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렌티노 여정 함께해 준 손예진, 화사...정말 좋아하는 사람들이 제 일의 증인이 돼 준다면 그것만큼 기쁜 일이 없다”

최보윤 기자 2022. 11. 12.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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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엘 파올로 피춀리 발렌티노 CD 등 인터뷰
카타르 도하M7 뮤지엄 ‘포에버 발렌티노’
발렌티노 역대 최대 규모, 중동 첫 전시
손예진, 화사 사진도 전시돼
카타르 도하에서 내년 4월 1일까지 열리는 ‘포에버 발렌티노’ 전시를 기획한 발렌티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피엘파올로 피촐리(맨 왼쪽부터)와 큐레이터 마시밀리아노 지오니, 저널리스트인 알렉산더 퓨리. 사진=Dave Benett & Getty Image /발렌티노 제공

“이곳은 우리 모두가 속하는 곳, 모든 것이 시작되는 곳입니다.” 발렌티노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피엘파올로 피춀리가 평소의 그 답게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마치 왈츠를 추는 듯 리듬을 실어 속삭이는 말투는 조형성을 지니면서도 깃털과 레이스 장식으로 공기마냥 가볍게 느껴지는 발렌티노 드레스같다.

피춀리가 서 있는 곳은 발렌티노가 탄생한 이탈리아 로마가 아니다. 2022 FIFA 월드컵 개최국으로 더 잘 알려진 중동의 예술 국가 카타르의 수도 도하의 중심부다. 그는 카타르 뮤지엄과 함께 기획한 전시 ‘포에버 발렌티노’를 선보이며 ‘카프리치오(capriccio)’에서 영감을 받은 정서적 극작법으로 전시를 구성했다. 카프리치오란 도시와 건축물의 이질적 풍경을 조합하고 마음 속에 존재하는 환상적인 풍경으로 재창조하는 18세기 예술 형식.

패션 디자이너이지만 가끔은 수도자나 철학자가 아닐까 할 정도로 각종 철학서적부터 시집 등을 꿰고 있는 그는 도하 한복판이지만 로마 스페인 계단에 온 듯하고, 로마 중심부로 이동시키는 것 같으면서도 중동의 열기를 느끼게끔 제품이 설치된 환경과 서사를 병치해 콜라주했다. 발렌티노 역대 최대 규모이자 중동에서의 첫 전시. 메종 발렌티노 설립자인 발렌티노 가라바니의 역사를 한 눈에 보는 오트 쿠튀르 컬렉션 속에 피춀리의 오트 쿠튀르 의상이 곳곳에 들어섰다.

1960년대 프랑스의 위베르 드 지방시, 크리스챤 디올, 이브생로랑 등 오트 쿠튀르가 꽃필 무렵 이탈리아가 낳은 유일한 쿠튀리에(고급 수제 맞춤복을 만드는 디자이너)로 불린 창립자의 역작은 발렌티노 가라바니가 은퇴하기 전 그와 함께 작업했던 후계자 피춀리를 통해 계승되고 재해석됐다. 발렌티노 가라바니와 그들의 직원들이 함께 찍은 사진을 그대로 재현했지만 단순한 복제가 아니라, 또다른 혼과 흥이 살아있었다. 피춀리가 항상 말하는 ‘사랑(love)’은 아름다움에 대한 그들의 믿음을 배신하지 않고 22세기를 내다보게 했다.

디지털과 Ai의 범람에 수작업은 사라질 것이란 공포 속에 인간적 유희와 애정이 넘쳐나는 직원들의 모습은 다음 세대까지 이어질 휴머니즘의 상징이었다. 발렌티노 가라바니가 상징적으로 쓰던 붉은 색은 마치 우리 몸을 흐르는 혈류처럼 생명력을 심었고, 피춀리가 최근 새롭게 선보인 핫핑크색인 핑크 PP는 뜨거운 심장처럼 보는 이를 두근거리게 했다. 세대와 세대의 만남이자, 다음 세대를 위해 ‘살아있음’을 증명한 자리였다. ‘불멸’이라는 단어가 존재의 유한함을 강조한다지만 ‘포에버’라는 수식어는 과거의 향수로 잊히는 대상이 아닌 ‘현재 진행형’임을 되새기게 했다.

