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말(馬) 위령비가 문화재될 뻔한 사연은?" [한판승부]
조선의 한성 도읍 선정 과정에 풍수지리 없었다
일본군 마을 위령탑이 조선 왕실 제단으로 오인받아
경희궁, 일제 총독부가 없앤 거 아냐
정조에 대한 오해. 통합형 학자 아니었다 광화문>
■ 진행 : 박재홍 아나운서
■ 패널 : 진중권 작가, 김성회 소장
■ 대담 : 조선일보 박종인 기자 (<광화문 괴담> 저자)
▶ 알립니다 |
*인터뷰를 인용보도할 때는 프로그램명 'CBS라디오 <박재홍의 한판승부>'를 정확히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저작권은 CBS에 있습니다. *아래 텍스트는 실제 방송 내용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보다 정확한 내용은 방송으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
◇ 박재홍> CBS 라디오 박재홍의 한판승부 함께하고 계십니다. 2부 오늘 역사 저널리즘 시간이라 말씀드렸는데요. 역사 우리가 제대로 알고 있다 생각했는데 그것이 또 사실이 아닌 경우가 있어서 그러한 사례들 모아서 책을 내신 분이 있습니다. 광화문 괴담이라는 제목의 책을 내셨어요. 조선일보 박종인 기자를 모셨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기자님.
◆ 박종인> 안녕하십니까?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 박재홍> 진 작가님, 김 소장님 인사 나누시고요.
◆ 김성회> 안녕하세요.
◆ 진중권> 안녕하세요.
◆ 박종인> 안녕하세요.
◇ 박재홍> 책을 쓰셨는데 저는 괴담이라고 해서 무슨 귀신 얘기, 무서운 얘기하시는 줄 알았는데 역사 얘기였어요.
◆ 박종인> 맞습니다. 제목을 고민했습니다. 분류가 어떻게 될까 했는데 다행히 역사로 분류해 주셨습니다.
◇ 박재홍> 우리 기자님이 92년도에 조선일보에 입사하시고 30년째 일을 하고 계시죠. 일주일에 7일을 일을 하신다면서요?
◆ 박종인> 그렇게 됐습니다. 능력이 안 돼서.
◇ 박재홍> 거짓말.
◆ 박종인> 그러니까 이게 일이 놀이처럼 돼버렸어요.
◇ 박재홍> 그러세요.
◆ 박종인> 행복한 주말 이런 게 없고 주말에 나오는 게 좋습니다.
◇ 박재홍> 그래요. 2013년에 편집국에 여행문화 전문가로 일하시다가 2016년부터 박종인의 땅의 역사라는.
◆ 박종인> 땅의 역사.
◇ 박재홍> 땅의 역사를 연재하고 계시고 지금 과정에 계속 계시는군요. 그러니까 그 코너도 보신 분들 많이 계시겠네요, 애청자 여러분 중에.
◆ 박종인> 꽤 많이 있습니다.
◆ 진중권> 그동안 우리가 상식으로 여겨왔던 것들.
◇ 박재홍> 진 작가님 마이크를 가까이 중간에.
◆ 진중권> 역사적 근거가 없거나 왜곡된 사례들을 모아서 책을 내신 거지 않습니까? 구체적인 계기가 있었을 것 같아요. 이건 안 되겠다라고 마음을 먹게 된 계기가 뭐였는지 궁금합니다.
◆ 박종인> 사실은 제가 땅의 역사라는 걸 쓰기 전에는 여행기자였거든요.
◇ 박재홍> 그렇죠.
◆ 박종인> 그러니까 90년대 여행기자면 솔직하게 얘기해서 지금만큼 충실하게 취재를 안 해도 됐었어요.
◆ 진중권> 놀러 가죠.
◆ 박종인> 좋은 데 가서 사진 찍고 좋은 이야기 듣고 좋은 사람 만나고 그랬는데.
◆ 진중권> 맛있는 거 먹고.
