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년간 OECD 한국담당관으로 일한 랜들 존스의 한국 사랑 [글로벌 노마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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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2017년말부터 4년간 특파원으로 근무한 프랑스 파리에는 국제기구가 여럿입니다. 유네스코(UNESCO), 국제에너지기구(IEA), 국제철도연맹(UIC) 등 여러 기구가 많지만,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곳이 ‘선진국 클럽’이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입니다.
한국은 OECD를 중요하게 여기는 나라입니다. 다른 나라와 비교한 각종 OECD 경제·사회 통계에 무게가 실리고 언론과 학자들이 자주 인용합니다. 우리 정부는 OECD 대표부 대사에 차관급 인사를 보내는데요. 다른 회원국들이 보통 정부 부처 국장급을 보내는 것에 비하면 훨씬 높은 직급의 인사를 파견합니다.
아시아 국가 중 OECD에 회원국으로 들어있는 나라는 한국과 일본뿐입니다. 터키·이스라엘이 있긴 하지만 서양의 지리 개념으로는 중동 지역에 있는 나라들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가 OECD 회원국이 된 1996년 이후 26년이 지나도록 아시아 국가가 진입하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죠.
오늘은 OECD에서 26년간 한국 경제를 담당했던 미국인 랜들 존스(67) 박사의 인생 스토리를 다뤄보려고 합니다. 그는 한국에 큰 애정을 가진 사나이입니다. 미국인으로서 프랑스에서 한국 경제를 담당한 ‘글로벌 노마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존스 박사의 뒤를 이어 OECD의 역대 두번째 한국경제담당관이 된 프랑스인 크리스토프 앙드레(55)씨를 만난 이야기도 해보겠습니다.
◇세종청사에서 봤던 미국인을 파리에서 만나
2017년 12월 파리에 막 도착했을 때 여러가지로 난감했습니다. 집을 구하기가 무척 어려웠습니다. 프랑스인들 일처리는 워낙 느려서 세월아 네월아 식이죠. 서울에 눈에 띄는 기사도 보내야 한다는 부담도 있었는데요. 아무래도 고위 인사 인터뷰를 꾸준히 시도해보는 게 좋겠다 싶었습니다.
저는 OECD를 이끄는 앙헬 구리아 당시 사무총장을 만나 보기로 했습니다. 그는 멕시코에서 재무·외무장관을 지낸 인물입니다. 주로 유럽인들이 맡았던 OECD 사무총장을 두번 연임해 15년 재임했습니다. 구리아 총장측에 전화도 하고 이메일도 보내며 인터뷰를 하려고 애썼습니다. 전세계를 무대로 움직이는 구리아 총장이 파리에 머무르는 시간은 많지 않았습니다. 어렵게 2018년 2월 인터뷰 약속을 잡았습니다. 한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약속한 날짜에 갔더니 어디서 본 적 있는 미국인 한 사람이 배석해 있었습니다. OECD의 한국·일본 경제담당관인 랜들 존스 박사였습니다. 특파원으로 떠나기 전 기획재정부를 담당할 때 정부세종청사부 브리핑룸에서 존스 박스를 두어번 본 적 있습니다. 세종에서 봤던 미국인을 파리에서 만나다니 신기하더군요.
저는 구리아 총장에게 최저임금 인상과 관련한 질문을 집중적으로 했습니다. 당시 출범 초기였던 문재인 정부의 무리한 최저임금 인상이 한국에서 논란이었기 때문이죠. 구리아 총장은 사전에 존스 박사로부터 ‘인터뷰용 개인 교습’을 받은 듯 했습니다.
구리아 총장은 “최저임금을 적절하게 올리면 근로자의 삶을 보호할 수 있지만 지나치게 올리면 일자리를 파괴할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최저임금 수준이 너무 높아서 아직 숙련되지 않은 젊은이한테 지나치게 많은 인건비를 지급해야 한다면 고용주는 ‘미안하지만 당신에게 제공할 일자리는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인터뷰 말미에 구리아 총장은 존스 박사를 가리키며 “다음에는 이 사람을 인터뷰해봐라. 한국 경제에는 나보다 전문가 아니겠냐”라며 너털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실제로 저는 5개월 후 존스 박사의 OECD 내 사무실에 찾아갔습니다.
