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참사’가 남겨놓은 신발[MD칼럼]
[곽명동의 씨네톡]
신화에서 신발은 신분과 정체성의 표식이다. 이올코스 나라의 왕은 늙었고, 동생 펠리아스는 젊었다. 동생이 형을 쫓아내고 왕위에 오르자, 신하들은 5살 밖에 안된 왕세자 이아손을 펠리온 산으로 보냈다. 그곳에서 반인반마 켄타우로스인 케이론에게 무술을 연마한 이아손은 장성해 이올코스로 돌아오는 길에 강에서 신발 한짝을 잃는다. 그 나라에선 “모노산달로스(외짝 신 사나이)가 내려와 이올코스의 왕이 된다네”라는 동요가 울려 퍼졌다. 결국 이아손은 북쪽 나라 콜키스에서 황금빛 양의 털가죽을 갖고 돌아와 펠리아스를 몰아내고 왕위를 되찾는다.
아테나이의 왕 아이게우스는 트로이젠을 방문했다가 술을 마시고 공주 아이트라와 잠자리를 갖는다. 그는 무거운 섬돌 밑에 칼과 가죽신을 묻어놓고, 훗날 아들이 태어나면 신표를 갖고 자신을 찾아오라고 공주에게 일러둔다. 그 아들이 바로 테세우스다. 그는 16살의 나이에 섬돌을 들어 올리고 칼과 가죽신을 손에 쥔 채 아버지를 만난다. 동화 속 신데렐라 역시 유리구두 한 짝을 잃어버렸다. 왕자는 그 신발을 단서로 신데렐라를 찾았다. 신화학자 이윤기는 “잃어버린 신발을 찾아 길을 떠나야 하는 것은 아닌가?”라고 했다.
영화에서도 신발은 주인공의 정체성과 함께 심정을 드러낸다. 박찬욱 감독의 ‘박쥐’의 라스트신에서 태주(김옥빈)와 함께 한 줌의 재가 되어 사라진 뱀파이어 신부 상현(송강호)은 한 켤레의 구두를 떨어뜨린다. 그가 남겨놓은 구두는 태주와의 사랑을 상징하는 매개체다. ‘아가씨’에선 히데코(김민희)가 숙희(김태리)에게 신발을 신겨주며 인연이 시작됐다. 히데코는 마지막에 배 위에서 자신이 선물했던 숙희의 구두끈을 묶어주며 사랑을 확인한다. ‘헤어질 결심’의 해준(박해일)은 결말에 이르러 운동화 끈을 질끈 묶으며 서래(탕웨이)를 찾는다.
이태원 참사 이후 희생자들의 신발이 남았다. 경쟁과 불안의 한국사회에서 얼마나 열심히 살았으면 저렇게 닳고 헤졌을까. 흙이 묻고, 때가 타고, 뒷축이 굽히고, 몇몇 신발은 끈이 풀어졌다. 이 참혹한 사태를 두고 정부는 책임지는 자세를 보이지 않고 회피하려는 모습을 보여 공분을 자아냈다. 국가란 곧 국민인데, 그 국가는 국민을 보호하지 않았다. 아, 피지도 못한 청춘들이여! 그대들은 이력서(신발이 끌고온 역사) 한 줄 쓰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났구나. 살아남은 사람들이 그들을 추모하며 풀어진 신발끈을 묶어줘야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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