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용·보상 프레임’에 유가족 진상규명 목소리 묻혀선 안 돼[왜 또 참사인가]

이혜리·김희진·전지현·김송이 기자 2022. 11. 13. 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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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 보호 못하는 정부
③ 지금 우리가 해야 할 것
참사 피해자 단체, 종교·시민·노동 단체 회원들이 지난 3일 서울 종로구 참여연대 아름드리홀에서 이태원 핼러윈 참사와 정부 대응에 대한 긴급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재난 대응 책임에 선 그으며
구체적 보상액 서둘러 발표
피해자들에 비난 여론 몰려

대형 참사가 발생하면 정부는 사고 경위를 조사해 책임 소재를 가리고 대책을 마련한다. 여기에 더해 세월호 참사 이후 원칙으로 자리 잡은 게 있다. 정부가 피해자와 유가족을 보호하고 참사 이후 절차에 이들의 참여를 보장하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현 정부가 이태원 참사 피해자와 유가족을 보호하고 참여를 보장하는 데 소홀하다고 지적한다.

근본적인 문제는 국가의 책임을 회피하는 정부의 태도이다. 한덕수 국무총리와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 등은 주최자 없는 행사임을 강조하거나 경찰 배치 문제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고 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10일 대통령실 수석비서관 간담회에서 “막연하게 정부 책임이라고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철저한 진상과 원인 규명, 확실한 사법적 책임을 통해 유가족분들에게 보상받을 권리를 확보해 드려야 한다. 충분한 배상과 위로금 지급도 이 같은 과정을 통해 가능해진다”고 했다. 재난 대응의 적절성이 아니라 ‘법적 책임’만 강조하며 보상 문제와 연결한 것이다. 정부는 참사 이틀 후인 지난달 31일부터 피해자와 유가족에 대한 구체적인 ‘보상 액수’를 언급했다.

정부의 이런 태도는 ‘놀러간 이들에게 왜 세금을 주느냐’는 식의 여론에 불을 붙였다. 정부 책임자들이 책임을 회피하고 보상 액수까지 언급해 화살이 더욱 피해자 쪽으로 향하게 된 것이다. 정지범 울산과학기술원 교수는 “정부는 국가 애도기간을 선포하면서도 도의적 책임만 지고 법적 책임은 안 지겠다는 자세를 보이고, 여론은 피해자를 비난하는 쪽으로 흐르고 있다”며 “피해자들이 재난을 일으킨 게 아닌데도 피해자를 비난하는 것은 문제”라고 했다. 재난안전법 등은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재난 피해자에게 여러 지원을 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돈 문제 앞세워 유가족 공격
박근혜 정부 세월호와 판박이

세월호 참사 때도 정부가 진상규명보다 ‘돈’ 문제를 앞세운 탓에 피해자들이 공격받았다. 보수진영 인사들은 유가족을 ‘세금 도둑’이라고 공격했다. 참사 진상을 규명하고 정책적 대안을 만들기 위해 특별조사위원회가 꾸려졌지만 박근혜 정부는 예산 편성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진상규명’ 프레임을 ‘비용’ 프레임으로 바꾸어 유가족 등 피해자를 공격하는 수단으로 삼은 것이다. 이태원 핼러윈 참사 발생 뒤 경찰청이 작성한 내부 문건에는 “향후 보상 문제가 지속적으로 이슈화될 소지가 있다”며 “빠른 사고 수습을 위해 장례비와 치료비, 보상금과 관련한 갈등 관리가 필요하다”, “보상 문제는 외부인 참여가 늘어날수록 협의가 어려워진다”는 대목이 나온다.

이번 이태원 참사의 경우 피해자와 유가족이 집단적으로 목소리를 내기가 쉽지 않은 여건이라는 지적도 있다. 세월호 참사 때는 피해자 대부분이 단원고 학생이었고, 구조 작업이 장기간 이어져 진도와 안산에 모인 유가족들이 의견을 모으고 정부를 향해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반면 이번에는 피해자들이 서울과 경기도의 병원으로 뿔뿔이 흩어졌고, 피해자와 유가족들이 한데 모여 정부의 수습 상황 등을 공유받거나 의견을 나누는 자리가 없다. 참사 수습 절차는 오롯이 정부 주도로 이뤄질 가능성이 높다.

4·16재단이 지난해 발행한 ‘재난 및 안전사고 피해자 권리 매뉴얼’은 참사 피해자 지원을 피해자의 권리라고 규정한다. 스스로 만족할 만한 진상규명, 책임감 있는 사과와 책임자 처벌, 재발 방지 대책의 수립과 실행, 충분한 애도, 삶의 회복 등에 도달할 때까지 피해자가 참여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핵심은 같은 사고를 당한 피해자들이 모여 함께 논의하고 대처하는 것이라고 매뉴얼은 제시한다. 피해자는 ‘주변인’이 아니라 ‘근본적인 해결 주체’라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지원 방식은 정부 정보 제공
피해자와 논의 후 결정해야

김혜진 생명안전시민넷 공동대표는 “지원 방식이 어때야 하는가에 대한 피해자 의견을 수렴하기 위해서라도 정부의 정확한 정보 제공과 피해자들이 논의 기회를 가질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의 제공이 필요하다”며 “보상금 액수를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되는데 현 정부는 보상금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면서 피해자들에 대한 공격을 방치하고 있다”고 했다. 이정일 변호사는 “피해자와 유가족들이 고통을 나누고 의사를 모으는 활동을 정부가 지원해주고 요구사항이 있다면 정부가 창구를 열어 협상을 해야 한다”면서 “고통받는 피해자들이 일상을 빨리 회복할 수 있고, 사회적 비용도 줄일 수 있는 방법”이라고 했다.

국가 상대 손배소 시작할 듯

이태원 참사 피해자와 유가족들은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 절차에 돌입할 것으로 보인다. 2001년 일본 효고현 아카시시에서 일어난 압사사고는 민형사상 책임이 모두 인정된 사례로 꼽힌다. 불꽂놀이에 인파가 몰려 11명이 숨지고 200여명이 다쳤다. 유가족들이 시와 경찰 등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2005년 일본 법원은 5억6800만엔(약 54억원)의 배상 책임을 인정하는 판결을 했다. 법원은 경찰이 혼잡한 상황을 알면서도 제대로 대책을 강구하지 않은 것에 책임이 있다고 판단했다.

이태호 참여연대 운영위원장은 지난 8일 기자간담회에서 “행안부 장관이 참사 초기 경찰 배치 문제가 아니라고 선언해 현장에 있던 모두를 잠재적 수사 대상으로 만들고 비난과 혐오의 대상으로 내던졌다”며 “피해자의 권리가 무참하게 침해받고 있다”고 했다. 이어 “우리가 접촉하는 피해자들 중 다른 피해자를 만날 수 없다고 호소하는 분들도 있다”며 “공무원이 피해자를 1 대 1 담당한다고 피해자의 참여권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전주희 서교인문사회연구실 연구원은 “정부가 국가 애도기간 선포 등 통제적·치안적 관점에서 이태원 참사를 바라보고 있다”고 했다.

이혜리·김희진·전지현·김송이 기자 lh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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