◆ 박종인> 나중에 20년 지나서 제가 갔던 예를 가보니까 제가 그때 철석같이 믿었던 것들이 다 거짓말들이었어요. 그러니까 그때 예를 들어서 한강의 최고 발원지가 검룡소라고 태백에 있거든요. 검룡소에 까만 용이 살았다. 이런 얘기를 들어서 썼거든요. 그런데 알고 봤더니 이게 거기 있는 향토사학자 한 분이 태백시가 너무 졸악해서 그걸 스토리텔러 만든 거였어요. 그래서 지금 90년대 태백 검룡소를 검색을 하시면 다 전설이 수백 년 된 걸로 나옵니다, 기사들이.
◆ 진중권> 실제로 수십 년 된 거.
◆ 김성회> 과학자가 아니라 소설가셨군요.
◆ 박종인> 그렇죠. 그러니까 그렇죠. 그런.
◆ 진중권> 문화콘텐츠를 창조하신 거네요.
◆ 박종인> 반성이 들고. 그러니까 옛날에는 기자라는 직업이 주로 인터뷰 위주로 취재를 했었는데 1차 사료를 보자. 그래야지 뭔가 팩트가 나오겠다라는 생각이 들어서 땅의 역사라는 걸 연재를 하면서 진짜 되도 않게 1차 사료를 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제가 알았던 게 완전히 거짓이고 조작됐던 게 계속 튀어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그중에서 대중이 그렇게 알고 있는데 그게 생각보다 심각한 이야기들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술자리에서 먹고 넘어가는 그런 재미난 얘기면 그냥 웃고 넘어가는데 그런데 이게 우리 지금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좌지우지하는 그런 가짜 역사 뉴스들이 있으면 그건 바로잡아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어서 제가 쭉 땅의 역사 쓰면서 검수했습니다.
◆ 진중권> 검룡소 같은 경우는 저는 이해가 되거든요. 모든 대부분의 전설이 언젠가는 역사에 어느 순간에 언젠가는 그렇게 만들어졌을 거다. 이걸 너무 늦게, 그게 문제고. 실제로는 괴담들이라는 게 뭐랑 연결돼 있냐면 정치적인 의도랑 연결돼 있어서 그러면 사실 이게 이념화되잖아요.
◆ 박종인> 맞습니다.
◆ 진중권> 이데올로기가 돼서 이야기가 만들어지면서 이제 왜곡된 게 많고 특히 우리나라 같은 경우 민족. 민족주의 사관에 의해서 이게 대중한테 가는 가운데 통속화되고 하면서 거짓말이 보태지고 하면서 허구가 사실 굳어진 경우가 많은 거잖아요.
◆ 박종인> 맞습니다. 그런 얘기들. 여기 17꼭지의 이야기를 다뤘는데.
◇ 박재홍> 이 책입니다. 광화문 괴담.
◆ 박종인> 그게 대부분 근대의 일본과 관련해서 모든 이야기들. 예를 들어서 우리 대한민국 내지는 조선이나 대한제국 때 벌어졌던 흉악하고 부정적인 일들이 모두 일본에 미뤄버려서.
◇ 박재홍> 일본 탓이다.
◆ 박종인> 명쾌하게 해결해 버리는. 그런 일들이 많이 있거든요.
◇ 박재홍> 그렇군요.
◆ 박종인> 그걸 뒤집어서 알고 봤더니 그게 아니더라.
◆ 김성회> 저는 읽었던 대목 중에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조선의 한성 도읍 선정 과정에 풍수지리가 들어가 있지 않았다. 그건 말 그대로 실무적이고 실용적인 측면에서 강 가깝고 도로 높이 좋고 평평한 데다가 했다는 이야기가 저는 사실 충격적이었어요. 그럴 수도 있구나라는 생각이 그걸 읽고 나니 갑자기 눈이 떠진 기분이었어요.
◆ 박종인> 그러니까 그게 괴담이라는 걸 일반 대중은 그 고문헌이나 아니면 옛 기록에 대한 접근성이 어렵지 않습니까?
◇ 박재홍> 그렇죠.
