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우와 상어’ 죽음이 일렁이는 바다… 그가 응시하는 것은? [김한들의 그림 아로새기기]

2022. 11. 12. 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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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삶은 바다
바다 곁에 살면서 바다를 많이 그린
美 작가 윈즐로 호머의 작품세계는
때로는 가라앉고 때로는 요동치고…
자연·전장·노동·죽음과 삶에 천착
역동적 구성·붓질… 임박한 재난 표현
먼곳 보는 감정 감히 상상할 수 있게 해

#윈즐로 호머, 미국의 삽화가이자 예술가

서양 미술을 생각할 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문화 중심지가 파리에서 뉴욕으로 이동하기 전까지는 유럽의 미술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미국에서도 이전부터 활발한 미술 활동이 있었고 몇몇 작가들은 미술사에 남을 작품을 남겼다. 미국에서 미술은 1776년 독립 선언 이후 자기 역사와 정체성을 시각적으로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발전했다. 사회·역사적 배경에서 출발한 미국의 미술은 1820년 회화 중심의 교육을 한 허드슨 리버 스쿨(Hudson River School)이 탄생하며 변화를 맞았다. 역사적 인물을 초상화로 남기는 기록 중심에서 풍경의 아름다움에 감탄하고 표현하는 낭만주의 풍경화가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윈즐로 호머(Winslow Homer, 미국, 1836∼1910)는 이러한 변화의 시기에 해당하는 작가로 특히 바다 곁에 살며 바다를 많이 그렸다.
‘걸프 스트림(The Gulf Stream)’(1899, 1906 재제작)
호머는 1836년 보스턴에서 뉴잉글랜드 출신 부모 아래서 두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호머는 형제들 가운데 어머니와 남다른 관계를 형성하고 평생을 살았는데 그림이 그 매개였다. 수채화가로 활동한 어머니 헨리에타 벤슨 호머(Henrietta Benson Homer)는 그에게 예술적 재능을 물려주었으며 첫 스승이기도 했다. 호머는 어머니를 든든한 울타리로 두었지만, 아버지의 변덕과 불안한 사업은 가정과 성장에 어려움을 가져왔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곧바로 돈을 벌 수 있는 기술을 익힐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그림과 관련한 석판 기술을 사용하는 업체에 들어갔고 악보 표지 인쇄를 수년간 했다.

호머는 석판 위에 그림을 그리는 일로 만족하지 않았고 몇 년 뒤 독립해 삽화 스튜디오를 열었다. 보스턴 지역 매체에 보스턴과 뉴잉글랜드의 일상을 보여주는 생활 삽화를 기고했다. 목판화로 단순화한 형태, 빛과 어둠의 극적인 대조 등이 돋보이는 이미지를 만들어 선보였다. 목판화가 석판화보다 사실적 묘사가 어렵고 힘이 많이 든다는 점을 생각하면 예술적 시도를 펼친 것으로 보인다. 호머의 삽화는 높이 평가받았고 그는 단시간 안에 명성과 성공을 얻었다.

호머는 1859년 뉴욕에 진출, 10번가에 위치한 빌딩에 더 큰 규모의 스튜디오를 마련했다. 일하며 국립 디자인 아카데미(National Academy of Design)에서 바라던 회화 수업도 들었다. 그러던 가운데 그는 ‘하퍼스 위클리(Harper’s Weekly)’의 삽화 특파원으로 남북전쟁 한가운데 놓이게 되었다. 전쟁 초기부터 전장을 기록했는데 전쟁 막바지에 그린 ‘새로운 들판의 베테랑(The Veteran in a New Field)’(1865) 등에서는 전쟁의 영향과 의미에 대한 깊은 이해가 드러나기도 한다. 한 농부가 들판을 정리하는 모습을 그린 것인데 버려진 연합군 재킷을 통해 그가 전쟁에 참여한 베테랑임을 알게 하는 작품이다. 과거의 전장은 수풀이 뒤덮은 새로운 들판이 되었고 그것을 정리하는 베테랑의 뒷모습에서 전후 슬픔과 희망이 동시에 느껴진다.
‘새로운 들판의 베테랑(The Veteran in a New Field)’(1865)
전쟁이 끝난 후 호머의 작품 세계는 변화해 순수 예술로서의 회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과 평화롭던 때를 향한 향수를 담아 자연 풍경과 그 안의 인물을 담았다. 뉴욕 외곽의 인기 있는 해변 휴양지와 뉴햄프셔의 산맥 등을 방문하며 전과 다른 장면을 다루었다. 파리 만국박람회 참여를 위해 파리에 10개월 체류하면서 작업 방식 실험도 폈다. 파리 예술가들이 일본 우키요에(浮世繪)에 관심 두는 것을 보고 단순한 형태를 시도해보는 식이었다.

