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아이브! ‘아이 윌 서바이브’의 생존력

한겨레 2022. 11. 12.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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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익의 노래로 보는 세상][이재익의 노래로 보는 세상] 글로리아 게이너 ‘아이 윌 서바이브’
글로리아 게이너. 공식누리집 갈무리

아이브의 ‘애프터 라이크’가 올해 최고의 히트곡으로 기록될지는 모르겠다. 올가을로 한정한다면 확실히 그렇다. 12개의 음악방송에서 1위를 차지하면서 12관왕 타이틀을 확보했으니. 이 노래는 글로리아 게이너가 부른 디스코의 고전 ‘아이 윌 서바이브’의 간주 부분을 샘플링했는데, 이 노래가 오늘 칼럼의 주인공이다. 먼저 가사를 보자.

‘집에 들어왔더니 네가 우울한 얼굴로 앉아 있네/ 빌어먹을 자물쇠를 바꿔야 했는데/ 어서 나가, 문 열고 나가/ 열쇠는 두고 가라고 할걸/ 다시 와서 날 귀찮게 하지 않도록’

남자친구에게 화끈하게 이별을 선포하고 씩씩하게 새 출발을 다짐하는 여자의 선언이다. 1978년에 발표된 이 노래는 타이틀곡이 아니었다. 레코드판으로 앨범을 듣던 그 시절, 타이틀 한 곡만 담은 싱글 레코드를 따로 발매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싱글 레코드 뒷면에는 서비스 차원에서 ‘비(B) 사이드’ 노래를 수록했는데, 이 노래도 뒷면에 있던 노래였다. 주머니 속 송곳이 결국 뚫고 나오듯, 이 노래는 입소문을 타고 인기를 얻어 결국 빌보드 차트 1위를 차지한다. 노래의 운명은 제목 따라 정해진다는(‘서바이브’라는 단어는 ‘생존’이라는 뜻도 있지만 누구보다 오래 살아남는다는 뜻도 있다) 업계 속설을 증명해낸 것이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이 노래는 잊을 만하면 부활해 우리 앞에 나타났다. 1997년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수 진주가 ‘난 괜찮아’라는, 제목부터 가사까지 원곡과 비슷한 번안곡으로 다시 불렀다. 내지르는 고음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편곡이 된 진주의 노래는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몇년 뒤, 영국의 국민가수 로비 윌리엄스도 ‘슈프림’이라는 곡에 이 노래를 되살렸다. 진주와 달리 로비 윌리엄스는 간주 부분을 샘플링했는데,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다. 씩씩하고 신나는 디스코의 흔적은 사라지고 장중한 분위기의 명곡이 탄생했다.

아이브. 유튜브 갈무리

그로부터 또 20여년 뒤, 신예 걸그룹 아이브를 통해 이 노래는 또 부활했다. 이번에도 간주 부분만 삽입되었는데, 통통 튀는 케이(K)팝에 완벽하게 녹아들었다. 그런데 가사 내용이 원곡과 정반대. 지긋지긋해진 남자친구를 내쫓는 여자가 아니라 막 사랑에 빠진 소녀의 설렘을 노래한다. 제목부터가 그렇다. 남녀 사이에 좋아하는 단계 다음을 의미하는 ‘애프터 라이크’. 이쯤 되면 ‘아이 윌 서바이브’의 생존 능력은 어떤 장르 어떤 가사로도 부활할 수 있는, 거의 곰벌레급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노래만 그런 게 아니다. 1949년생인 가수 글로리아 게이너 역시 아직도 건재하다. 우리나라 제야의 종 타종 행사처럼 미국도 신년맞이 행사를 한다. ‘타임스스퀘어 볼 드롭’이 대표적인데, 뉴욕 맨해튼 빌딩 꼭대기에서 수만개의 조명을 단 대형 크리스털 볼을 천천히 하강시키며 축하 공연을 펼친다. 매년 100만명의 인파가 모이는 이 무대에는 당연히 최고의 가수가 초청된다. 2020년 새해 첫 순간에는 방탄소년단이 있었고, 작년 2021년 새해 축하 공연의 주인공이 바로 글로리아 게이너였다. 그는 70대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가창력을 과시하며 ‘아이 윌 서바이브’를 불렀고 사람들은 감탄했다. “워, 글로리아 게이너 쏴라있네!”

올해 새해맞이 볼 드롭 행사의 초대 가수가 누군지 찾아보다가 씁쓸한 기사가 눈에 띄었다. 매년 100만명의 인파가 몰리는데도 인명사고가 나지 않는 뉴욕 볼 드롭 행사의 관리 시스템을 분석한 기사였다. 미국의 위기관리 주무 부처인 연방재난관리청(FEMA)에서 만든 지침 덕분이라고. 무려 222쪽 분량의 이 지침서는 경찰과 소방관을 포함한 미국 전역의 안전 관련 공무원들이 숙지한다고 한다. 이미 늦었지만, 우리도 이런 시스템을 만들어야겠다.

실연의 아픔을 딛고 새 인생을 살겠다는 노래가 요즘 대한민국에서는 다른 의미로 들릴 수도 있겠다. 잊을 만하면 반복되는 대형 참사에서 살아남겠다는 우리 국민의 슬픈 다짐 같기도 하다. 생존을 걱정하며 한강 다리를 건너고, 백화점에 가고, 수학여행을 떠나고, 축제를 즐겨야 한다니. 다시는 이런 일이 없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조금이나마 희망적으로 글을 마무리하기 위해, 매몰된 광산에서 열흘을 버티다 살아나온 광부들에게 축하와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건강을 완전히 회복하고 퇴원하셨다니 더욱 기쁘다. 믹스커피 한잔 타 마시면서 글로리아 게이너의 노래를 다시 들어봐야겠다. 오늘도, 아이 윌 서바이브!

에스비에스 라디오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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