◆ 박종인> 그렇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를 듣는 매체가 바로 전문가들인데 이 전문가들조차도 고문을 뒤지지 않았었어요.
◇ 박재홍> 검색만 합니다.
◆ 박종인> 인터넷을 뒤진 겁니다.
◇ 박재홍> 인터넷 검색만.
◆ 박종인> 그러다 보니까 실록이나 여러 기록을 보면 지금 소장님 말씀 잘하셨어요. 한양이라는 데를 어떻게 도읍을 천도를 했느냐.
◇ 박재홍> 지금 유튜브로 나오고 있습니다.
◆ 박종인> 맞습니다.
◇ 박재홍> 천하제일 복지. 천하에서 제일 좋은 복 받은 땅이다. 이게 어디 있는 겁니까?
◆ 박종인> 저건 청와대 뒷산에 있는 겁니다.
◆ 진중권> 최근에 쓴 것 같은데요, 뭔가.
◆ 박종인> 저거는 한양 천도사랑 관계되는 건데 저게 노태우 대통령 때 발견이 됐다라고 발표했었거든요. 92년에. 그러면서 이제 그때 총독 관저로 쓰던 옛날 청와대 본관을 이전을 하면서 여기가 그래도 좋은 데다라고 기사들을 많이 썼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제가 며칠 전에 그 당시 경호처 있던 분을 만나봤더니 그전부터 다 알고 있었어요, 저기를. 저기 있었다는걸. 그런데 저걸 고증을 해 보니 150년도 안 된 겁니다. 뭐냐 하면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준건할 때 그즈음에 갑자기 나타난 겁니다, 저게. 그거랑 비슷한 게 저 때 즈음해서 흥선대원군, 고종을 찬양하는 그릇이 땅에서 발굴이 됐어요.
◆ 진중권> 그거 조선시대 때 많이 하잖아요.
◆ 박종인> 그렇죠. 숨겨놓고 도참, 이런 거 하죠. 그런 얘기들이 점점 정치적인 권위를, 권위주의를 권위화 만들어 버리는 그런 도구로 쓰인 거죠. 그런데 아까 말씀드린 한양천도론을 말씀드리면 무학대사랑 정도전이 싸워서 무슨 남향이나 동향이나 이렇게 했다는 이야기. 그게 사실은 병자호란 때. 임진왜란 이후에 생긴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전에는 그런 기록이 전혀 없다가 갑자기 전쟁의 책임을 무학 말을 안 듣고 정도전 말을 들어서 이렇게 됐다라고.
◆ 진중권> 당파 싸움에서 이렇게.
◆ 박종인> 그렇게 엮어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전쟁은 누가 책임을 져야겠는데 그 당시 권력자들이 책임지겠습니까? 그러니까 민간에서는 그렇게 알아서 그때 무학의 말을 들을걸라고 하면서 갑자기 풍수가 들어와 버리는 거고. 그리고 이 실록에 분명히 기록이 되어 있거든요. 태조 이성계가 태종 이방원. 이 사람들은 땅이 평평하고 넓고 그리고 조운이 좋고 그리고 교통이 좋고.
◇ 박재홍> 실용적 계획도시.
◆ 박종인> 맞습니다. 그래 놓고 태종 이방원이 마지막으로 말합니다. 자꾸 풍수로 한양을 고르자는 사람이 하륜이라는 사람인데 내가 그 말을 안 들었다, 내가. 그리고 지금 저기 서운관에 지금 도참 서적들이 많이 있는데 빨리 불태워라.
◆ 진중권> 굉장히 합리적이었네요.
◆ 박종인> 그리고 자기 아들한테 왕위를 물려주면서 세종한테 이렇게 한마디 합니다. 그런데 사대부는 워낙 도참을 많이 믿으니까 너도 공부를 해 놔라.
◆ 진중권> 공부를 해 놔라?
◇ 박재홍> 아들한테.
◆ 박종인> 굉장히 뭐랄까요. 정치력이 뛰어난 실용적인 지도자였죠.
