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큼하지만 다채로운 매력 ‘제우스의 피’ [전형민의 와인프릭]
◆ 전형민의 와인프릭 ◆
<검은 수탉이 검증한 ‘키안티 클라시코’>에서 이어집니다.
키안티 클라시코는 수백년간 두루 사랑받은 와인이지만, 특유의 찌르는듯한 산도 때문에 와린이들에게 마시기 편한 와인으로 구분되지는 않습니다. 역설적이게도 매니아 사이에서는 엄청난 산도와 특유의 강렬한 향신료 뉘앙스 때문에 오히려 사랑받는 와인이기도 합니다.
키안티 클라시코 특유의 캐릭터는 양조에 주로 쓰이는 포도 품종, ‘산지오베제(Sangiovese)’의 특성에서 비롯됩니다. 산지오베제는 라틴어로 ‘제우스의 피(Sanguis Jovis)’에서 유래했다는 게 정설인데요. 이 품종으로 빚은 와인은 다채로운 과실향과 함께 산도까지 높아서 입에 털어넣으면 ‘묘한 향과 강렬한 시큼함이 느껴지는 게 마치 신화 속 제우스의 피가 이러지 않았을까’라고 해서 이름이 지어졌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느낌만이 아닙니다. 산도가 어찌나 높았는지, 16세기 이탈리아의 저명한 농학자였던 지오반베토리오 소데리니(Giovanvettorio Soderini)도 자신의 저서에 “산지오게토(산지오베제의 과거 이름으로 추정) 품종으로는 아주 좋은 와인을 만들지만, 양조자가 주의하지 않으면 식초로 변할 위험이 있다”고 썼습니다.
하지만 높은 산도는 요리와의 조합에서는 오히려 장점이 되기도 합니다. 산도가 높은 덕분에 올리브유가 기본적으로 들어가는 이탈리아 요리는 물론 대부분의 서양 요리에 두루 잘 어울립니다. 산도가 기름진 느낌을 중화시켜주고, 반대로 기름이 찌르는듯한 산도를 잡아주는 상호보완작용이 입속에서 맛과 향을 끌어올려주는 셈입니다.
키안티 클라시코는 오랜 역사와 꾸준한 인기에 걸맞게 수많은 양조자들이 있습니다. 수백년씩 가업을 이어온 와이너리도 다양합니다. 하지만 현대에는 과거처럼 산지오베제 100%로 양조하는 와이너리보다는 다른 품종을 조금 섞는 방식이 대세입니다. 위에서 설명했듯 전통의 방식대로 100% 산지오베제로 빚은 와인은 대체로 와린이에게 친절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키안티 클라시코 협회는 100%가 아닌 80%의 산지오베제와 20%의 규정 품종을 블렌딩해 양조하는 경우에도 키안티 클라시코로 인정합니다.
또 고급화를 통한 등급의 차이도 두고 있습니다. 키안티 클라시코는 양조 후 최소 12개월 오크통 숙성기간을 반드시 거쳐야합니다. 그러나 그 윗등급인 키안티 클라시코 레제르바(reserva)는 2배인 최소 24개월을, 최고 등급인 그랑 셀레지오네(gran selezione)는 최소 30개월 숙성을 거쳐야하죠. 오크통 숙성을 오래 거친 만큼 특유의 산도가 정돈되고 중후하고 묵직한 뉘앙스가 좀 더 발달하게 됩니다만, 와인의 세계에서 시간은 곧 돈인 만큼 등급이 올라갈수록 가격은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진다는 점은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세계에서 사랑받는 다양한 키안티 클라시코 와인들을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대형마트 와인코너나 길가다 보이는 로드샵에서도 ‘검은 수탉’은 쉽게 찾을 수 있는데요.
혹시 조금은 특이한, 초상화가 그려진 레이블의 키안티 클라시코 와인이 보인다면 한번쯤 도전해보시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바로 이탈리아의 위대한 탐험가 베라짜노의 초상화를 레이블로 내건 ‘카스텔로 디 베라짜노(Castello Di Verrazzano) 키안티 클라시코’ 입니다.
우선 병목에 붙은 ‘검은 수탉’이 눈에 띕니다. 마치 손흥민 선수가 뛰는 토트넘 훗스퍼의 엠블럼을 닮은모습인데요 바로 키안티 클라시코의 상징이죠. 다른 와인과는 좀 다른 초상화 레이블도 인상적입니다. 초상화의 인물은 누굴까요? 베라짜노 가문의 탐험가인 지오반니(Giovanni di Verrazzano)의 초상화입니다. 베라짜노 가문은 오랜 기간 키안티에 영지와 함께 포도원을 갖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키안티 클라시코 지역에서 포도원을 운영하면서 오래된 자신들의 성을 호텔로 개조해 와이너리 투어를 제공하면서 와인러버들의 사랑을 받고 있죠.