발렌티노 가라바니의 90번째 생일에 맞춰 지난 7월 로마의 중심에서 베일을 벗은 발렌티노의 2022 가을/겨울 오트 쿠틔르 컬렉션과 같이, 이번 전시는 1959년부터 발렌티노의 보금자리였던 영원한 도시 로마에 온 듯한 배경에서 발렌티노의 역사를 방대한 파노라마 뷰로 볼 수 있도록 구성됐다. 200점이 넘는 발렌티노 오트 쿠튀르와 프레타 포르테 의상을 입은 라 로사(La Rosa)의 마네킹과 함께 액세서리도 전시됐다.

재클린 케네디가 선박왕 오나시스와의 재혼 당시 입었던 웨딩드레스에서부터 20세기 최고 미녀 배우로 꼽히는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드레스, 얼마 전 작고한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의상에서부터 최근 할리우드 스타들을 위해 디자인한 앙상블 등도 자리했다. 또 발렌티노의 오랜 고객이자 카타르 국왕모 쉐이카 모자 빈트 나세르의 개인 소장 의상까지 만나볼 수 있다.

이번 전시는 뉴욕 뉴 뮤지엄의 아티스틱 디렉터 마시밀리아노 지오니(이하 마)와 패션 비평가 겸 저술가 알렉산더 퓨리(이하 알)가 맡았으며 발렌티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피엘파올로 피춀리(이하 피)가 긴밀하게 협력했다. 이들 셋을 전시 개막 전에 미리 만났다. 그들은 “정말 놀랠 것”이라며 설렘을 감추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위 왼쪽부터) 발렌티노 전시 초대 게스트인 가수 재닛 잭슨. 사진=Getty Image. 슈퍼 모델 나오미 캠벨이 핑크 PP드레스를 입고 등장했다. 사진=Getty Image. 전시장에 선보인 다채로운 색감의 오트 쿠튀르 드레스들. 사진=Agostino Osio_Alto Piano (아래)카타르 도하 M7박물관에서 선보인 ‘포에버 발렌티노’의 하이라이트. 로마의 스페인 광장과 계단을 형상화한 곳에서 지난 7월 열린 오트 쿠튀르 쇼를 재현했다. 메종 발렌티노의 역사에 대한 경의의 표시다. 사진=Agostino Osio_Alto Piano

◇이것은 사랑의 이야기

-수많은 도시 중 카타르 도하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피: “도하는 다양성의 도시이자 새로운 아이디어에 대한 수용성이 매우 높은 곳이다. 지리적으로도 아시아와 유럽 중간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회고전이 아니라 발렌티노의 새로운 비전을 위한 관점(perspective)을 제시하는 장이다. 내가 감성적인 면에서 시각을 던졌다면, 마시밀리아노는 예술계에서 패션을 바라보는 과학자적 관점에서, 알렉산더는 정확성을 기술(記述)하는 이로서 면밀함으로 똘똘 뭉쳤다.”

-내가 만난 대다수 패션 디자이너들은 ‘꿈을 실현시켜 주기 위해서’ 혹은 ‘꿈을 실현하기 위해’ 디자인을 한다고들 한다. 극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한다는 뜻도 될 것이다. 그런데 유명 화가들의 예술작품과 달리 패션은 미술관 보다는 백화점이나 플래그십 스토어에 걸려있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피: “옷은 그림도 조각도 아니다. 예술은 우리를 위한 것이라고 할 때 패션은 몸을 위한 것이다. 예술과 패션은 그런 점에서 다르지만 상하 우위를 재단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서로 다른 관점일 뿐이다. 그림이 누군가에겐 자신을 말하는 도구가 되듯, 나에게 패션은 옷을 통해 표현하는 언어다. 내가 사랑을 이야기한다면, 이는 패션이라는 전세계 공용어로 번역되는 것이다.”