◆ 김성회> 이런 게 다 녹취로 돼서 기록에 다 적혀서 남아 있다는 것도 참 놀라운 일이에요, 어떤 면에서.
◆ 박종인> 실록은 대단한 기록물입니다, 진짜로.
◇ 박재홍> 왕조 시대에 정말 기자같이 제대로 썼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 진중권> 책 제목을 광화문 괴담이라고 했다면 광화문과 관련해서 우리가 아는 사실들이 상당 부분 왜곡됐다라는 것이 함축되어 있는 거 아닙니까? 광화문 조성 사업도 하고 있고 그런데. 그것 좀 말씀해 주시죠.
◇ 박재홍> 광화문광장 복원.
◆ 박종인> 처음에 제가 말씀드렸던 게 이게 우리 현재 대한민국 시대에 대한민국 국민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에 제가 괴담을 선정했다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지금 서울에서 제일 마무리 단계에 있는 사업이 바로 광화문광장 조성 사업입니다. 그 앞에 광화문 앞에 계단층들의 월대를 지금 복원 사업하기 위해서 발굴 조사를 하고 있고요. 그런데 예컨대 월대라는 건 웬만한 큰 문이나 아니면 큰 궁궐의 본전 같은 것에 놨던 계단 같은 월대가 늘 있기는 있습니다.
◇ 박재홍> 주요 건물 앞에 설치하는 기단 같은 것이 월대인 것이죠.
◆ 박종인> 그렇죠. 경복궁 근정전 앞에 넓은 게 있죠. 그런데 광화문 앞에 있는 월대는 세종이 밑에 신하들이 월대를 쌓게 해 달라를 얘기를 하니까 지금이 농번기인데 무슨 인력을 동원하느냐라고 하면서 금지를 시켰어요.
◇ 박재홍> 세종은 원래 금지했던 건데.
◆ 박종인> 그런데 그때만 해도 농번기라는 게 세종이 한 달 전에 법적으로 규정을 내렸는데 그때부터 6개월 동안 춘분부터 추분까지 6개월 동안 농번기였습니다. 그러니까 6개월 동안은 노동력을 동원을 못 하게 돼 있었어요. 그런데 월대 금지시켜놓고 그다음 달에 광화문이 완공됐다라고 기록이 된 겁니다. 그런데 월대를 복원하고 있는 문화재청하고 서울시에서는 아마 그사이에 월대가 만들어졌을 것이다라고 추정을 하면서 저러고 있는 겁니다.
◆ 진중권> 실제로는 나중에 만들어졌을 수도 있는 거잖아요.
◆ 박종인> 제가 그랬죠. 열어보자. 땅 열어보고 그다음에 월대가 있으면 그러면 그때 다시 결정을 하면 되는 거다. 지금은 고종 때 있었던 그 월대를 복원하라고 하는데 그거는 총 합쳐봤자 세월이 60년도 안 됩니다.
◇ 박재홍> 1866년.
◆ 박종인> 66년, 68년 그때 해서 20년대 전차가 다녔을 때 그때 없어졌거든요. 그러니까 60년밖에 안 된 그 구조물을 복원하기 위해서 500년 넘게 사용된 길을 없앨 것인가. 만약에 파서 안 나온다면.
◇ 박재홍> 월대가 안 나온다면.
◆ 진중권> 사실 월대가 거기 쓰였다라는 돌이 다른 데서 발견된 건가요, 지금?
◆ 박종인> 아니요. 고종 때 만든 월대의 몇 가지 부속품들이 동굴이나 이런 데서 발견됐어요. 그거는 대단한 발견이죠. 대단한 발견인데 그게 있다고 해서 조선왕조 500년 내내 월대가 있었다라는 증언은 안 되는 거죠.
◆ 김성회> 그러니까 기자님 쓰신 책의 그 대목이 저는 보면서 웃겼던 게 정말 웃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월대를 검색하면 단 한 번도 광화문 월대는 나오지 않는다.
◆ 박종인> 맞습니다.
◆ 김성회> 데이터베이스화돼서 지금의 사료를 찾아볼 때는 광화문 월대를 검색을 해 보면 없는데 지금 있다고 말을 하고 있다는 거잖아요.
