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 이황도 반한 제천 옥순봉의 불타는 가을 [최현태 기자의 여행홀릭]
최현태 2022. 11. 13. 15:02
금봉과 박달의 애절한 사랑이야기 담긴 제천 박달재 만추 낭만 가득/출렁다리 건너 만나는 제천10경 옥순봉 절벽 ‘장관’/청풍호반 케이블카 타고 비봉산 정상 오르면 아름다운 청풍호가 파노라마로
남자의 얼굴을 애절한 표정으로 올려다보는 여자. 그 여자의 조막 만한 두 손을 꼭 잡으며 다시 오겠노라 약속하는 남자. 하지만 여자의 얼굴은 근심으로 가득하다. 과연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이대로 영영 헤어지는 것은 아닐는지. 만추로 걸어 들어가는 울고 넘는 박달재에 섰다. 아주 짧게 불꽃처럼 타올랐던 금봉과 박달의 가슴 아린 사랑이야기는 온 산을 울긋불긋 물들였다 순식간에 타들어가며 사라질 단풍처럼 화려하고도 쓸쓸하다.
◆‘슬프도록 아름다운’ 러브 스토리
“한 번만이라도 보고 싶은 마음/서러워 눈물로도 참지 못해 … 기쁜 젊은 날에 내 사랑/어떻게 널 잊을 수 있어/슬프도록 아름다웠던 우리 지난날에 사랑아♬♩∼” 충북 제천시 박달재로 가는 길, 운전하던 지인이 오디오를 켜자 1990년대를 풍미한 미성의 록 가수 K2 김성면의 노래 ‘슬프도록 아름다운’이 흘러나온다. 1995년에 발매됐으니 어느덧 30년이 다 돼간다. 그래, 그땐 참 저 노래 많이 따라 불렀지. 금봉과 박달의 사연이 담긴 박달재를 가는데 슬프도록 아름다운 사랑이라니. 참 절묘한 선곡이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다 보니 현판에 ‘박달재’가 커다랗게 적힌 일주문이 목적지에 도착했음을 알린다.
제천시 봉양읍과 백운면을 갈라놓은 험한 고개를 박달재라 부른다. 지금은 자동차로 10여분이면 가뿐하게 넘지만 옛날에는 박달재와 이어지는 다릿재를 넘으려면 걸어서 며칠이 걸렸다. 과거 보러 한양으로 가는 선비들이 넘던 길이다. 고갯길이 워낙 험하고 가파른 데다 박달나무가 우거져 호랑이 같은 산짐승이 불시에 튀어나왔고 행인을 노리는 도둑도 많았다. 박달재의 원래 이름은 천등산과 지등산의 영마루라는 뜻을 지닌 ‘이등령’. 인근에 인등산도 있어 천(天), 지(地), 인(人)이 모두 갖추어진 유일한 곳으로, 하늘에 천제를 올리던 성스러운 곳이었다. 그런데 어쩌다 ‘울고 넘는 박달재’가 됐을까. 여러 얘기가 전해진다. 고개를 넘어 옆 마을로 시집간 새색시는 길이 너무 험하기에 두 번 다시 친정에 갈 엄두를 내지 못했단다. 친정이 그리워도 다시는 갈 수 없는 슬픔에 매일 눈물을 쏟으면서 ‘울고 넘는 박달재’로 불리게 됐단다.
이보다는 금봉과 박달의 애달픈 사랑 이야기가 더 가슴에 와닿는다. 장원 급제의 부푼 꿈을 안고 한양으로 가던 선비 박달이 날이 저물어 고개를 넘기 전 촌가에 들렀다가 길손을 맞이하는 금봉의 순수하고 청초한 모습에 그만 정신을 빼앗겼다. 금봉도 준수한 박달을 보고 한눈에 반해 둘은 깊은 사랑에 빠졌다. 몇 날을 머물다 박달은 과거에 급제한 뒤 혼인을 올리겠노라 언약하고 고개를 넘어 한양으로 떠났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소식이 없자 금봉은 고개를 오르내리며 박달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다 숨졌다. 과거에 낙방한 박달은 금봉을 볼 면목이 없어 차일피일 미루다 금봉을 찾아갔지만 이미 장례한 지 사흘 뒤. 박달은 땅을 치며 목 놓아 금봉을 부르다 고개를 오르는 금봉의 환상을 보고 뒤쫓아 가 와락 금봉을 안았지만 금봉은 사라졌고 절벽에서 떨어져 죽고 만다. 마을 사람들은 두 사람의 사랑이 너무 애틋해 박달재로 부르게 됐단다.
언제부터 전해진 얘기인지는 알 수 없지만 박달재 조각공원으로 들어서자 둘의 러브 스토리는 작품 속에서 살아 숨 쉰다. 박달이 금봉을 뒤에서 안는 거대한 동상이 세워졌고 둘의 사연을 테마로 조형물이 늘어섰다. 책은 안 보고 금봉이 생각만 하는 박달, 박달의 과거 급제를 기원하는 금봉, 금봉의 환영을 쫓는 박달까지. 그중 압권은 둘이 헤어지면서 두 손을 꼭 잡고 서로 바라보는 작품. 금봉의 표정이 살아 있는 듯 생생하다. 두 사람의 실루엣으로 만든 작품 위엔 혼인을 뜻하는 쌍가락지가 놓였다. 죽어서라도 둘의 사랑이 이어지길 바라는 마을 사람들의 간절한 염원이 담긴 작품이다. 박달과 금봉의 가묘, 이들의 명복을 빌고 영원한 사랑을 소원하는 사당도 있다.
