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코 인사이드] 이세범 용산고 코치, 그의 ‘조용함’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손동환 2022. 11. 13. 2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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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사는 바스켓코리아 웹진 2022년 10월호에 게재됐다. 인터뷰는 9월 19일 오전에 진행됐다.(바스켓코리아 웹진 구매 링크)

말 없고 존재감 없는 사람이 어느 조직에든 꼭 한 명씩 있다. 하지만 말 없고 존재감 없다고 해서, 조직에 필요하지 않은 사람인 건 아니다. 조용해도 제 몫을 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이세범 용산고 코치도 마찬가지다. 조용하고 차분하게 선수 생활을 했지만, 팀에서 필요로 하는 역할을 정확히 이행했다. 선수로서 누릴 수 있는 전공도 조용히(?) 획득했다.
지도자로 제2의 인생을 시작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조용하면서 차분한 스타일로 선수들을 지도하고 있다. 하지만 이세범 코치의 지도를 받는 선수들은 이세범 코치의 조언을 더 명확히 받아들인다. ‘코치 이세범’은 후배들의 농구 인생에 필요로 하는 말들만 전하기 때문이다.

조용했던 선수? 팀에 필요했던 선수!
신체 조건이 뛰어나지 않았다. 운동 능력 역시 다른 선수들보다 탁월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약점을 상쇄할 개인 기술이나 뚜렷한 장기도 없었다.
하지만 ‘선수 이세범’은 프로라는 험난한 무대에서 꽤 오래 버텼다. 1997~1998 시즌 대구 동양 오리온스(현 고양 캐롯 점퍼스)에서 데뷔한 이세범은 2008~2009 시즌까지 개인 통산 356경기를 소화했다. 우승 반지도 2개를 획득했다.
주어진 자리는 ‘백업 가드’였다. 보잘 것 없었다. 그러나 팀에서 원하는 역할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우승의 한 조각이 됐고, 그래서 오랜 시간 프로에서 뛸 수 있었다. ‘선수 이세범’이 지닌 매력은 생각보다 컸다.

대구 동양 오리온스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동양과 진로(현 서울 SK), LG가 1996년에 창단했습니다. 아마추어에서 프로로 바뀌는 과정이었죠. 제가 입단했던 동양에는 (전)희철이형(현 서울 SK 감독)과 (김)병철이형(전 고양 오리온 코치)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정봉섭 선생님(전 중앙대 농구부장)을 통해 동양으로부터 입단 제의를 받았어요. 1997년에 입단했고, 1997~1998 시즌부터 KBL에서 뛰었습니다.
2005~2006 시즌에야 처음으로 정규리그 전 경기를 소화했습니다. 데뷔 첫 우승도 경험했고요.
서장훈(현 방송인)이라는 워낙 좋은 선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장신 슈터인 이규섭(전 서울 삼성 코치)이 있었고, 강혁(현 대구 한국가스공사 코치)과 이정석(현 용산중 A코치) 등 좋은 가드도 있었습니다. 외국 선수(네이트 존슨-올루미데 오예데지) 역시 좋았고요. 좋은 선수들이 워낙 많았기 때문에, 선수들이 적시적소에 공격할 수 있게끔 저는 도와주기만 하면 됐습니다. 이렇게 말씀은 드렸지만, 제가 동료들의 도움을 더 많이 받았던 것 같아요.
선수들 덕분에, 안준호 감독님에게 신뢰를 받았습니다. SK에서 함께 했던 모리스 맥혼 코치의 영향도 컸고요.(이세범은 2001~2002 시즌부터 2004~2005 시즌까지 서울 SK에서 뛰었다) 저를 잘 알고 있던 코치였거든요.
또, 삼성에서는 체계적으로 피지컬 관리를 받았습니다. 그 당시에 외국인 트레이너가 있을 정도로, 몸 관리에 신경을 많이 쓰는 구단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몸 상태도 이전보다 좋았던 것 같아요.
2007~2008 시즌에 데뷔 첫 통합 우승을 경험했습니다.
사실 우승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김주성(현 원주 DB 코치)이라는 좋은 선수가 팀 동료였지만(웃음), 나머지 선수들은 약간씩 부족한 면이 있었거든요.
하지만 전창진 감독님(현 전주 KCC 감독)께서 팀을 하나로 만들어줬습니다. 너무 어려운 역할을 해주셨죠. 또, 선수들 모두 전창진 감독님을 많이 신뢰했습니다. 그게 좋은 결과로 나왔다고 생각해요. 그 때가 기억에 많이 남기도 하고요.
2008~2009 시즌 종료 후 은퇴하셨습니다.
다시 한 번 FA(자유계약)가 됐습니다. 선수를 더 할지 고민했죠. 때마침 강동희 감독님께서 새롭게 부임하셨고, 저에게 코치를 제의해주셨습니다. 고민을 했지만,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코치 제의를 받아들였죠.