◆ 박종인> 제가 문화재청 분들하고 기사도 쓰고 책도 준비를 하면서 여러 번 전화 인터뷰했었어요. 대답을 못 하는 겁니다.
◇ 박재홍> 팩트에 근거한 게 아니니까.
◆ 박종인> 그러니까 그거 한 달 새 생겼겠죠, 이 정도로 끝나버리고 그리고 지금 경복궁이니 이런 데 복원하는 기준 연대가 제일 왕성했을 때. 그러니까 고종 때에 제일 전각이 많았었거든요. 그때니까 일을 한다라고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기준 그렇게 하면 좋다. 밑에 파보기는 해야 되는 거 아니냐. 제가 매일 가서 ㅇ지금 담벼락 위로 올려서 계속 감시를 하고 있습니다.
◇ 박재홍> 책 내용 중에 재미있는 너무 많아서. 또 하나는 일본군 마을 위령탑이 조선 왕실 제단으로 오인된 일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건 또 무슨 얘기입니까?
◆ 박종인> 이게 제 코미디로는 이거만 한 코미디는 없을 겁니다. 지금은 대통령실이 용산으로 옮겨졌지 않습니까?
◇ 박재홍> 용산으로 옮겼죠.
◆ 박종인> 용산이 원래 청일전쟁 이후로 일본군 사령부가 있었고 그전에는 문화재청에 따르면 거기에 조선 왕실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남단이라는 제단이 있었다는 거예요. 그리고 2005년쯤인가.
◇ 박재홍> 지금 보이고 있는 게 뭔가요? 보이고 있는 부분이.
◆ 박종인> 저게 제단 흔적이라는 겁니다.
◇ 박재홍> 제단의 흔적이다.
◆ 박종인>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제단 흔적이 있고.
◇ 박재홍> 남단의 흔적이다.
◆ 박종인> 저기를 2005년쯤에 당시 문화재청장을 팀장으로 하는 조사단이 저기를 들어가서 보고 저기가 남단 흔적이라고 얘기를 한 거예요.
◇ 박재홍>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남단의 흔적이다.
◆ 박종인> 거기가 사실은 미 대사관이 거기로 들어가게 돼 있었습니다. 대사관 부지가. 그런데 저게 발견이 되니까.
◇ 박재홍> 스톱.
◆ 박종인> 스톱하고 저기를 이빨을 자르듯이 조그맣게 구멍을 내놓고 거기는 반환을 안 해 준 겁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봤더니 이다음 사진을 보여주시죠.
◇ 박재홍> 다음 사진.
◆ 박종인> 보면 저게 사실은 거기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포병부대의 군마 위령탑이에요.
◆ 진중권> 아니, 그런데 저 기단의 밑에 있잖아요. 시멘트 발라서 한 것처럼 보이잖아요 지금. 그런데 저걸 어떻게 우리 문화재로 착각을 할 수가 있습니까?
◆ 박종인> 저 위에 길쭉한 비석 밑에 자연석이 하나 있거든요. 그 석이 지금 남아 있는데 그걸 그 당시 제단에 썼던 주춧돌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자세히 보면 그때 찍은 사진에도 옆에 있는 철 난간들이 남아 있거든요. 그런데 그때 보통 이제 뭐라 그럽니까? 편향증거인가, 확증편향이라고 해야 되나? 이게 남단 터라고 결정을 해 버리니까.
◆ 진중권> 나머지 다 뜯어 맞추는 거죠.
◆ 박종인> 안 보이는 거예요. 그러고 나서 나중에 봤더니 저 사진엽서가 나온 겁니다. 그래서 이게 남단이냐. 그랬더니 그다음부터는 이제 당시 문화재청장 그리고 또 저걸 주장했던 모든 전문가들 지금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습니다.
◆ 진중권> 진짜 이건 망신이다.
◇ 박재홍> 그러니까 저게 원래 있었던 거고 저게 훼손돼서 현재의 모습으로 있는 거죠?