◇'趙恩秀'라는 명패 놓고 일하는 파란눈의 사나이
존스 박사의 방에 들어갔더니 이건 파리의 미국인 사무실이 아니라 서울의 한국인 사무실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책상에 ‘趙恩秀(조은수)’라는 그의 한국식 이름을 한자로 새긴 명패가 놓여 있었습니다. 책상 뒤로는 한반도 지도와 함께 ‘가정이 지상의 천국’이라고 한글로 적은 글귀가 걸려 있었습니다.
조은수라는 이름을 어떻게 만들었냐고 했더니 그는 이렇게 답하며 웃었습니다. “조은수라는 이름의 발음이 ‘존스’랑 비슷하다는 한국인 친구들의 권유가 있었어요. 발음도 원래 이름과 비슷하지만 은혜롭고 빼어나다는 의미가 참 좋지 않나요.”
자연스럽게 어떻게 한국과 인연을 맺게 됐는지 대화 삼매경에 빠졌습니다. 존스 박사가 한국 땅을 처음 밟은 건 1974년이었습니다. 몰몬교 신자인 그는 유타주의 브리검영대 경제학과 1학년을 마치고 해외 선교를 나갔습니다. 1970년대는 눈이 파란 사람을 보기 쉽지 않을 때죠.
“그때만 해도 한국은 생소한 나라였죠. 부산을 시작으로 대구, 서울, 광주를 돌면서 2년간 하숙집 생활을 하며 선교 활동을 했습니다. 아침마다 동네 목욕탕에 가서 한국말을 익혔습니다. 광주에서는 ‘안녕히 가시랑께요’라고 하고, 부산에서는 ‘어서 오이소’라고 정겨운 사투리를 썼어요. 요즘 한국인들은 당시에 비하면 사투리를 덜 쓰는 것 같습니다.”
미국에 돌아간 존스 담당관은 동북아시아 경제를 전공해 미시간대에서 경제학 석사와 박사 학위를 땄습니다. 박사 학위를 밟을 때는 일본 쓰쿠바대학에 가서 교환학생으로 수학하기도 했죠. 그는 한국뿐 아니라 일본에도 관심이 많고 OECD에서도 한국·일본을 함께 맡았습니다.
존스 박사는 박사 학위를 마치고 미 국무부에서 잠깐 관료 생활을 한 뒤 1989년부터 2019년까지 OECD에서 30년 일했습니다. 그중 1993년부터 퇴임할 때까지 26년을 한국 경제를 담당했죠. 존스 박사는 OECD 대사를 지낸 권태신 전국경제인연합회 상근부회장, 윤종원 IBK기업은행장 등과 잘 알고 지냈습니다.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에 유력한 조동철 전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 등 한국인 학자들과도 두루 친합니다. 존스 박사는 “과장, 국장할 때 본 사람이 차관, 장관까지 승진하는 걸 보면 왠지 뿌듯하다”고 했습니다.
◇세종에 호텔이 없을 때 대전의 모텔에서 잤다
존스 박사는 OECD에서 승진이 빠른 관리직으로 옮기거나 다른 나라 분석을 맡는 직책으로 이동할 기회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하지만 관리자의 길을 택하지 않고 한국과 일본 경제를 연구하는 직책을 고집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OECD 생활이 끝나갈 무렵에는 직급상 나이 어린 후배 밑에서 일을 했습니다.
그는 “한국 사회를 들여다보는 게 너무 흥미로워서 한국과의 인연을 끊을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1994년 OECD가 첫 번째 한국 경제 보고서를 만들었는데요. 김영삼 당시 대통령이 OECD 가입을 추진한 것이 계기가 돼서 만들었는데, 그걸 존스 박사가 펴냈습니다. 한국은 1996년 정식 회원국이 됐습니다. 1994년 첫 보고서 이후로 그가 퇴임할 때까지 한국 경제와 관련한 보고서 16편을 모두 존스 박사가 집필했습니다. 대단한 인연입니다.