조용했던 코치? 팀에 필요했던 코치!
‘선수 이세범’은 정말 차분했다. 아니, 조용하다는 표현이 맞는지 모르겠다. 표정 변화도 많지 않았다. 하지만 차분하고 조용한 성격이 ‘포인트가드 이세범’의 강점을 오히려 극대화했다.
선수 생활을 마친 이세범은 원주 동부(현 원주 DB)의 코치로 부임했다. ‘코치 이세범’ 또한 조용하고 차분했다. 그러나 해야 할 말은 꼭 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세범 코치의 조언은 선수들의 뇌리에 깊이 박혔다.
이세범은 코치로서도 많은 전공을 남겼다. 2010~2011 시즌부터 두 시즌 연속 챔피언 결정전 진출에 공헌했다. 특히, 2011~2012 정규리그에는 KBL 역대 팀 최다승 기록(44승, 서울 SK가 2012~2013 정규리그에서 최다승 타이 기록을 수립했다)을 도왔다.
2% 아쉬움은 있었다. 챔피언 결정전에 진출했던 2010~2011 시즌과 2011~2012 시즌 모두 우승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도자로서 많은 경험을 쌓았고, 지도자로서 공부한 것도 많았다. 하지만 2016~2017 시즌 종료 후 동부와 재계약하지 못했다. 프로 팀의 코치 생활을 그렇게 마무리했다.

2009~2010 시즌부터 동부의 코치를 맡았습니다.
선수 시절부터 전창진 감독님이나 김승기 감독님(현 고양 캐롯 감독이다. 이세범이 동부 선수로 있을 때, 김승기는 동부의 코치였다), 강동희 감독님의 지도 방식을 경험했습니다. 코치 부임 후에는 강동희 감독님께서 그려주신 큰 그림을 따라가면 됐습니다. 하나하나 배우려고 했죠. 또, 지도자를 처음 시작할 때, 많은 분들의 조언도 받았습니다. 그런 요소들 때문에, 저도 모르게 도움을 받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크게 어려운 점은 없었던 것 같아요.
2011~2012 시즌이 기억에 남으실 것 같아요.
(동부는 당시 44승 10패로 정규리그 최다승 기록을 수립했다. 그렇지만 챔피언 결정전에서 안양 KGC인삼공사에 2승 4패로 통합 우승을 실패했다)

다들 체력적으로 힘들어했습니다. 김주성이나 박지현(현 휘문중 A코치) 등 고참들도 거의 매일 풀 타임을 소화했거든요. 그래도 내색 없이 열심히 해줬습니다. 많이 고마웠어요. 고생해준 선수들 덕분에, 압도적으로 달려나갔는데... 아쉬움이 여러모로 컸습니다. 하지만 마침표를 찍으려면, 더 많이 준비해야 한다는 걸 배웠습니다.
3명의 감독님(강동희-이충희-김영만)을 경험했습니다. 배운 것들이 다 달랐을 것 같아요.
가드 출신이신 강동희 감독님께서는 전략적으로 한 단수 높은 분이셨습니다. 경기 상황을 빠르게 캐치하시고, 맥을 짚는 것도 빠르셨죠. 현역 시절 슛이 좋으셨던 이충희 감독님은 선수들에게 전술적인 움직임을 잘 알려주셨습니다. 선수 시절 수비와 공격을 다 갖추셨던 김영만 감독님께서도 확실한 색깔로 팀을 운영하셨고요.
김영만 감독님께서 계실 때, 이세범 코치님께서 처음 수석코치를 맡았습니다.
김영만 감독님께서는 코칭스태프와 의논을 많이 했습니다. 저희에게 의견을 물어봐주시면, 저희는 생각했던 것들을 말씀드렸습니다. 질문도 많이 했고요.
김영만 감독님께서는 선수들과 개별 미팅도 많이 하셨습니다. 격려도 수시로 해주셨고요. 그런 점들을 김영만 감독님한테 많이 배운 것 같습니다.