◆ 박종인> 아까 있는 모습.
◇ 박재홍> 아까 그 사진 한번 보여주세요. 저게 원래 있었던 거였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이렇게 된 건데, 비석이 없어지고.
◆ 진중권> 누가 봐도 문화재라고 보기 힘들잖아요. 건축 양식이.
◆ 박종인> 저 옆에 있는 기단이 외성처럼 생겼잖아요. 옆으로…
◆ 진중권> 맞아요. 외성이 정확하게.
◆ 박종인> 그런데 저게 여름철에는 덤불로 해서 안 보입니다. 하지만 저 위쪽은 누가 볼 수가 있거든요. 쇠를 박은 흔적이며 쇠도 남아 있고 그리고 무엇보다 주춧돌이라고 부르는 그 돌, 자연석 자체가 조선 건물에 쓰이는 주춧돌하고는 거리가 아주 멀어요. 그런데 뭐가 씌었는지 하여튼 여기에 남단이 있었다. 이 구간에 남단이 있었다라는 기록에 근거해서 가보니까 뭔가 있으니까.
◇ 박재홍> 저거다.
◆ 박종인> 이거다, 이래 버린 거죠. 잘못하면 일본 군마, 군마의 국적은 뭔지 모르겠지만 군마 위령탑에다가 우리가.
◇ 박재홍> 남단으로 오인했을 뻔한.
◆ 박종인> 제사를 지낼 뻔했죠.
◆ 김성회> 저 엽서 사진은 기자님이 찾으신 건가요?
◆ 박종인> 물론 제가 그렇게 전문적이지는 못 합니다. 저를 도와주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용산 전문가분이 계시거든요.
◆ 김성회> 일종의 제보였던 건가요, 그러면?
◆ 박종인> 제가 그분하고 용산공원과 아까 얘기했던 한양 경복궁부터 용산 저 끝까지 쭉 나오는 길에 대해서 쭉 기사를 취재를 하고 있는데 그분의 연구소에 놀러 갔더니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그분만큼 용산에 빼꼼한 분이 없는데 그분이 저걸 갖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게 뭐야.
◇ 박재홍> 시간이 놀랍게도 얼마 남지 않아서 빨리빨리 재미있는 얘기해 보겠습니다. 남대문과 경희궁을 둘러싼 논란. 이것도 좀 해 보면 좋을 것 같은데. 일제 총독부가 경희궁을 없앴다, 이게 사실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셨죠?
◆ 박종인> 아니죠.
◇ 박재홍> 사실이 아니다?
◆ 진중권> 제가 얼마 전에 갔는데 거기 공식 게시… 뭐죠, 설명판에 그렇게 써 있습니다.
◆ 박종인> 이게 사유는 뭐냐 하면 물론 식민 시대 때 거기 훼손된 게 많이 훼손이 되긴 했죠. 그런데 사실 원래는 뭐냐 하면 경복궁 영건일기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대원군이 경복궁을 재건하면서 그때 하루하루 거기 주사급쯤 되는 사람이 기록한 내용의 일지가 있거든요. 그때 경희궁에 큰 건물 5개를 빼고 나머지는 다 뜯어서 경복궁의 재료로 썼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 진중권> 경복궁에 옮겨놓은 거네요.
◆ 박종인> 경복궁에 다 가 있습니다. 그리고 고종이 정권을 잡고 나서 자기 아버지를 내치고 나서 거기다 뽕나무를 심었습니다. 그래서 옛날 지도를 보면 외국 사람들이 그린 지도를 보면 거기는 뽕나무 공원으로 돼 있습니다. 대한제국 시대 때.
◇ 박재홍> 지금 사진이 나오고 있는데, 유튜브로.