존스 박사는 OECD에서 일하는 동안에만 한국을 40번 넘게 방문했습니다. 그는 “정부세종청사가 만들어진 초기에 이렇다할 호텔이 없어서 대전에 있는 모텔에서 자기도 했다”며 “40여 년 전 한국의 하숙집과 목욕탕에서 단련됐기 때문에 그 정도는 전혀 불편하지 않다”며 웃었습니다.
그는 평소 아내 조디(65)와 함께 파리 시내 한국 식당도 자주 찾았습니다. 잡채, 삼계탕, 갈비탕이 부부가 좋아하는 한국 음식입니다. OECD는 파리의 부촌인 16구에 있습니다. 저는 이 동네의 오래된 한식당인 ‘우정’에서 존스 박사와 비빔밥을 먹으면서 한국 경제를 놓고 이야기를 나눈 적도 있습니다. 그가 자주 찾아가던 식당이죠. 한국 정부는 2018년 존스 박사의 공로를 인정해 수교훈장 숭례장(崇禮章)을 수여했습니다. 우방과의 친선에 공헌이 큰 사람에게 주는 훈장입니다.
◇”한국은 노동 생산성 높여야 한다”
2019년 봄 존스 박사가 곧 퇴임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인터뷰했습니다. 오랫동안 한국 경제를 지켜본 외국 학자의 생각을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한국의 낮은 노동 생산성을 개선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3년의 시간이 흐르긴 했지만 여전히 그의 분석은 유효하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인터뷰 내용 중 지금도 의미가 있는 부분만 소개하겠습니다.
-한국이 소득주도 성장을 놓고 논란이 많다.
“이명박 정부의 녹색 성장, 박근혜 정부의 창조 경제처럼 어느 정권이나 경제 철학은 있다. 중요한 건 어떤 철학을 내세우든 경제 정책이란 모름지기 생산성을 높이는 데 목표를 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소득주도 성장도 생산성을 높이려는 노력과 병행할 필요가 있다. 소득주도 성장은 수요를 자극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지만 한국 정부가 낮은 생산성을 방치한 채 임금만 올리면 기대한 만큼 효과를 거두지 못할 것이다. 생산성이 낮은 상태로 머무르면서 최저 임금을 많이 올리면 (고용주의) 비용만 증가시켜 비효율을 키울 우려가 있다. 한국에서 임금에 민감한 제조업과 숙박·음식업의 고용이 줄어드는 추세가 뚜렷하다. 최저임금을 원만한(moderate) 속도로 올려야 경제 전반에 도움이 될 것이다.”
-한국의 생산성이 어느 정도길래 생산성 향상을 강조하는가.
“OECD가 회원국들과 비교해보면 한국의 노동 생산성은 매우 낮다. 2016년 기준으로 OECD 상위 절반의 회원국 평균치와 비교할 때 한국은 노동 투입량이 28.7% 많았다. 일을 하는 시간이 훨씬 길다는 것이다. 반면 노동 투입량 대비 결과물을 말하는 생산성은 46% 낮게 나왔다. 특히 대기업 생산성을 100으로 잡을 때 중소기업 생산성이 32에 불과하다. 중소기업 생산성이 대기업의 3분의1에도 못 미친다는 것이다. OECD 회원국 중 아일랜드, 그리스, 멕시코에 이어 넷째로 중소기업 생산성이 낮다.”
-그렇다면 생산성을 어떻게 해야 끌어올릴 수 있나.
