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당하게 즐기는 쾌락, 페미니즘이 선물한 자유[책과 삶]
본격화되기 시작한 여성의 성혁명
섹스토이를 둘러싸고 변화한 담론
남성 중심 쾌락산업을 바꾼 노력들
바이브레이터의 나라 - 페미니스트 섹스토이숍은 쾌락산업을 어떻게 바꿨는가
린 코멜라 지음· 조은혜 옮김 | 오월의봄 | 504쪽 | 2만4000원
“그는 항상 장갑처럼 아주 잘 맞아. 늘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지. 그는 나를 너무 흥분시켜. (중략) 나는 나의 ‘베이비 밥(B.O.B)’을 사랑해.”
그래미상 수상자인 미국의 팝스타 메이시 그레이가 2015년 발표한 노래 ‘B.O.B’의 한 대목이다. 언뜻 ‘밥’이라는 이름의 연인에게 보내는 연가처럼 보이지만, 이 곡의 주인공은 사람이 아닌 바이브레이터다. 그레이는 자신의 섹스토이에 대한 애정을 담은 이 곡을 발표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소녀들이 (섹스와 섹스토이에 관해)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에게는 ‘밥’이 필요합니다.”
여성의 섹스토이 사용을 다룬 과감한 음악은 어떻게 세상에 나올 수 있었을까. 신간 <바이브레이터의 나라>는 그레이에 앞서 섹스토이를 양지로 끌어내기 위한 수많은 페미니스트 선구자와 페미니스트 섹스토이숍이 있었다고 말한다. 1960년대 본격화된 성혁명을 시작으로 섹스토이를 둘러싼 담론은 6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끊임없이 변화해왔다. 그리고 그 변화의 한가운데서 남성 중심의 쾌락 산업을 바꿔온 이들의 노력을 담은 책이 <바이브레이터의 나라>다.
저자인 린 코멜라는 미 네바다 대학교의 교차성·젠더·에스닉 연구 학과에서 젠더 및 섹슈얼리티 분야를 가르치고 있다. 저자는 섹스토이숍을 창업하고 제품 개발에까지 뛰어든 용감한 페미니스트 자영업자들의 이야기를 다루기 위해 섹스토이숍에서 일정 기간 판매 직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그가 창업자, 제조자, 홍보 담당자 등 다양한 직렬의 업계 종사자와 나눈 80여차례의 인터뷰가 책의 토대가 됐다.
페미니스트 섹스토이숍의 시작은 196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0년은 여성 인권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해다. 그해 미국 식품의약청이 경구피임약을 승인, 여성이 자기 삶에 대한 통제권을 얻었기 때문이다. 재생산의 관점에서 섹스를 바라볼 수밖에 없던 여성들은 이제 성산업의 새로운 소비 계층으로 떠올랐다. 한계도 여전했다. 성해방적 메시지가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와중에도 성적 욕망과 쾌락에 대해 자유롭게 토론할 기회까지 얻지는 못했다.
이 같은 분위기 속에서 탄생한 것이 페미니스트 섹스토이숍이다. 섹스 포지티브 페미니스트인 델 윌리엄스가 1974년 뉴욕에 연 ‘이브스 가든’은 미국 최초로 여성의 쾌락과 건강에 중점을 둔 섹스토이숍이었다. 시작은 소박했다. 윌리엄스는 자신의 아파트에서 두 종류의 바이브레이터를 팔기 시작했는데, 매주 금요일 저녁마다 자택을 개방해 물건을 사러 올 수 있게 했다. 사적인 공간에서 이뤄지는 섹스토이 판매는 여성들을 안심하게 했다. “여성이 백화점이나 다른 어떤 가게든 들어가서 진동 마사지기를 산다는 건 ‘세상에, 우리 예쁜이 진짜 굶주렸나보네’라고 말할지도 모르는 남성 직원을 맞닥뜨릴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국에서 주문이 물밀 듯 들어오기 시작했고 윌리엄스는 사업 시작 1년 만에 뉴욕 웨스트 57번가에 이브스 가든 사무실과 쇼룸을 꾸릴 수 있었다. 그러나 저자는 이브스 가든에 명확한 한계가 있었다고 말한다. 윌리엄스가 염두에 둔 여성 섹슈얼리티는 일차원적 페미니즘에 기반했으며, ‘이성애자, 백인, 전문직 여성’이라는 정체성이 강하게 반영돼 있었다는 것이다.
책은 섹스토이숍이 페미니즘의 흐름과 함께 어떻게 변모하고, 그 과정에서 어떤 한계를 만나 어떻게 넘었는지 천천히 따라간다. 이브스 가든보다 3년 늦게 샌프란시스코에 문을 연 ‘굿바이브레이션’은 이브스 가든의 ‘배타성’을 다소간 극복한 업체였다. 이곳은 성적 지향이 다양한 여성과 남성을 비롯해 모든 사람에게 안전하고 편안한 섹스토이숍을 표방했다. 나이든 사람, 젊은 사람, 독신자, 기혼자, 레즈비언과 게이, 트랜스젠더, 성노동자에게 모두 열려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이 또한 논쟁의 중심에 선다. 섹스 포지티브 철학이 포르노그래피와 성애물에 반대하는 안티포르노그래피 페미니스트들의 강도 높은 비판에 직면하기도 하고, 정치적으로 올바른 성적 표현을 둘러싼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기도 한다. 1990년대 들어서는 인종과 젠더, 계급 등 요인을 세심하게 고려하는 교차성의 관점이 부재하다는 비판에도 직면한다. 2000년대 이후에는 섹스토이숍을 운영하는 페미니스트 기업가들이 자본주의와 ‘불화’하며 생기는 경제적 문제도 생긴다. 이 위기는 2020년대에도 이어지고 있다. 이윤을 극도로 경계하며 운영하다 소중히 여겨온 사업을 대자본에 넘기는 일도 생겼다.
저자는 섹스토이숍에 얽힌 여러 첨예한 문제들을 종합적이고 입체적으로 분석한다. 이 분석은 페미니즘에 대한 밀도 높은 성찰로도 이어진다. 페미니스트 기업가들이 겪는 여러 모순을 대하는 저자의 명쾌하고도 실용적인 태도는 내내 흥미롭다.
최민지 기자 ming@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공군 대령, ‘딸뻘’ 소위 강간미수···“유혹당했다” 2차 가해
- 윤 대통령 공천 개입 의혹, 처벌 가능한가?
- [스경X이슈] ‘흑백요리사’ 출연진, 연이은 사생활 폭로…빚투→여성편력까지
- 윤 “김영선 해줘라”…다른 통화선 명태균 “지 마누라가 ‘오빠, 대통령 자격 있어?’ 그러는
- [단독]“가장 경쟁력 있었다”는 김영선···공관위 관계자 “이런 사람들 의원 되나 생각”
- [단독] ‘응급실 뺑뺑이’ 당한 유족, 정부엔 ‘전화 뺑뺑이’ 당했다
- 윤 대통령 “김영선이 좀 해줘라 그랬다” 공천개입 정황 육성…노무현 땐 탄핵소추
- [단독] 윤 대통령 “공관위서 들고 와” 멘트에 윤상현 “나는 들고 간 적 없다” 부인
- [단독]새마을지도자 자녀 100명 ‘소개팅’에 수천만원 예산 편성한 구미시[지자체는 중매 중]
- “선수들 생각, 다르지 않았다”···안세영 손 100% 들어준 문체부, 협회엔 김택규 회장 해임 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