대세를 바꾼 사람
이세범 코치는 2016~2017 시즌 종료 후 동부와 재계약하지 못했다. 하지만 2017년 6월. 모교인 용산고등학교 코치로 부임했다. 1993년 2월에 졸업한 후, 24년 만에 모교로 돌아왔다.
그러나 프로 선수들과 학생 선수들의 차이는 컸다. 운동에 임하는 마음가짐부터 그랬다. 그래서 이세범 코치는 선수들에게 ‘태도’와 ‘마음’부터 강조했다. 농구에 필요한 멘탈이 성장하지 않는다면, 농구에 필요한 기술도 성장하지 않을 거라고 판단했다.
이세범 코치가 기본을 다지자, 용산고는 이전보다 한층 강력해졌다. 2021년에는 5관왕을 차지했고, 2022년에는 3관왕을 기록했다. ‘용산의 시대’가 고교 무대에 도래했다. 이세범 코치는 한국 고교농구의 대세를 바꿔버렸다.

2017년 6월 용산고 코치로 부임했습니다.
동부와 계약 기간이 끝났고, 이상범 감독님께서 새롭게 오셨습니다. 코칭스태프 구성이 바뀔 거라고 생각했죠. 그리고 어떤 이유였는지 모르겠지만, 용산고 코치가 그 때 공석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 때 용산고에서 코치 제의를 받았고, 고민을 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고민을 더 오래 한다면, 학생 선수들의 공백기가 길어질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학생 선수들이 피해를 볼 거라고 생각했죠. 그래서 코치를 맡기로 결정했습니다. 결정한 후에는 후배들을 위해 어떤 걸 할 수 있을지 생각했습니다. 제가 선배님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후배들한테 도움을 줘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어떤 것부터 강조하셨나요?
농구에 임하는 태도를 강조했습니다. 대학교랑 연습 경기할 때를 예로 들면, “형들이랑 붙는다고 해서, 무너지고 포기하는 건 당연하게 아니다. 너희도 얼마 안 있으면 저 형들과 함께 프로에서 같이 선다”고 했습니다. 아이들이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부터 바꾸려고 했죠.
프로 선수들을 가르치다가 고등학생 선수들을 지도하셨습니다. 차이가 크셨을 것 같아요.
일단 눈높이였습니다. 나름대로 낮춘다고는 했는데, 학생 선수들을 지도하는 한 후배 코치가 “눈높이를 더 낮춰야 할 겁니다”고 하더라고요.(웃음) 저도 계속 낮췄는데, 어느 순간 더 낮추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선수들의 수준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을 생각했죠.
어떤 방법이었나요?
제가 동부에 있을 때, 김주성과 윤호영 등 좋은 선수들이 많았습니다. 그 선수들이 훈련하는 자세와 태도를 아이들에게 알려줬습니다. 자신이 동경하는 선수들의 운동 방법을 알려주면, 아이들이 그걸 따라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거든요.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처음 부임했을 때만 해도, 대부분의 아이들이 팀 훈련 시작하기 5분 전에야 나왔습니다. 그래서 노력을 많이 하는 선수들을 점찍어둔 후, 팀 훈련 전에 연습할 수 있는 개인 훈련 방법과 출중한 프로 선수들의 개인 운동 방법을 알려줬습니다. 그러고 나니, 몇몇 선수들이 더 일찍 나와서 연습을 하더라고요. 처음에는 몇몇 선수들만 그랬지만, 점점 더 많은 선수들이 개인 운동에 참가했습니다. 그랬더니, 전체적인 분위기가 바뀌더라고요.
코치님께서 용산고로 부임하신 후, 용산고는 범접할 수 없는 팀으로 거듭났습니다. 그 원동력은 어떤 거였을까요?
저희가 그 정도 팀은 아닌 것 같습니다. 과찬이신 것 같아요.(웃음) 다만, 학생 선수이기 때문에, 꾸준한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물론, 부상이라는 어쩔 수 없는 변수도 있지만, 부상 없이 꾸준히 훈련해야 한다고 아이들에게 이야기했습니다. 기량이 쭉 올라가던 아이들도 잠깐이라도 쉬면 금방 내려가거든요.
그리고 여준석이라는 최고의 선수가 작년까지 있었습니다. 그 힘이 컸어요. 다만, 올해는 달랐습니다. 선수들 모두 어떻게 훈련해야 하는지를 스스로 깨달았습니다. 제가 주문하는 걸 잘 따라주기도 했고요.