마 : “예술계 종사자인 저로서도 같은 생각이다. 사람들이 ‘패션 아트’라고 부르는 이유는 패션이 얼마나 대단한 예술이라고 생각하는지를 표현할 어휘가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산업디자이너 마크 뉴슨이 디자인한 의자 같은 것을 보면, 저는 항상 ‘훌륭한 디자인’이라고 말한다. 그 의자를 예술작품(아트)이라고 부르진 않을 것이다. 훌륭한 디자인이란 완성된 수식어가 있기 때문이다.

훌륭한 디자인, 휼륭한 예술, 훌륭한 패션을 가질 수 있다. 각자 나름의 중요성이 있다. 패션을 무조건 예술화 해야 되는 건 아니다. 이미 그 자체로 멋진 전시를 일구고 있다. 예술이 훌륭한 패션이라 불릴 필요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알: “아름다움을 말하는 건 일종의 힘이다. 남자들에게 기회가 주어졌을 때 아름다움이란 권력을 부여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었다. 여성스러운 드레스를 입은 남자를 보고 아름답다고 생각할 때, 이 부분이 잘못됐다고 다시 생각하기 어렵다. 여러분이 새로운 사고방식을 주도하고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아름다움은 그것이 도발적일 때, 사람들 사이의 거리를 만들어낸다. 그렇기 때문에 패션을 통해 경계 없는 아름다움을 느낀다면 어쩌면 자유 평등의 표식일 수 있다.”

메종 발렌티노를 창립한 발렌티노 가바라니의 상징인 붉은 색 드레스를 입은 마네킨 ‘라 로사(La Rosa)’. 전시회에서 처음 마주하는 장면으로, 메종 발렌티노의 로마 본사의 중정에 와 있는 듯 천장을 LED 하늘로 꾸몄고, 중심에도 대형 조각물을 배치했다. 도시와 건축물을 이질적으로 조합하고 환상적이고 몽환적인 모습을 배치한 카프리치오(capriccio) 방식을 차용해 발렌티노 가라바니 디자인과 피엘파올로 피치올리의 드레스를 함께 선보이며 세대간의 ‘대화’를 옷으로 보여주고 있다. 사진=Agostino Osio_Alto Piano

◇과거와 포용성(inclusivity)은 영원으로 가는 지름길

-붉은 색을 내세운 발렌티노 가라바니와 핑크 PP의 피춀리처럼, 색은 강렬하다. 단색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는 강인함을 말한다고 했다.

피: “16세기 붉은 색과 핑크 색은 가장 진보적인 사상과 의미를 지녔다. 특히 붉은 색은 염료를 구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비쌌고 그 결과 붉은 색을 쓴다는 건 권력에 가까웠다. 르네상스 시대 성모 마리아는 푸른 색 의상을 입었다. 실제 여부와 관련 없이 푸른 색이 고귀함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결국 색이란 일종의 관념이 됐다. 색상의 의미를 바꾼다는 것이 내겐 굉장히 흥미로운 작업이다.”

마: “나의 작업은 웨이터일 뿐 요리사가 아니다(웃음). 나의 창작물은 항상 다른 사람에게 의존한다. 어떤 의미에서 제 역할은 독자의 역할이다. 사람들은 제가 큐레이팅하는 사람의 작품을 보러 오지만, 내 작품을 보러오는 게 아니다. 그리고 그 색의 힘은 전시에서 극대화 된다. 이는 피춀리와 퓨리의 뛰어난 발상 덕이라고 생각한다. 첫번째 방을 지나면 빨간 색, 핑크색 방이 있지만, 아마 스페인 계단이 있는 스페인 광장의 방에 있으면 당신은 다양한 색상에 놀랄 것이다. 솔직히 핑크색으로 패션쇼를 한다는 건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작업이다. 이런 게 패션이다.”

