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와 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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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에서 전화벨 소리에 눈을 떴다.
이렇게 이른 아침에 울리는 전화벨 소리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휴대전화엔 모르는 번호가 찍혀있었다.
"시시티브이(CCTV)도 없는 길가에 세워놓은 차라 그냥 가셔도 몰랐을 텐데, 전화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런데 신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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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말고]
[서울 말고] 명인(命人) | 인권교육연구소 ‘너머’ 대표
침대에서 전화벨 소리에 눈을 떴다. 이렇게 이른 아침에 울리는 전화벨 소리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휴대전화엔 모르는 번호가 찍혀있었다.
“저기요, 미안합니다. 제가 실수로 사고를 냈는데요.” 부랴부랴 일어나 옷을 꿰어 입고 주차장으로 나갔다. 잠이 덜 깬 눈을 비비며 차부터 살펴봤다. 운전석 옆 펜더(바퀴덮개 흙받기)를 통째로 갈게 생겼다. 왈칵 짜증이 올라오려는 찰나 고개를 들었는데, 나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여성이 내 앞에 서서 떨고 있었다. 그녀는 트럭을 몰고 후진하다 내 차를 못보고 들이받았다면서 사과를 거듭했다. 사람이 다친 것도 아닌데 얼마나 진심으로 미안한 얼굴이던지, 나는 얼른 찡그린 내 얼굴을 수습해야 했다. 서둘러 표정을 전환하고 말했다.
“시시티브이(CCTV)도 없는 길가에 세워놓은 차라 그냥 가셔도 몰랐을 텐데, 전화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런데 신기했다. 이렇게 말하고 나니 진심으로 그녀에게 고마워졌다.
그녀는 일단 견적부터 받아보자며 공업사에 가자고 했다. 그러더니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남편이 곧 내려온다고 했다. 순간 나는 멈칫했다. 내 남편은 이미 일하러 나가고 집에 없었다. 피해자는 난데, 이런 상황에 남자가 나온다면 대체 왜 내가 떨게 되는 거냐. 나는 다시 전투태세가 됐다.
잠시 뒤 그녀의 남편이 왔다. 그런데…, 그도 그녀와 같은 표정이었다. 그는 깊이 허리까지 숙이며 사과부터 했다. “어쩌다 이 사람이 실수를 했나 봅니다. 아침부터 놀라셨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잔뜩 어깨에 힘을 주고 긴장했던 나는 그제야 다리가 풀린 것처럼 힘이 빠졌다.
함께 공업사에 가서 견적을 기다리는 동안 서로 이런저런 인사를 나눴다. 그들이 2년 전 낙향해 오이 농사를 짓고 있는 부부라는 걸 알게 됐다. 고흥은 아내의 고향이라고 했다. 부품이 없어서 며칠 뒤 공업사에 차를 맡기기로 했는데, 견적이 나오자마자 부부는 수리비 전액을 미리 내고서 혹시라도 추가되는 금액이 있으면 연락달라고 했다. 그러고도 모자랐는지 남편은 정비사들을 쫓아다니며 연신 부탁했다. 최대한 나에게 피해가 없도록 사고 난 흔적 하나 없이 잘 수리해주십사 하고. 여자도 연거푸 “잘 부탁합니다”라고 말했다.
험난한 세상이라며, 언제라도 전투에 돌입할 태세로 살던 나는 대체 얼마나 강퍅해진 건가. 부끄러웠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마음이 말랑말랑해졌다. “큰 액땜 하셨네요. 잘 처리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가해자는 진심으로 미안해하면서 책임지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피해자는 그런 가해자를 위로하고 있었다. 다행히 큰 사고가 아니었고 애초에 일어나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 일이지만, 이왕 벌어진 사고에 아무도 마음을 다치지 않았다.
개인 간 작은 사고도 누군가는 이렇듯 사과하고, 이렇듯 책임지려 애쓰는데 왜 국가는 한번도 진심으로 미안해하지 않을까? 몇백명이 어이없이 목숨을 잃는 참사를 몇번째 목격하는 우리는 왜 한번도 국가가 책임을 자청하는 것을 보지 못할까? 한해 이천명 넘는 노동자, 하루 평균 여섯명 노동자가 일하다 죽어가는 나라에서 기업도 최선은커녕 최소한의 책임조차 회피하기 일쑤다.
매일 사람이 태어나고 죽지만, 모르는 사람의 죽음에 일일이 슬퍼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의 죽음에 우리는 번번이 가슴을 친다. 막을 수 있었던 사회적 재난이기에 슬픔이 우리를 다시 잇는다. 슬픔으로 연결된 우리는 먼저 책임을 자청한다. 안전에 관한 법은 죄다 유가족들이 만드는 나라에서 또다시 생존자들과 유가족들의 고통 곁에 선다. 그리고 또 묻는다. 누가, 대체 왜 이 죽음을 막지 못했는지 우리는 반드시 알아야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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