맞은편 박달재 목각공원 산책로를 따라가다 만나는 정자 모양 전망대에 오르자 공원을 에워싼 높고 험한 산이 울긋불긋 고운 단풍으로 물들어 만추의 환상적인 풍경을 선사한다. 목각공원에선 아주 독특한 작품을 만날 수 있다. 바로 목굴암이다. 성각스님이 2005년 천년을 살다 죽은 느티나무를 가져와 3년2개월 동안 정성을 들여 자르고, 파고, 새겨서 한 사람이 들어갈 만한 작은 법당인 목굴암을 완성했다. 어렵게 기어서 안으로 들어가면 세상에서 가장 작은 법당이 펼쳐진다. 목굴암 옆에는 저마다 생김새가 다른 오백 나한을 새기고, 삼존불을 모신 또 다른 천년 느티나무가 서 있어 눈길을 사로잡는다.
◆퇴계 이황도 반한 옥순봉의 불타는 단풍
만추 속으로 좀 더 깊이 들어가려 옥순대교로 달려간다. 출렁다리를 건너가 만나는 옥순봉은 단풍이 절정이다. 옥순대교 입구에 서자 깎아지른 기암괴석 절벽이 병풍처럼 펼쳐진 옥순봉 전경이 마치 한 폭의 산수화를 보는 듯하다. 월악산국립공원에 속해 있는 옥순봉은 경관이 뛰어나 소금강으로 불리며 희고 푸른 여러 개의 봉우리가 마치 대나무 싹과 같아 옥순봉이란 이름을 얻었다. 퇴계 이황이 사랑하던 명승지로 제천 10경과 단양 8경에 모두 속한다. 사연이 있다. 퇴계 선생이 단양군수로 재직할 때 절경에 반해 청풍군수에게 옥순봉을 단양에 속하게 해달라고 청했지만 거절당해 옥순봉 석벽에 단양의 관문이란 뜻으로 ‘단구동문(丹丘洞問)’을 새긴 유명한 일화가 전해진다. 옥순봉 휴게소에서 전망대까지 5분 정도 올라가면 그 수려한 산세와 힘찬 봉우리를 감상할 수 있다.
옥순봉 출렁다리 매표소는 평일인데도 단풍을 즐기려는 여행자로 북적거린다. 출렁다리로 가는 산책로에 들어서자 고운 단풍으로 물든 옥순봉 풍경에 감탄이 쏟아진다. 절벽 아래는 카약 한 무리가 청풍호 옥빛 물살을 가르며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더니 단풍 속으로 사라진다. 지난해 10월 문을 연 출렁다리는 길이 222m, 너비 1.5m 규모로 여행자들은 다들 난간을 붙잡고 걷는다. 보통 위 아래로 살짝 흔들리는데 옥순봉 출렁다리는 좌우로 마구 요동쳐 건너고 나니 멀미가 날 정도. 노약자는 좀 힘들 수 있으니 조심하도록. 다리를 건너면 생태탐방 덱로드와 야자 매트 트레킹 길이 이어져 호반과 옥순봉을 둘러볼 수 있다. 많은 문인, 화가가 사랑한 옥순봉은 해발 283m의 낮은 산으로 천천히 걸어 1∼2시간이면 충분하다. 유람선을 타면 옥순봉과 그 옆 구담봉 석벽의 매력을 가까이서 즐길 수 있다.
청풍호와 단풍을 하늘에서 조망하는 좋은 방법이 있다. 청풍호반 케이블카를 타고 비봉산에 오르면 된다. 청풍면 물태리에서 비봉산 정상까지 2.3㎞ 구간을 운행하는 케이블카를 타자 순식간에 비상한다. 고도를 점점 높일수록 불타는 단풍과 짙푸른 청풍호가 발밑에 아찔하게 펼쳐지는 풍경이라니. 빼어난 절경에 입을 다물 수 없다. 봉황새가 알을 품고 있다가 먹이를 구하려고 비상하는 모습과 닮은 비봉산은 청풍호 중앙에 있는 해발 531m의 명산. 케이블카로 10분 만에 올라 정상에 서자 넓은 청풍호가 시원하게 펼쳐져 마치 바다의 섬에 오른 기분이다. 안개가 끼어 선명하지 않지만 그래서 단풍은 더 아련하고 운치 있다. 내륙의 바다, 청풍명월로 불리며 수많은 시인과 묵객이 칭송한 이유를 잘 알겠다. 많은 여행자가 정상의 포토존에서 청풍호와 단풍을 추억으로 남긴다. 동창생과 가을 여행에 나섰나보다. 수다 삼매경에 빠진 60대 아주머니들 얼굴에는 단풍처럼 곱고 예쁜 웃음꽃이 활짝 폈다.
제천=글·사진 최현태 선임기자 htchoi@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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