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의 구멍으로 도망친 정치, ‘적법의 세계관’이 부른 참극 [한겨레 프리즘]
[한겨레 프리즘]
김경락 | 전국팀장
2008년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배경으로 한 영화 <빅쇼트>는 실화를 토대로 만들었다. 주인공 마이클 버리(크리스천 베일)는 모두가 들떠 있을 때 주택금융의 잠재 부실을 간파하고 공매도에 베팅해 1조원에 이르는 돈을 벌며 일약 스타로 뜬다. 기라성 같은 투자은행과 보험사가 연이어 파산하고 글로벌 금융시장이 붕괴하는 와중에 빚어낸 대박이었다. 탐욕에 눈이 멀면 돈을 잃고, 위험을 간파하면 큰돈을 번다.
올가을 돈 가뭄에 빠져든 채권시장에 불씨를 던진 건 한 지방자치단체장이다. 부실 출자기관을 법원에 회생 신청하거나 만기에 이른 채권 상환 시점을 수개월 미룬 결정은 평소라면 찻잔 속 태풍에도 미치지 못했을 것이다. 수백조원 규모 채권시장이 고작 2050억원에 휘둘린 건, 시장이 어디에 숨겨져 있을지 모를 ‘지뢰’ 탓에 한껏 취약해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위험의 크기를 눈치채지 못한 김진태 강원지사는 무능이란 낙인과 함께 정치인이자 행정가의 생명인 신뢰를 잃었다. 그가 얻은 건 앞으로 강원도가 빌릴 돈에 덧붙을 ‘김진태 프리미엄(가산금리)’뿐이다.
위험에 예민하지 않은 정부는 사람의 생명을 앗아간다. 핼러윈 데이를 맞아 10여만명 인파가 이태원에 몰릴 수 있다는 전망보고에도 사전 대비를 하지 않은 위정자들은 그 보고서 행간에 숨겨진 위험을 알아채지 못했다. 박희영 용산구청장과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은 많은 이들이 고통 속에서 압사해가던 그 순간 안락한 집에서 피로를 씻어내고 있었고, 윤희근 경찰청장은 서울과 멀리 떨어진 산세 좋은 곳에서 지인들과 모닥불을 피웠다. 이들은 위험의 부스러기도 인지하지 못했다.
이들은 왜 위험을 사전에 인지하지 못했을까. 엉뚱하게도 한달여 전 검사 출신 대통령실 인사비서관의 한줄 답변이 떠올랐다. 그는 고위공직자 재산공개에서 배우자와 함께 40여채가 넘는 부동산을 보유한 사실이 드러났는데, “적법하게 형성된 재산으로, 제반 세금을 모두 납부했다”로 단출한 설명을 내놓은 바 있다. 그는 명징한 답변이라며 자족했을지 모르겠으나 내게는 꽤 이상한 해명으로 들렸다. 재산 형성에 불법이 개입됐거나 세금 탈루를 의심할 만한 정황 때문에 질문을 던진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국민 눈높이와 거리가 있어 유감” 정도의 뻔한 말만 덧붙였어도 ‘적법이면 다인가’란 생각은 들지 않았을 것이다. 법복을 벗은 그는 여전히 ‘검사의 세계관’ 속에서 살고 있었다.
이태원 참사 이후 윤석열 정부의 첫 일성은 “주최자 없는 축제여서 마땅한 책임자가 없다”였다. 주최자 없는 행사를 안전관리 대상으로 분류하지 않는 재난안전법의 맹점을 염두에 둔 메시지였다. 조금 비약해 보면 이런 메시지는 ‘정부는 법에 충실했지만 157명의 희생자를 낳은 재난을 막지 못했다’는 주장으로 읽힌다. 사실은 참사 책임이 ‘정부’가 아니라 ‘법’에 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이상한 메시지는 정권 핵심부에 ‘적법-불법의 세계관’을 공유하는 이들이 다수 포진해서 나온 건 아닐까. 검사 출신 대통령과 판사 출신 행안부 장관은 사과도 쉽게 하지 못했(거나 안 했)다. 두 사람의 모습에는 금융시장에 대혼란을 부른 뒤에 뒤늦게 “좀 미안”이란 짧은 사과를 한 검사 출신 김진태 지사가 오버랩된다.
정치와 행정은 적법의 세계관에 머물러 있지 않다. 법은 ‘최소한의 도덕’이라면 정치와 행정은 최소한의 도덕 그 이상을 다룬다. 교과서에서 정치를 ‘가치의 권위적 배분’이라고 일컫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법에만 기댄 세계관, 법 만능주의는 평범한 법조인의 덕목일지 모르나, 정치·행정가에겐 위험하며 국민까지 안쓰러운 처지에 놓이게 하기 십상이다. 위험의 크기를 모르는 투자자는 스스로 손실을 감내하지만, 위험의 크기를 모르는 정치·행정가가 불러오는 위험은 그를 뽑아준 유권자들이 떠안아야 하기 때문이다. 탐욕에 눈먼 투자자보다 적법의 세계관에 눈먼 정치·행정가가 더 위험한 이유다.
sp96@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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