“혁신 기업을 키워내 산업계에 새 바람을 불러일으켜야 한다. 기술 기업, 벤처 기업을 계속 육성해서 ‘차세대 삼성’을 키워야 한다. 중소기업들이 계속 대기업을 지향하게 만드는 쪽으로 정책 방향을 가져가야 한다. 한국에서는 중소기업에 주어지는 혜택과 지원이 많아서 현실에 안주하는 경우가 있다. 따라서 새로운 대기업이 등장하지 못하고 정체된 흐름을 보이는데, 이것을 과감히 깨뜨려야 한다. 새로운 기업을 키워내려면 규제를 대폭 낮출 필요도 있다. 한국에서 무인 자율주행 자동차를 개발하려는 업체들이 규제에 막혀 개발에 애를 먹고 있다고 들었다. 이런 신사업 도전을 가로막는 규제는 없애줘야 한다.”
-중소기업 생산성은 어떻게 끌어올릴 수 있나.
“한국은 전통적으로 수출형 제조업체인 대기업에 의존해서 성장해왔고 그에 따라 중소기업들이 서비스 업종을 맡아왔다. 그런데 전세계적으로 제조업이 저물고 서비스업 비중이 높아지고 있다. 따라서 한국은 제조업을 중심에 두던 관행에서 벗어나 과감하게 서비스업의 도약을 유도하기 위한 규제 완화에 역량을 집중할 필요가 있다. 서비스업이 제조업에 비해 규제에 의해 더 많이 좌우되는 특성이 있다. 규제를 줄여주는 게 자연스럽게 중소기업의 경쟁력을 키우는 길이다. 중소기업은 한국에서 고용의 77%를 차지하고 있다. 중소기업에 힘을 실어줘야 고용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또 서비스산업을 더 키워야 반도체와 스마트폰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는 효과도 얻을 수 있다.”
-규제 완화는 역대 정부가 늘 강조했지만 실행이 어려웠다.
“안전·보건과 관련한 규제는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경제 활동을 가로막는 규제는 제거해주는 것이 좋다. 규제는 그로 인해 이익을 보는 사람들이 있다. 따라서 없애기 쉽지 않기에 보다 과감한 결단이 필요하다. 한국은 자격증을 내걸어서 특정 분야에 진입이 어렵게 만드는 규제들이 있다. 그런 장벽을 하나 둘 낮출 필요가 있다. 법률 분야나 건축·인테리어 같은 분야의 규제를 좀 더 풀어야 한다. 한국 정부가 시도하는 규제 샌드박스는 괜찮은 아이디어다.”
-한국에서 노동 개혁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늘 나오는데.
“부실 기업을 정리하지 못하면 단기간 일자리는 유지될 지 몰라도 지속가능하지 않아 결국 손해를 가져온다. 일자리 자체를 중심에 놓지 말고 사람을 중심에 놓는 정책이 필요하다는 걸 강조하고 싶다. 또 임금을 연공서열이 아니라 직무에 따라 받을 수 있도록 근로 제도를 바꿔야 한다. 그래야 고령자들이 적은 임금을 받더라도 오래 일할 수 있고, 갈수록 늘어나는 고령자들의 은퇴 충격을 줄일 수 있다. 한국은 노인 빈곤율이 OECD에서 가장 높은 축에 속하는 나라다.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실현해서 근로자 간 격차를 해소할 필요도 있다. 또 일하는 여성을 위한 탁아 시설을 확충하는 데 더 투자해야 한다. 여성이 일할 수 있어야 나중에 아이가 일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접근해야 한다.”
◇조선시대 갓을 선물로 받고 30년 OECD 생활 마쳐
2019년 6월 12일 OECD에서는 존스 박사의 퇴임식이 열렸습니다. 그날은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유람선이 침몰해 한국인 25명이 숨진 사건을 2주일간 취재하고 막 파리로 돌아온 날이었는데요. 무척 피곤했지만 존스 박스와 마지막 인사를 하기 위해서 OECD에 갔습니다. 구리아 사무총장과 한국 대표부 관계자 등이 모여 성대한 파티를 열었습니다. 존스 박사의 가족들도 다 모였죠.