베라짜노 가문은 왜 일반적인 레이블이 아닌 왜 지오반니 디 베라짜노의 초상화를 레이블로 쓸까요? 거기엔 위대한 탐험가였던 조상에 대한 자부심이 담겨있습니다. 15세기 이 가문에서 태어난 지오반니 디 베라짜노는 프랑스 왕의 원조로 대서양을 건너는 신대륙 탐험에 나섰고, 1524년 뉴욕을 처음으로 발견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이 위대한 발견에 그치지 않고, 5년 후 남미를 탐험하다 식인종에게 잡혀 죽임을 당했습니다. 말 그대로 ‘Never Stop Exploring’인 셈입니다.
실제로 뉴욕시에는 베라짜노의 도전과 탐험 정신을 기린 베라짜노 다리(Verrazzano Narrows Bridge)가 세워져 있습니다. 뉴요커들은 매년 열리는 뉴욕 마라톤 대회를 이 다리에서 시작하죠. 이 때문에 베라짜노 와인은 전인미답의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나, 도전·모험을 축하하는 자리에 가져가 앞으로의 길을 축복하기 좋은 와인으로 통합니다.
베라짜노의 맛은 어떨까요. 우선 키안티 클라시코답게 검붉은 루비색을 띄는 외관에 코르크를 뽑자마자 병 밖으로 퍼져나오는 과실향의 기세가 좋습니다. 체리, 딸기, 붉은 자두 등 비교적 가벼운 느낌의 붉은 과실 아로마(향)가 느껴집니다. 하지만 지배적인 아로마는 알싸하면서도 묘한 육두구(넛맥)로군요. 반면 상대적으로 오크통 숙성을 통해 얻어지는 향은 인상적이지 않았습니다. 희미하지만 산지오베제의 주요 캐릭터중 하나인 흙내음도 느껴집니다.
입에서는 어떨까요? 산지오베제 품종의 특성인 산도가 향처럼 튀지 않습니다. 짱짱한 느낌은 여전하지만 살짝 누그러진 느낌이지요. 아마도 오크통 숙성을 통해 말산이 젖산으로 전환됐기 때문이겠죠. 극성을 부리던 산도가 누그러드니 딸기와 같은 붉은 과실의 풍미가 더 살아납니다. 다만 아직 숙성이 더 필요했을까요? 타닌은 상대적으로 거칠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함께할 음식으로는 이탈리아 음식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토마토 베이스의 음식을 준비했습니다. 루꼴라와 프로슈토를 올린 화덕피자, 그리고 볼로네제 파스타입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키안티 클라시코와 토마토 베이스 음식의 조화는 훌륭했습니다. 특히 갈아넣은 소고기가 흐뭇하게 씹히는 볼로네제 파스타와의 조합이 아주 만족스럽습니다. 볼로네제 특유의 소고기를 갈아넣은 토마토 소스가 키안티 클라시코의 튀는 산도를 잘 잡아주고, 조화를 이룹니다. 상대적으로 화덕피자의 프로슈토와 루꼴라는 꺼끌한 타닌감을 부각시키는 느낌입니다.
사실 키안티 클라시코 와인과 이탈리아 음식, 특히 토마토 소스가 기본이 되는 음식과의 조합은 수백년간 검증된 최고의 조합입니다. 일종의 성공보증수표, ‘치트키’인 셈이죠. 앞서 잠깐 얘기했습니다만, 모든 와인은 생산지의 음식과 잘 어울립니다. 수백년간 양조되고 음용돼 내려오면서 그 지역의 음식과 궁합이 맞춰지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도 세계 각지에서는 수백만명의 와인러버들이 새로운 조합을 도전하고 또 찾아내고 있습니다. 와인은 그렇게 인류 역사와 함께 천년이 넘는 세월을 끊임없이 발전해온 매력적인 음료입니다.
이탈리아의 와인을 꼽으면 빠지지 않는 와인, 수백년 간 전세계인의 사랑을 받아온 키안티 클라시코에 대한 이야기가 끝났습니다. 어떠셨나요? 와인에 조금 더 가까워지셨나요? 이번 주말에는 간단한 볼로네제 파스타와 이탈리아식 도우가 얇은 화덕피자, 그리고 병에 ‘검은 수탉’이 그려진 키안티 클라시코 한 잔을 즐겨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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