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80실버청년] '21학번 큰형' 팔순에 MT…"호기심이 나의 원동력"

오현지 기자 2022. 11. 13. 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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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 앞둔 제주한라대 관광일본어과 21학번 권무일씨
"장년층의 결과물은 언제나 근사…90살까지 글 쓸 것"

[편집자주] 대한민국은 오는 2026년 65세 이상 고령인구가 전체 20%를 차지하는 초고령 사회에 진입한다. 100세 이상 인구 역시 2020년 이미 5000명을 넘겼다. 칠순잔치도 옛말이 되고 있다. 현실로 다가온 초고령화 사회를 어떻게 맞을 것인가. 청년처럼 살고 있는 80~90대 현역들의 목소리를 들어봤다.

권무일씨가 지난 3일 제주한라대학교 관광일본어과 교실에서 뉴스1제주본부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22.11.12/뉴스1

(제주=뉴스1) 오현지 기자 = 새 출발의 기운이 넘실대던 지난해 3월 '두번째 스무살'을 시작한 80대 만학도의 대학 생활이 끝나간다.

서울대 철학과와 행정대학원을 졸업하고, 국내 굴지 대기업 임원을 거치며 30여 년간 산업역군으로 살아온 이 만학도의 재입학 소식은 많은 이들에게 희망이 되기도 했다.

제주한라대학교 관광일본어과 21학번 권무일씨(81) 이야기다.

권씨의 두번째 대학생활은 누구보다 치열했다. 입학 당시 히라가나를 한 글자도 몰라 난감했다는 늦깎이 신입생은 어느새 일본 논문과 신문을 읽고, 방송 뉴스를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갖추게 됐다.

지난 여름방학 때는 온라인 강의를 구매해 777개의 일어 문장을 노트에 끝없이 써 내려가며 암기했다. 그는 "원래 1000개가 목표였는데 노트가 모자랐다"며 웃었다.

나이 탓에 암기와 망각을 끊임없이 반복하며 지칠 법도 했지만 그는 결국엔 커지는 '눈사람'을 떠올리며 포기하지 않았다.

"나이를 먹으면 옛날 건 다 기억나도 새로운 건 자꾸 잊어버려요.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게 아니라 돌아서기 전에 잊어요. 그런데 눈사람 만들 때 조그만 눈덩이를 굴리면 처음엔 눈이 우수수 떨어지지만 끝내 커지잖아요. 그걸 믿은 거죠."

백내장 수술까지 받은 눈은 20분만 책을 봐도 금세 흐려졌지만, 확대경과 돋보기를 동원해가며 누구보다 수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수업 시작 2시간 전 학교 앞 카페에 도착해 예·복습을 하는 성실한 학생이기도 했다.

일본어 공부만 해도 벅찼을 2년간 그는 여러 건의 논문과 단편 소설을 써냈고, 잡지에 원고까지 게재했다.

권무일씨와 정예실 제주한라대학교 관광일본어과 학과장. 2022.11.12/뉴스1

그를 움직이게 한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사실 권씨는 제주에서 이미 잔뼈가 굵은 소설가이자 역사학자다. 은퇴 후 2004년 제주에 정착한 그는 '글쓰기'를 인생 2막의 주제로 여기고 책 집필에 몰두해왔다. 중국 진시황의 명으로 서귀포에 불로초를 캐러 왔던 서복 연구에 파고들어 제주서복회 고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내가 제주를 선택한 것이 아닌 제주가 나를 불렀다는 권씨는 김만덕, 헌마공신 김만일, 표류인 이방익 등 제주 위인을 재조명해 여러 권의 소설과 답사기를 펴냈다.

새로운 시작보다는 마무리에 익숙해지는 80세에 일본어를 처음부터 공부하겠다고 결심하게 된 것도 모두 배움에 대한 열정과 호기심 때문이었다.

"제주를 탐구하기 시작한 후부터 꿈이 탐라시대를 연구해서 책을 쓰겠다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공부를 하다 보니 김만덕, 김만일을 알게 되고, 이방익을 알게 되며 미뤄지게 됐죠. 탐라시대는 자료가 거의 없기 때문에 제주와 근접한 일본에는 탐라국 사료가 남아있을 거라 보고 일본어를 공부해야겠다고 마음먹게 됐습니다."

한자에 능통하고, 일본어 실력까지 갖추게 된 그는 졸업 후엔 일본 헌책방 거리를 돌며 탐라시대와 관련한 고서적을 찾아 나설 계획이다.

제주 해녀에 대한 역사적 탐구에도 관심이 있다는 그는 "90살까지 글을 쓰기로 했는데 남은 시간 동안 이걸 다 어떻게 할지 걱정"이라면서도 눈을 빛냈다.

무려 다섯바퀴 띠동갑, 60살 어린 20살 대학생들과 권씨의 '동행'은 서로를 성장시키는 시간이었다.

입학 후 처음 교실에 들어갈 때만 해도 '아이들이 어떻게 볼까'하고 쑥스러웠다는 그는 이제 학교식당의 긴 줄을 기다려 함께 밥을 먹는 '큰형'이 됐다.

손자 같은 학생들에게 훈계조의 말이 튀어나올 법도 하지만 밥을 함께 먹고도 "밥 맛있었니?"라는 질문만 던지는 수더분한 성격이다.

지난 5월에는 동기들과 함께 처음으로 1박2일 엠티도 다녀왔다. 동기들을 위해 엠티 후원금까지 쾌척했다. 여느 대학생처럼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동기들과 술잔도 나눈 시간이었다.

"잔소리는 일절 안 하지만 공부하겠다는 학생에게 의욕을 갖게 하는 일은 좀 했죠. 편입하겠다는 동기는 격려해주기도 했고요. 늘 했던 얘기는 우리나라는 물론 이 세계를 끌어갈 사람은 너희들이라는 것, 특히 한일 관계에 있어서는 너희들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 그 정도였죠."

모래바람이 거친 중동의 건설 현장에서 땀을 흘리고, 공장까지 운영했던 그는 30여 년을 밤낮없이 일했다. 말 그대로 대한민국을 지탱한 산업역군이었다.

그는 지난한 삶의 여정을 거쳐 온 장년층이 만들어내는 결과물은 근사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나이가 들어서도 탐구하는 사람이 많지 않지만 그런 사람들이 이뤄내는 성과는 상당히 크다고 생각해요. 작가가 됐건, 음악가나 예술가가 됐건 그 사람들이 뿜어내는 결과물은 참 좋은 것이 많아요. 그간 살아오며 쌓아온 것들의 결정체니까요."

권씨의 대학생활 내내 그를 지도해 온 정예실 학과장은 "선생님의 목표는 취업이 아닌 연구였고, 2년이라는 시간 동안 일어를 읽고 이해하는 능력을 충분히 키우셨다"며 "또 선생님이 계셔서 학생들의 인성적인 면에서 교육적인 효과도 정말 컸다. 선생님이 입학하며 원했던 능력을 얻어 가시는 것 같아 기쁘다"고 말했다.

ohoh@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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