존스 박사에게 마지막으로 한국에 건네는 조언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여전히 한국은 정부 재정이 다른 OECD 국가들이 비해 견실하다. 다만 정부 지출은 한번 늘리면 다시 줄이기 어렵다는 점에서 신중할 필요는 있다. 교육 수준이 높아 훌륭한 인재가 많다는 점이 강점이다. 지능 검사 결과를 OECD 다른 회원국과 비교해보더라도 높게 나온다. 그동안 저력을 보여왔듯이 앞으로도 어려운 점이야 있겠지만 잘 이겨낼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존스 박사는 “미국에 가서도 계속 한국에 관심을 가질 것”이라고 했는데요. 약속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는 요즘 워싱턴DC에 살면서 존스홉킨스대에서 한국 경제와 관련한 강의를 하고 지낸다고 합니다. 역시나 많은 한국인 관료·학자들과 교류를 하고 소식을 주고 받으면서 지낸다고 합니다.
존스 박사는 저에게 “가족을 중시하고 조상을 모시는 한국 문화가 마음에 든다”고 했습니다. 그는 한국말을 기초적인 건 이해를 하고 읽을 줄 알지만 깊이 있는 말까지는 못하기 때문에 그와 대화할 때는 영어로 했습니다. 그는 한국말 단어를 간간히 영어 문장 안에 넣어서 이야기하는데요. 가장 인상 깊은 단어는 ‘장남’이었습니다. 존스 박사는 워싱턴DC에서 노부모를 봉양해야 한다고 했었는데요. 예전에 한국말로 “나도 장남이요”라고 한 적 있습니다.
존스 박사는 인생의 마지막 숙제가 있다고 말한 적 있습니다. 평양을 방문해서 북한 경제를 연구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소망이 이뤄지기를 기대합니다.
◇역대 두번째 OECD 한국경제담당관은 북유럽 전문가
존스 박사의 뒤를 이어서 OECD에서 역대 두번째 한국경제담당관이 된 사람은 프랑스 국적의 크리스토프 앙드레(55)씨입니다. 파리10대학(낭테르대)에서 경제학 학·석사를 마치고 민간 은행·보험사에서 7년간 근무한 뒤 1997년 OECD에 합류해 쭉 근무중입니다. 그는 스웨덴·핀란드를 10년 가까이 담당해 북유럽 경제에 밝은 사람입니다.
OECD는 선임이코노미스트에게 두 나라의 경제 분석을 맡기는데요. 존스 박사는 한국과 일본을 맡았는데 앙드레씨는 한국과 스웨덴을 맡게 됐습니다. 저는 앙드레씨를 코로나 사태가 터지기 직전에 만나 인터뷰했습니다. 그에게 왜 한국과 스웨덴 두 나라를 맡게 됐는지를 물어보니까 OECD에서 규모가 큰 경제와 작은 경제 하나씩 세트로 맡게 됐다는 설명이 나왔습니다. 앙드레씨가 “한국은 큰 경제권으로 분류되고 스웨덴은 작은 경제권”이라고 하니까 그 한마디에서도 어느새 한국의 위상이 높아졌다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앙드레씨를 만났을 때는 워낙 문재인 정부가 나랏빚을 많이 늘릴 때라서 주로 재정과 관련한 질문을 했습니다. 앙드레씨는 “한국은 단순히 ‘우리는 빚이 다른 나라에 비해 적으니까 (재정을) 더 써도 된다’고 하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면서 “한국이 구체적인 장기 계획 없이 단지 재정을 확대하기만 하면 경제 회복 효과는 적고 빚만 크게 늘어날 위험이 있다”고 했습니다.
