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우와 상어’ 죽음이 일렁이는 바다… 그가 응시하는 것은? [김한들의 그림 아로새기기]
바다 곁에 살면서 바다를 많이 그린
美 작가 윈즐로 호머의 작품세계는
때로는 가라앉고 때로는 요동치고…
자연·전장·노동·죽음과 삶에 천착
역동적 구성·붓질… 임박한 재난 표현
먼곳 보는 감정 감히 상상할 수 있게 해
#윈즐로 호머, 미국의 삽화가이자 예술가
호머는 석판 위에 그림을 그리는 일로 만족하지 않았고 몇 년 뒤 독립해 삽화 스튜디오를 열었다. 보스턴 지역 매체에 보스턴과 뉴잉글랜드의 일상을 보여주는 생활 삽화를 기고했다. 목판화로 단순화한 형태, 빛과 어둠의 극적인 대조 등이 돋보이는 이미지를 만들어 선보였다. 목판화가 석판화보다 사실적 묘사가 어렵고 힘이 많이 든다는 점을 생각하면 예술적 시도를 펼친 것으로 보인다. 호머의 삽화는 높이 평가받았고 그는 단시간 안에 명성과 성공을 얻었다.
호머의 작품 세계는 두 번째 해외여행으로 영국 북해변의 마을 컬러코츠(Cullercoats)에 머물며 다시 한번 변화했다. 같은 바다이지만 해변 휴양지에서 보지 못했던 노동하는 어부와 어부를 기다리는 가족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노동과 삶, 죽음을 작품의 주제로 등장시키게 되었다.
#바다 곁에 살며 바다를 그리기
호머는 컬러코츠에서 미국으로 돌아온 이후 메인주의 프라우츠 넥(Prouts Neck)으로 이주했다. 나무로 지은 작은 스튜디오에서 여생을 보냈는데 집 뒤에는 고요한 숲 산책길이 있었고 조금 걸으면 바다가 파도치는 위치였다. 평화롭고 아름다운 호머의 스튜디오는 메인주를 여행하면 꼭 방문해보아야 하는 장소기도 하다. 그런데도 그의 마음은 전쟁과 노동의 흔적과 기억으로 때로는 가라앉고 때로는 요동치는 일을 반복했던 듯싶다. 호머는 여기서 고립과 침묵 속에 살며 영원한 자연과 덧없는 인간 삶의 관계를 죽을 때까지 그렸다.
이 그림을 그릴 무렵 호머는 바하마에서 만류(灣流)를 건너는 경험을 여러 차례 했다. 그 경험이 인상적이어서 바다에서 나온 뒤 스케치와 수채화를 여러 점 남겼다. 스케치와 수채화들은 여기서 임박한 재난의 극적인 장면을 표현하는 데 사용되었다. 화면을 채우는 역동적인 구성과 붓질이 남긴 풍부한 질감은 밀려오고 밀려나는 파도를 물 덩어리처럼 느끼게 한다. 작품은 경험에 기반한 생생한 표현으로 재난과 죽음 앞에서 먼 곳을 응시할 수밖에 없는 이의 감정을 감히 상상하게 만든다.
캐나다의 사회·미디어 이론가인 브라이언 마수미(Brian Massumi)는 재난이 매체 또는 이미지를 거치면 하나의 스펙터클, 즉 볼거리가 된다는 내용을 말한 바 있다. 재난의 장면이 이미지가 되어 흩뿌려지면 어쩐지 처음의 충격과 슬픔은 휘발하고 볼거리가 되어 남는다. 이러한 측면에서 회화가 가진 단 하나라는 유일성과 거기서 오는 오라(aura)는 의미가 있다. 이태원에서와 같은 비극을 마주하면 그 어느 때보다 떠오르는 그림이 많고 이렇게 나누게 되는 이유다.
인생은 호머의 그림 속 바다와 같이 잔잔하거나 파도치거나 한다. 때로는 모든 것을 삼키고 거기서는 누구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니 재난에 의한 고통은 볼거리가 아니라 나의 일이다. 얼마 전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신간에서 다음과 같은 문장을 읽었다. “체호프가 러시아어로 ‘아, 인생이여’라고 할 때 우리는 한국어로 ‘아이고, 인생아’라고 한다. 불쌍해서, 죽일 수도 없을 만큼 불쌍해서.” 불쌍한 인생을 살면서 우리는 기댈 수밖에 없고 그건 사랑하는 일이다. 그림을 더 많이 함께 보고 더 많이 사랑하면서 살자고 그렇게 말하고 싶어졌다.
김한들 미술이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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