◆ 박종인> 그렇죠. 저기 보면 한글은 제가 붙인 건데 저기 영국 사람들이 대한제국 시대 때 그린 지도거든요. 보면 덕수궁, 경운궁을 뉴팰리스라고 부르곤 했고 그다음에 러시아 공사는 북서쪽으로 지금 경희궁인데 멀버리 파크라고 되어 있어요. 벌써 저 때 궁궐의 기능은 없던 겁니다. 뽕나무 묘목장으로써 쓰다가 묘목 사업도 실패를 했죠. 프랑스 사람들이 그린 지도를, 그림을 보면 흥화문. 이쪽에 지금 남아 있는 그 문하고 저 뒤는 허허벌판입니다.
◇ 박재홍> 이미 없었군요.
◆ 박종인> 저 허허벌판에서 고종 그리고 광무제죠. 광무제가 하인리히 친왕이라고 독일 빌헬름 2세 동생이 왔었는데 저기서 활쏘기를 했었습니다. 왜? 텅텅 비어 있으니까. 그리고 그게 점점 거기에서 조선 사람, 우리가 거류하는 일본 사람 이런 사람들이 운동회를 하면서 그리고 통감부 시절에 저기 학교가 생겨요. 총독부 중학교가. 그게 나중에 고등학교가 되고 그러면서.
◇ 박재홍> 저 사진은 어떤 사진입니까?
◆ 박종인> 저것도 그러니까 불어 학교 교장하던 프랑스 사람이 찍은 사진인데 저게 94년입니다, 1894년.
◇ 박재홍> 1894년.
◆ 박종인> 저게 숭덕전이라고 경희궁 본전입니다.
◆ 진중권> 본전이잖아요.
◆ 박종인> 아무것도 없어요.
◆ 진중권> 아무것도 없네.
◆ 박종인> 뼈밖에 없습니다. 저런 걸 일본이 다 뜯어먹었다고 얘기를 하니까 그러면 우리 국민들은 통쾌하고 분하죠. 팩트와 상관없이.
◇ 박재홍> 그냥 무조건 일본에 죄를 뒤집어씌우는.
◆ 박종인> 그럼요. 우리는 책임질 이유는 없으니까요.
◆ 진중권> 우리 아이가 다 돌아봤거든요. 독일에서 와서 쫙 돌아보는데 거기서 계속 반복되는 말이 일본의… 계속 반복된다라고 하는데. 경희궁 같은 데 허구고 다른 것도 그런 데가 있겠죠?
◆ 박종인> 그러니까 예를 들자면 이게 한두 가지가 아닌데 작년에 그게 우리가 공개적으로 문화재 분류 번호를 없앴지 않습니까? 남대문 이야기입니다.
◇ 박재홍> 국보 1호.
◆ 진중권> 국보 1호.
◆ 박종인> 남대문이 국보 1호인데 이제는 모든 게 국보가 됐잖아요. 그 이유가 식민 시대 때,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가 한양으로 입성을 할 때 이 남대문으로 들어왔다는 겁니다. 그 개선문이기 때문에 총독부에서 이걸 조선 보물을 관리를 하면서 1호로 만들었다라는 이야기가 심지어 서울대 국사학과에 재학하고 있던 어떤 일본 교수가 석사 논문을 발표를 했어요, 이걸.
◇ 박재홍> 오타 히데하루 씨.
◆ 박종인> 지도교수가 이태준 선생님이셨는데 그런데 이게 남대문 화재 때 갑자기 화제가 되면서 나중에 불이 붙은 겁니다. 그래서 사실은 이거는 그 이전부터 조선의 사실은 옛날 보물이나 고건축을 시작한 사람들이 일본 사람들이었는데 그 사람들이 시대별로 가장 대표성이 있는 건물들을 쭉쭉쭉 선정을 했었거든요. 그런데 한양에서는 제일 시대적 가치가 있는 제일 규모가 큰 하면서 쭉 이렇게 리스트를 작성을 했는데 그 앞에 남대문이 있었습니다. 동대문이 있었고. 그 순서가 1890년대에 작성했던 그 순서가 나중에 1930년대에 조선 보물 리스트에 그대로 등록이 되고 해방 이후 지금까지도 그렇게 분류가 되어 있거든요. 아주 학술적인 이유로 분류가 되고 연번이 매겨졌는데.