당시 앙드레씨 이야기도 여전히 우리에게 유효합니다. 그는 “한국은 GDP(국내총생산) 대비 부채 규모가 적어 재정 건전성이 높다는 강점을 갖고 있으며, 여력이 된다면 경기 하강에 대응하기 위해 재정을 확대하는 것은 충분히 선택할 수 있는 방안”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앙드레씨는 “(정부가) 지출을 늘리면 재정 체계가 어디로 가는지 분명한 방향성을 갖고 있어야 하며 장기적이고 구체적인 재정 계획이 필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말에는 뉘앙스가 있는데요. 앙드레씨의 이런 말은 에둘러 표현한 것이지만, 당시 문재인 정부가 방향성 없이 그저 지출만 늘린다는 인상을 받고 있다는 의미가 있다고 느꼈습니다. 앙드레씨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정부가) 돈을 더 쓰게 되면 명목별로 단기 지출인지, 장기 지출인지 밝히고 그에 따라 재원은 어떻게 끌어올 수 있는지 등에 대한 계획이 있어야 하고 그에 대한 활발한 공개 토론이 필요하다. 한국이 장기적인 재정 지출 계획은 다소 부족한 것 아닌가 싶다. 많은 OECD 회원국이 정부로부터 독립된 재정 자문관들을 두고 가감 없는 조언을 듣는다는 점을 한국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홍콩에 근무할 때 한국에 와서 설악산 타던 앙드레
물론 앙드레씨는 “한국 경제가 강점이 꽤 많다”고도 했습니다. 인적 자원이 우수하고 반도체를 중심으로 기술 분야 제조업이 강하다는 것을 비롯해 교통·통신 등 기초 인프라가 훌륭하고 경제 구조가 현대적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존스 박사와 비슷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노동 생산성이 낮아서 문제라는 겁니다. 앙드레씨 이야기도 주의 깊게 들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이 예전보다 경제 성장률이 낮아지는 추세에 대비하려면 생산성을 끌어올려야 하며, 이것이 한국에는 중요한 도전 과제죠. 삼성전자와 같은 기술 중심 대기업은 생산성이 높지만 서비스 산업과 중소기업의 생산성이 낮아 불균형이 큽니다. OECD에서 상위 절반의 회원국 생산성 평균치와 비교했을 때 한국의 생산성은 그 절반에 그칠 정도로 낮습니다.”
여기서 스웨덴과 비교를 해달라고 했더니 앙드레씨는 “한국이 인적 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고 배치하는 데 약하다”고 지적했습니다. 특히 고령화에 맞서기 위해 고학력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을 끌어올리는 게 시급하다고 했고, 동시에 기술 혁신을 계속 밀어붙여 유망 분야에 일자리를 늘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도태되는 일자리에 연연해 하지 말라고 조언했습니다. 그러면서 멋들어진 말을 합니다. 앙드레씨는 “스웨덴과 같은 북유럽은 ‘직업은 보호하지 않고 사람을 보호한다’는 전략하에 직업 재교육을 체계적으로 실시해 사람들이 낡은 분야를 떠나 새로운 분야로 과감히 이동해 일하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앙드레씨 주장대로라면 우버나 타다에 밀리는 택시 사업을 억지로 보호하지 말고, 택시 기사들이 전업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는 의미죠. 저는 ‘직업은 보호하지 않고 사람을 보호한다’는 말을 소재로 특파원 컬럼을 쓰기도 했습니다.
앙드레씨는 프랑스 보험사의 홍콩법인에서 근무하던 1994년 여행차 한국을 처음 방문한 이후 한국의 매력에 빠졌다고 했습니다. 이후 서울에서 열리는 콘퍼런스에 참석하면 휴가를 며칠 붙여 설악산을 등산하고 박물관들을 둘러볼 정도로 ‘한국 마니아’가 됐습니다. 그가 “한국과 인연을 맺게 된 이상 오래 맡고 싶고 한국 경제가 더 발전하는 것도 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앙드레씨는 제가 로랑스 분 OECD 수석이코노미스트와 인터뷰를 할 수 있도록 다리를 놓아주기도 했습니다. 프랑스 국적의 로랑스 분은 프랑스 정부가 ‘제2의 크리스틴 라가르드’로 키우려고 밀어주는 여성 경제학자인데요. 워낙 만나기 어렵습니다.
제가 인터뷰 요청을 했더니 비서로부터 당장 비어 있는 스케줄이 없다면서 3개월 후에 다시 연락달라면서 그때도 인터뷰가 가능할지는 불확실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앙드레씨한테 상황 설명을 했더니 이후 사흘만에 로랑스 분으로부터 인터뷰를 하자는 연락이 왔습니다.