-20세기를 풍미한 ‘살아있는 전설’과 함께 일했다는 건 요즘 브랜드를 대표하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에겐 극히 드문일이다. 대부분 작고한 뒤 그들의 명성을 잇고, 교체되기 일쑤다. 2008년부터 브랜드에 합류해 10년 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자리에 오르기까지 발렌티노 가라바니에게 많은 걸 배웠을 것 같다. 무엇을 배웠는가.

피 : “내 강박관념은 어쩌면 쿠튀르에 있었다. 발렌티노는 쿠튀르 하우스였고, 나는 액세서리(가방 디자인 등)에서 시작했다. 그런데 이제 나는 쿠튀르 하우스를 이끌고 있다. 이런 모순이 내게 수많은 가르침을 주었다. 미스터 발렌티노는 은퇴한 뒤 내 디자인에 관여하지도 않고, 그 어떤 판단도 내리지 않는다. 대신 격려의 말은 전달해 듣곤 했다. 모든 경험이 내겐 사랑이었다.”

-발렌티노를 대표하는 ‘디바’의 방엔 영국 여왕을 비롯해 국내 앰버서더인 손예진, 오트 쿠튀르 패션쇼에 참석했던 화사의 사진도 함께 했다. 국내 정세랑 작가도 참여해 화제가 되었던, 제품 대신 텍스트 기반으로 전개하는 발렌티노의 ‘내러티브 캠페인’의 올해 주제 역시 ‘사랑’이었는데, 이번 전시에서도 ‘LOVE ALWAYS’ 페이지를 펼쳐놓은 게 인상적이었다.

피 : “아름다움은 다양성에서 나온다. 사람들이 자주 하는 실수 중 하나는 사람들을 박스 안에 넣고 생각한다는 것(편견을 두고 재단하는 것)이다. 제가 만나고 마주한 모든 이들과 관계를 맺고, 같은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길 바랐다. 한국 배우든, 아티스트든, 작가든 그 누가 됐든 제가 정말 좋아하는 사람들이 제 일의 증인이 돼 준다면 그것만큼 기쁜 일이 없다. 모든 여정을 함께 해준 분들은 정말 훌륭한 이들이고, 전 세계에 그들의 열정을 공유하고 싶었다.”

-전시명에 ‘포에버’라고 붙어있지만 인간이 유한하듯, 솔직히 브랜드를 영원히 유지한다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다.

피: “맞는말이다. 누구도 영원할 수 없다. 영원을 알지 못한 채로 매일을 살아간다. 오늘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전시가 말하듯 과거를 현재의 일부로 받아들이기 위해서 과거를 축하하고 기리는 데 멈춰서는 안된다. 오늘은 어제를 반영하는 피사체가 된다. 과거를 통해 오늘을 읽고 내일을 예측하고 제시하는 것이다.”

마: “영원하다고 말하는 건 어쩌면 포용력있는(inclusive) 관점을 말하는 것일 수 있다. 발렌티노의 오트 쿠튀르는 매우 일부 극소수만 향유할 수 있는 배타적인(익스클루시브)한 제품이다. 그런데 그러한 아름다움을 전시를 통해 모두가 쉽게 공유할 수 있다. 직접 보면 더욱 놀라겠지만, 현장을 오지 못하더라도 영상과 설명으로도 설레는 감정을 느낄 수 있다. 일부 익스클루시브 제품 전시처럼 사람들을 밀어내는 게 아니다. 이런 포용성이 영원을 만든다고 생각한다.”

알: “전시 곳곳을 설명한 앱이 있지만, 때로는 전시를 볼 때 그런 설명없이 자신만의 느낌으로 충분히 감상하길 바란다. 전시 앞에선 누구도 옳고 그름이 없다. 정답이란 게 없다는 이야기다. 자신이 좋아하는 취향을 발견할 수도 있고, 스스로가 작품을 재해석하며 자신만의 미학을 세울 수도 있다. 때론 잔뜩 설명이 들어간 게 감상을 방해할 수도 있다. 아는 척이 전부는 아니란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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