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인화 덫' 걸린 서울대···거버넌스 구축·재정자립도 되레 뒷걸음
'직선제色 강한 간선제' 총장 선출
폐쇄적 조직문화에 수익모델 깜깜
"이러려고 법인화했나" 볼멘소리도
서울대가 법인화한 지 10년이 흘렀다. 재정 자립을 통한 자율성 확보로 초일류대학으로 발돋움하겠다는 목표를 세웠지만 여전히 안착하지 못한 채 표류하고 있다. 국내 최고 학부로 평가받는 서울대의 모습은 국내 대학이 처한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서울대는 후진적인 총장 선출 방식 때문에 강력한 리더십과 효율적인 거버넌스를 구축하지 못했다. 독자적인 수익 모델을 만들지 못해 재정 자립도가 오히려 법인화 이전보다 후퇴하면서 정부 의존도가 더 높아졌다. 학내 구성원 사이에서는 “이럴려고 법인화했느냐”는 볼멘소리가 나온다.
13일 서울대의 올해 법인회계 세입·세출안에 따르면 총 9411억 원의 세입 중 정부출연금은 5380억 원(57.2%)으로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사실상 법인화 첫해인 2012년의 운영 수익에서 정부출연금(2747억 원)이 차지한 비중 45.9% 대비 11.3%포인트나 증가했다.
정부출연금이 늘면서 예산 규모는 커졌으나 재정 자립을 통해 대학 자율성을 확보하겠다는 당초 법인화 취지는 무색해진 상황이다. 재정 지원을 근거로 정부가 대학 운영에 간섭해도 거부할 명분이 부족할 뿐더러 출연금이 줄어들 경우 교육의 질이 급격히 악화할 수 있다.
법인화된 서울대는 자체 예산 확보가 가능하지만 발전기금을 활용한 투자 수익이나 기부금 모금에서 성과가 기대에 못 미치고 있다. 2019년 1152억 원이던 기부금은 지난해 677억 원으로 40% 이상 급감했고 6460억 원인 발전기금을 활용해 올린 운용·이자 수익이 284억 원에 불과했다.
다른 지역 거점 국립대에 비해서는 압도적인 규모지만 50조 원이 넘는 발전기금을 바탕으로 투자 수익만 연간 10조 원을 올리는 미국 하버드·스탠퍼드대 등 글로벌 초일류대학과 비교 자체가 되지 않는 수준이다. 연간 예산 규모도 2조~4조 원대인 중국 베이징대·칭화대, 싱가포르국립대, 일본 도쿄대 등 아시아 경쟁대학에 크게 밀린다. 전체 고등교육 예산의 4.5%, 국립대 지원 예산의 13.6%를 차지하면서도 서울대가 재정난을 호소하는 배경이다.
임정묵 서울대 교수협의회장(농생명과학과 교수)은 “서울대 교원 급여는 국내 최상위 대학의 80% 수준에 그치면서 우수한 교육·연구 역량을 지닌 인재를 교수로 유치하는데 제약이 되고 있다”면서 “재정 자립과 대학 자율성이 확보되지 않다 보니 제도 개혁과 교직원 처우 개선이 힘든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총장 선출 방식과 대학 운영 거버넌스도 개선해야 할 부분이다. 서울대 총장 선출 방식은 직선제 성격이 강한 간선제다. 총장추천위원회가 총장 예비 후보자 4명 내외를 추천하면 교직원과 학생으로 구성된 정책평가단이 총장 예비 후보자의 공약을 평가한 뒤 순위를 가린다. 총추위가 상위 1~3위를 이사회에 올리고 이 중 1명을 최종 후보자로 선출한다.
서울대는 이 같은 총장 선출 방식이 급변하는 대학 환경 변화에 대응할 리더를 선출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보고 있다. 외부 출신 인사에 대한 문턱을 낮추는 방향으로 제도를 개선하는 한편 총장이 중장기 발전 계획을 추진할 수 있도록 4년 임기를 6년으로 늘리고 연임도 가능하도록 할 방침이다. 대학본부에 과도하게 집중돼 있는 권한을 단과대와 대학원으로 분산하는 방안도 추진하기로 했다.
과도한 순혈주의로 인한 폐쇄적이고 관료주의적인 조직 문화를 타파하고 내부 자정 기능을 회복하는 것도 과제로 꼽힌다. 과거에 비해 완화됐으나 공대와 자연대 등의 모교 학부 출신 교수 비중이 70% 안팎에 달해 학문의 다양성을 저해한다는 지적이 여전하다. 폐쇄적인 조직 문화 탓에 연구 윤리 부정과 비리·비위도 만연하다. 미성년자 논문 공저자 부정 등재의 절반이 서울대 교수 주도하에 이뤄진 것이 대표적이다. 교육부가 지난해 9~10월 실시한 종합감사에서 연구비 유용 등으로 교직원 666명이 한꺼번에 감사 처분 요구 대상이 돼 도덕적 해이가 심각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서울대 교수의 논문 표절과 성비위도 끊이지 않는다.
교육계에서는 서울대가 학칙 개정과 함께 산학협력 강화 등으로 자체 경쟁력을 높이는 동시에 국내 대학들의 혁신을 적극 지원함으로써 고등교육 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일례로 경북대·전남대가 데이터사이언스대학원을 설립하는 과정을 지원한 것처럼 개방성을 바탕으로 인적자원과 노하우·인프라를 다른 대학과 공유하면서 국내 최고·최대 대학으로서의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김도연 울산대 이사장은 “원자력의 아버지로 불리는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독일 대학에 있다가 1930년대에 미국 대학의 초빙을 받고 귀국해 600㎞ 이상 떨어진 UC버클리와 캘리포니아공대(칼텍)를 번갈아 강의하고 연구를 진행했다”면서 “교통과 통신이 당시보다 훨씬 발전한 요즘 서울대 교수가 지역 거점 국립대를 오가며 공동 연구·강의를 하는 등 국내 대학들이 경계와 상식을 허무는 파괴적 혁신과 개방형 협력을 시도할 때”라고 강조했다.
성행경 기자 saint@sedaily.comCopyright © 서울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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