호머의 작품 세계는 두 번째 해외여행으로 영국 북해변의 마을 컬러코츠(Cullercoats)에 머물며 다시 한번 변화했다. 같은 바다이지만 해변 휴양지에서 보지 못했던 노동하는 어부와 어부를 기다리는 가족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노동과 삶, 죽음을 작품의 주제로 등장시키게 되었다.

#바다 곁에 살며 바다를 그리기

호머는 컬러코츠에서 미국으로 돌아온 이후 메인주의 프라우츠 넥(Prouts Neck)으로 이주했다. 나무로 지은 작은 스튜디오에서 여생을 보냈는데 집 뒤에는 고요한 숲 산책길이 있었고 조금 걸으면 바다가 파도치는 위치였다. 평화롭고 아름다운 호머의 스튜디오는 메인주를 여행하면 꼭 방문해보아야 하는 장소기도 하다. 그런데도 그의 마음은 전쟁과 노동의 흔적과 기억으로 때로는 가라앉고 때로는 요동치는 일을 반복했던 듯싶다. 호머는 여기서 고립과 침묵 속에 살며 영원한 자연과 덧없는 인간 삶의 관계를 죽을 때까지 그렸다.

‘걸프 스트림(The Gulf Stream)’(1899, 1906)은 자연과 인간 삶의 관계에 관한 숙고가 잘 드러난 작품 가운데 하나다. 여기 화면 속에는 어둡고 폭풍우 치는 바다가 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서 배가 파도에 출렁이는 중이다. 배는 사람 한 명이 겨우 누울 정도로 작고 약하다. 거기에 몸을 맡긴 이는 그저 먼 곳을 응시할 뿐이다. 방향 없는 어선에서 몇 줄기 사탕수수로 몸을 지탱하며. 배 주변에는 상어들이 헤엄친다. 죽음이 멀리 있지 않다.
‘조개 바구니(A Basket of Clams)’(1873). 해변가 마을에서 지내며 마을 사람들의 일상을 포착한 작품이다. 호머가 작업 초기에 주로 사용한 수채 물감 표현을 볼 수 있다.
작품명은 호머가 그리고 싶어 했던 지역들을 연결하는 강한 대서양의 해류 이름에서 비롯했다. 인종, 지정학 및 환경이라는 그의 관심사를 알게 하며 전쟁, 노예제도, 제국주의 등 사회·정치적 맥락에서 다양한 해석을 불러일으킨다. 동시에 작품은 자연, 인간, 세계, 삶 등 보편적 주제에 관해서도 생각하게 만든다. 누가 보아도 위험에 처한 그림 속 인물이 삶과 죽음에 관한 논의를 끌어오기 때문이다.

이 그림을 그릴 무렵 호머는 바하마에서 만류(灣流)를 건너는 경험을 여러 차례 했다. 그 경험이 인상적이어서 바다에서 나온 뒤 스케치와 수채화를 여러 점 남겼다. 스케치와 수채화들은 여기서 임박한 재난의 극적인 장면을 표현하는 데 사용되었다. 화면을 채우는 역동적인 구성과 붓질이 남긴 풍부한 질감은 밀려오고 밀려나는 파도를 물 덩어리처럼 느끼게 한다. 작품은 경험에 기반한 생생한 표현으로 재난과 죽음 앞에서 먼 곳을 응시할 수밖에 없는 이의 감정을 감히 상상하게 만든다.

캐나다의 사회·미디어 이론가인 브라이언 마수미(Brian Massumi)는 재난이 매체 또는 이미지를 거치면 하나의 스펙터클, 즉 볼거리가 된다는 내용을 말한 바 있다. 재난의 장면이 이미지가 되어 흩뿌려지면 어쩐지 처음의 충격과 슬픔은 휘발하고 볼거리가 되어 남는다. 이러한 측면에서 회화가 가진 단 하나라는 유일성과 거기서 오는 오라(aura)는 의미가 있다. 이태원에서와 같은 비극을 마주하면 그 어느 때보다 떠오르는 그림이 많고 이렇게 나누게 되는 이유다.

인생은 호머의 그림 속 바다와 같이 잔잔하거나 파도치거나 한다. 때로는 모든 것을 삼키고 거기서는 누구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니 재난에 의한 고통은 볼거리가 아니라 나의 일이다. 얼마 전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신간에서 다음과 같은 문장을 읽었다. “체호프가 러시아어로 ‘아, 인생이여’라고 할 때 우리는 한국어로 ‘아이고, 인생아’라고 한다. 불쌍해서, 죽일 수도 없을 만큼 불쌍해서.” 불쌍한 인생을 살면서 우리는 기댈 수밖에 없고 그건 사랑하는 일이다. 그림을 더 많이 함께 보고 더 많이 사랑하면서 살자고 그렇게 말하고 싶어졌다.

김한들 미술이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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