게 하지 못한 조항이 많았다. ‘~에 위반하다’라는 표현이 대표적이다. 일본어에서 조사 ‘に’를 썼다고 ‘~에 위반하다’라 했는데 ‘~을 위반하다’가 국어 문법에 맞는다. 민법 제2조의 ‘신의에 좇아’도 일본어를 잘못 번역해 잘못된 표현이다.

민법의 비문이 모두 일본어 번역 오류만은 아니다. 민법 제77조 제2항의 “사단법인은 사원이 없게 되거나 총회의 결의로도 해산한다”나 제162조 “채권은 10년간 행사하지 아니하면 소멸시효가 완성한다”는 문장은 단순한 부주의에서 생겨난 비문이다. 법조문을 국어 문법에 맞게 바로 쓰려는 노력을 조금이라도 기울였더라면 이런 어처구니없는 비문이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심지어 어떤 조문은 아무리 읽어도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다. 제238조 “인지 소유자는 (중략) 그 높이를 통상보다 높게 할 수 있고 또는 방화벽 기타 특수 시설을 할 수 있다”인데 ‘높게 할 수 있고’ 다음에 ‘또는’이 와서 앞뒤가 모순이다. ‘또는’이 오려면 그 앞이 ‘있거나’라야 하고 ‘있고’가 맞는다면 ‘또는’이 없어야 한다. 입법 취지는 ‘있고’이므로 ‘또는’이 없어야 한다.

일반인은 법을 읽고 이해하기 어렵다. 법조문에 담긴 뜻이 매우 깊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 문장까지 문법을 어긴 조문이 많으니 당연히 더 읽기 어렵다. 법조문의 비문은 일반인의 법 이해를 가로막고 법학도들의 법학 공부를 더욱 힘들게 하므로 보이지 않는 국가적 손실이 심각하다. 민법 소관 부처인 법무부는 이런 민법의 문제점과 폐해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2014년 ‘법무부 알기 쉬운 민법 개정 위원회’를 구성하여 31차례에 걸친 회의 끝에 오류를 걷어낸 훌륭한 민법 개정안을 완성했다. 그 안을 2015년 제19대 국회에 제출했으나 국회가 임기 내에 처리하지 않아 자동 폐기됐고 2018년 제20대 국회에 또 제출했으나 역시 자동 폐기됐다.

왜 민법 개정안은 국회를 통과하지 못했을까? 법무부가 국회에 민법 개정안의 의의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 탓이 크다고 본다. 한자를 한글로, 어려운 용어를 쉬운 용어로 바꾼 것을 개정의 주된 이유로 내세웠는데, 민법은 이미 오래전부터 한글로 국민에게 제공되었다. 어려운 용어를 쉬운 말로 바꾸는 것은 절실한 개정 사유로 여겨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민법 개정안에는 비문을 문법에 맞는 문장으로 바꾼 것도 포함돼 있었다. 그걸 앞세워야 했는데 법무부는 그러지 않았다.

이제라도 법무부와 국회는 민법 개정에 나서야 한다. 광복 77년이 지났는데 일본어 오역이 우리 민법에 있다는 것이 가당한가. 비문은 잘못된 문장인데 법조문에 비문이 있어서야 되겠나. 심지어 민법에는 ‘지시를 받어’ ‘까스관’ 같은 오자도 있는데 고쳐지지 않고 있다. 민법은 하루속히 정화해야 한다. 정부와 국회가 행동에 나서야 한다. 우리 국민은 바른 민법을 가질 권리가 있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