“농구, 너무 행복하고 좋은 일입니다”
이세범 코치는 18세 이하 남자농구 국가대표팀(이하 U18 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했다. 8월 1일에 선수들을 소집했고, 2주라는 길지 않은 시간 동안 팀을 만들었다.
하지만 U18 대표팀은 기적을 만들었다. 지난 8월 28일에 열린 2022 FIBA U-18 아시아선수권대회 결승전에서 일본을 꺾었다. 2000년 이후 22년 만에 우승. 그 후 이세범 코치를 좋은 지도자로 인정하는 이들이 많아졌다. 그러나 이세범 코치의 생각은 달랐다. “공부할 게 끝도 없다”는 게 이세범 코치의 생각이었다.
한편, 이세범은 선수와 코치로 40년 가까이 농구를 접했다. 농구를 빼놓고는, 이세범의 인생을 이야기할 수 없다. 이세범 또한 ‘농구’를 각별하게 여겼다. “농구는 내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일이다. 행복하고 좋은 일이다”며 의미를 부여했다.

코치님의 이름이 수면 위로 떠올랐습니다. 지난 8월에 열린 U18 아시아선수권에서 우승을 차지했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식상하고 단순한 이유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만(웃음), 스태프들과 12명의 선수들 모두 하나가 돼서 이룬 결과로 생각합니다. 코트에 뛰는 선수든 벤치에 있는 사람이든 경기에 몰입했던 것 같아요. 또, “결과에 연연하지 말고, 끝까지 해달라”고 주문했는데, 아이들이 그걸 잘해냈다고 생각합니다.
대회에서 선보인 3-2 드롭 존을 선보였습니다. 코치님께서 동부에 계실 때, 동부가 자주 활용했던 수비 전술입니다.
(2010년대 초반 동부는 김주성-윤호영-로드 벤슨을 중심으로 3-2 드롭 존을 선보였다. 빅맨 3명의 높이와 스피드, 수비 범위와 수비 센스가 동반된 3-2 드롭 존은 동부의 필살기였다)

비슷하다고 이야기하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먼저 동부 시절에는 ‘수비자 3초 룰’이 있어서, 그 때처럼 수비를 섰다면 매번 점수를 내줬을 겁니다.
그리고 수비 전술을 하나 만들려면, 최소 6개월 정도의 반복 연습을 필요로 합니다. 그렇게 하더라도, 완성도는 장담할 수 없어요. 또, 그 당시 3-2 드롭 존은 수비 센스가 좋아야 하는 고난이도 전술입니다. 2주 정도에 맞출 수 있는 전술이 아니었죠.
다만, 탑에 서는 수비수의 역할은 그 때와 비슷했습니다. 로테이션을 잘 이해해야 하고, 나머지 4명과의 호흡도 잘 맞춰야 합니다. 체력적으로 힘든 자리죠.
2주라는 짧은 시간 동안, 합을 맞췄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수들이 3-2 드롭 존을 잘 해냈습니다.
(U18 대표팀은 이번 대회에서 결정적일 때 3-2 드롭 존으로 재미를 봤다)

8월 1일 오후부터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2주 밖에 시간이 없었어요. 어쩔 수 없이 훈련 강도를 높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이 불평불만 없이 훈련에 집중해줬습니다. 제가 봤을 땐, 아이들이 너무 잘 따라왔다고 생각해요. 코트 밖에서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웃음), 해보겠다는 의지도 커보였고요.
지도자로서 더 공부해야 할 건 어떤 게 있을까요?
끝도 없죠.(웃음) 제가 농구를 계속 하는 한, 끝도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농구’는 어떤 의미인가요?
어렸을 때부터 농구를 시작했습니다. 학생 때는 농구를 배웠고, 성인이 된 이후에는 농구를 직업으로 삼았습니다. 제가 비록 화려한 농구 선수는 아니었지만, ‘농구’는 제 인생에서 빼놓으면 안 되는 요소가 됐습니다.
‘이세범의 농구 인생’을 한 번 돌아봐주세요.
조용했던 것 같아요.(웃음) 그렇지만 운이 좋게도 어릴 때부터 농구를 통해 많은 걸 배우고 많은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농구를 가르쳐주신 많은 은사님들을 포함해, 외국인 코치과 외국 선수를 통해서도 농구를 배웠고요. 그래서 다양한 시각으로 농구를 접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농구와 함께 한 시간 자체가 저에게는 너무 소중했습니다.
다시 태어나도 농구를 하실 건가요?
아... 일단 다시 태어날지부터 잘 모르겠지만(웃음), 농구를 다시 할지도 잘 모르겠어요. 농구는 저에게 행복하고 좋은 일이지만, 다시 태어난다면 또 다른 기회가 있지 않을까요? 그래서 다른 것도 도전해보고 싶어요. 그렇지만 그런 생각을 하다가도, ‘이렇게 좋은 농구를 안 한다고?’라는 생각도 들어요. 고민할 것 같아요.(웃음)

일러스트 = 정승환 작가
사진 제공 = KBL(본문 1~2번째 사진), FIBA(본문 3~4번째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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