◇ 박재홍> 관리번호였는데. 그게 어떤 가치의 순위가 아니고 관리번호인데.
◆ 진중권> 도대체 그 얘기는 누가 만들어낸 거예요, 그건?
◆ 박종인> 옛날부터 그런 얘기가 있었어요. 그런데 이런 얘기를 그때 식민시대 때 일본 사람들이 지었을 확률이 더 큽니다. 이게 우리 기요마사 장군이 들어와서 이랬던 거야. 그런 당시의 도시 괴담과 총독부 악재 시대에 대한 원망과 이런 것의 증폭이 서로 간에 증폭이 되면서 사실처럼. 그래서 마침내 한 나라의 문화체계가 바뀌는.
◇ 박재홍> 흔들렸군요. 정조에 대한 오해. 이분이 굉장히 통합형 학자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어떤 문화를 융성시킨 분이 아니었다라는 말씀하셨는데 짧게 말씀해 주시죠.
◆ 박종인> 논쟁적이기는 합니다. 그런데 저는 어떤 데 주목을 했냐면 문체반정이라고 얘기 들어보지 않으셨습니까?
◇ 박재홍> 문체반정.
◆ 박종인> 문체반정은 뭐냐 하면 그 당시에 유행하고 있던 청나라에서 가지고 왔던. 물론 한문입니다. 한문 여염집에서 쓰고 있는 그런 문체. 그리고 그런 내용들. 이런 내용들을 다 일체 금하고 공맹 시대에 우아한 고문을 쓰자라는 게 문체반정입니다. 그 당시 유행하던 그런 문학을 패관문학이라 그랬는데 이 패관문학을 제일 선도하고 있던 사람들이 북학파 박지원 같은 사람들이었어요. 이 사람들은 상업과 유통을 통해서 생산을 하고 산업을 해서 국부를 찾자, 이런 거였거든요. 이 사람들 못 하게 금지해버리니까 그러니까 그다음부터는 학문이 성리학 일변도로 가면서 마침내 나라가 망할 때쯤에.
◆ 진중권> 개혁 군주라고 하는데 그건 또 아닌.
◇ 박재홍> 성리학 이외의 모든 학문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탄압했다라고.
◆ 박종인> 지성이 마비가 돼버리니까 더 이상 발전이 없었던 것이죠.
◇ 박재홍> 이거 선생님 책은 한 1시간, 2시간 잡고 얘기해야 되는데 오늘 일단 맛보기로 보여드리고.
◆ 진중권> 맛보기였습니다.
◇ 박재홍> 다시 한번 모셔서 더 재미있는 얘기 2탄, 3탄 들어야 될 것 같습니다. 광화문 괴담의 저자이신 조선일보 박종인 기자였습니다. 고맙습니다, 기자님.
◆ 박종인> 감사합니다.
- 이메일 :jebo@cbs.co.kr
- 카카오톡 :@노컷뉴스
- 사이트 :https://url.kr/b71afn
한판승부 newsnews981@gmail.com
▶ 기자와 카톡 채팅하기▶ 노컷뉴스 영상 구독하기
Copyright © 노컷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윤심' 업었던 주호영…두달만에 '친윤' 공격에 리더십 흔들
- 서울소방 책임자들 눈물 "한 명이라도 더 살려야 했는데"
- 남북관계 사안 아니라는데…北 자국민 시신 송환 응할까?
- '라임몸통' 김봉현, 추적장치 끊고 도주해 전국 지명수배
- 美 물가둔화에 원·달러 환율 59.1원 급락…코스피 3%대 급등
- 북한 '50만 달러' 송금 의혹…아태협 회장 구속(종합)
- '구속 만료' 임박 김만배·남욱…검찰 추가 구속 요청에 '반발'
- 유령 마을 매물로 나왔다…주택 44채, 호텔까지 '단돈 3억원'
- 김용 '공소장'에 등장한 이재명 외곽 조직…檢, 용처 파악 주력
- CCTV 속 원장의 행동…어린이집서 생후 9개월 아이 숨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