◇한국인 OECD 사무총장 탄생할 수 있나
요즘 OECD 내에서 한국의 위상은 상당합니다. 국제기구가 어디나 그렇듯이 OECD를 운영하는 분담금을 얼마나 내느냐에 따라 목소리 크기가 달라지는데요. 한국은 3.5%를 내서 OECD 내 7위 국가이구요. G7이 아닌 나라로는 가장 많은 수준의 분담금을 내는 회원국입니다.
하지만 인적 구성에서는 분담금을 내는 만큼 얻어내지는 못합니다. 2020년 기준으로 OECD 사무국 직원 중 한국인은 46명으로 전체의 1.2%에 그칩니다.
지난해 구리아 총장이 물러나면서 15년만에 OECD 사무총장이 바뀌게 되자 회원국간에 치열한 후임 사무총장 배출 경쟁이 벌어졌는데요. 모두 10개국이 출사표를 내서 호주 재무장관 출신 마티아스 코먼이 최종에서 비공개 투표를 거쳐 선출됐습니다.
당시 한국인 OECD 사무총장이 배출될 수 있는가에 대해 관심이 생겼는데요. 사실 쉽지 않습니다. 한국보다 덩치가 더 크고 OECD에서도 더 오랜 역사를 가진 일본도 사무총장을 배출하지 못했습니다. 자질과 관련해서도 적격 인물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OECD 사무총장을 하려면 ‘경제에 정통하다는 걸 보여주는 학위나 경험이 있고 장관급 이상의 경력을 갖추고 영어에 능통하며 불어로 상당한 수준의 대화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게 비공식적이지만 당연하게 여겨지는 기본 자격 요건이죠. 이런 요건에 해당되는 한국 사람은 한 명을 고르기도 어려운 게 사실입니다.
◇강경화 전 외교장관 ILO 사무총장 도전했다가 2표 얻는 데 그쳐
사실 구리아 총장이 물러날 때 문재인 정부 일각에서 강경화 전 외교부 장관이 도전해볼 수 있는 것 아니냐는 말이 나왔습니다. 하지만 강 전 장관은 위의 기본 요건에서 ‘경제’와 ‘불어’에서 미달입니다. 일부 외교부 직원들은 강 전 장관이 불어를 어느 정도 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공개 검증된 건 없습니다.
결정적으로 당시에 한국 정부는 유명희 전 통상교섭본부장을 세계무역기구(WTO) 사무총장에 당선시키기 위해 화력을 집중해야 할 때라서 OECD 사무총장에는 도전을 하지 않았습니다.
강 전 장관은 올해 초 국제노동기구(ILO) 사무총장에 도전했다가 쓴 맛을 봤습니다. 1차 투표는 통과했지만 2차 투표에서는 4명의 후보 가운데 토고 출신 질베르 웅보 국제농업개발기금(IFAD) 총재 30표, 뮈리엘 페니코 전 프랑스 노동부 장관 23표, 강 전 장관 2표, 남아공 후보 1표 이렇게 나와 웅보 총재가 선출됐습니다.
강 전 장관의 2표 중 한 표는 한국 몫이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실제로 단 1표를 끌어오는 데 그쳤습니다. 그만큼 국제기구 수장이 되기가 만만치 않습니다.
한국인이 약한 부분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불어가 생각보다는 큰 장벽입니다. 영어를 능통하게 하는 건 당연하고 불어도 어느 정도 요구됩니다. 유럽에서 국제기구는 브뤼셀, 제네바, 파리 3군데에 거의 다 몰려 있는데요. 이들 세 도시가 모두 불어를 쓰는 곳입니다. 국제기구들은 대체로 영어·불어를 공식 언어로 채택합니다. 강 전 장관이 고배를 마신 ILO는 제네바에 본부가 있고요. 강 전 장관이 고배를 마신 2차 투표에서 1, 2위 후보는 모두 불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상으로 파리에서 OECD의 한국경제담당관들을 만나 그들의 인생 스토리를 들었던 경험과 그들의 한국에 대한 애정을 들려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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