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 경성]1930년대 예술가들의 아지트, ‘낙랑파라’

김기철 학술전문기자 2022. 11. 12.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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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라이브러리속의 모던 경성]1932년 6월 이순석 개업, 박태원 구본웅 이태준 등 모더니스트들의 ‘핫플’
낙랑파라는 1932년 7월7일 경성부청(현 서울도서관) 맞은편 장곡천정105번지에 개업했다. 이상 박태원 구본웅 김소운 등이 자주 드나들던 예술가들의 아지트였다./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 정다운

‘거의 매일같이 ‘낙랑’에서 만나는 얼굴에는 이상, 구본웅 외에 구본웅의 척분(戚分)되는 변동욱이 있고, 때로는 박태원이 한몫 끼었다. 거기다 낙랑 ‘주인’인 이순석-이 멤버는 모두 나보다는 앞서 서로 친한 사이들이었다.’

시인 김소운(1907~1981)이 친구 이상을 그리며 쓴 회상이다. 둘의 첫 만남도 끽다점(喫茶店) 낙랑파라에서였다. 화가 구본웅의 소개였다. 김소운은 이상을 ‘우정에 있어서도 현실적, 도회적이었다’고 기억한다.

◇'더치 페이’의 선구자(?) 이상

‘한 테이블에서 같이 차를 마실 때, 그중 하나가 찻값을 치른다는 것은 우리 사회에 겨우 하나 남은 염치요,관습이다. 그러나 삼십 사, 오년 전 그 시절에 이상은 이미 그런 폐습을 탈피한 선각자(?)였다.희희낙락 담소하다가도 일어설 때는 제가 마신 찻값으로 10전 경화(硬貨) 하나를 테이블 위에 내놓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상이 ‘더치 페이’ 선구자였다는 얘기다.

1932년 7월7일 경성부청(현 서울도서관) 건너편 장곡천정(현 소공동) 105번지에 문을 연 ‘낙랑파라’는 요즘 말로 모더니스트들의 ‘핫플’이었다. 이상, 박태원 등 구인회와 구본웅, 길진섭, 김용준 등 목일회(木日會)멤버들이 단골로 모였다. 예술을 운동의 도구로 여기는 프로문학, 프로예술과 거리를 둔 모더니스트들의 아지트였다. 지금 플라자호텔이 들어서있는 소공로 입구다.

시인 이상이 그린 '낙랑파라' 삽화. 박태원이 쓴 신문연재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 들어있다. 낙랑파라 내부를 묘사했다. 등나무 의자와 커피, 음료수 잔 뒤로 두 손으로 턱을 받치고 무료하게 앉아있는 마담의 모습이 보인다. 조선중앙일보 1934년8월14일자

◇남국의 파초, 축음기, 커피로 도회적, 이국적 분위기

‘대한문 앞으로 고색창연 옛 궁궐을 끼고 조선호텔 있는 곳으로 오다가 장곡천정(町) 초입에 양제(洋製) 2층의 소서한 집 한 채 있다. 입구에는 남양(南洋)에서 이식하여 온듯이 녹취 흐르는 파초가 놓였고,실내에 들어서면 대패밥과 백사(白沙)로 섞은 토질 마루 위에다가 슈베르트, 데도릿지(독일여배우 마들레네 디트리히) 등의 예술가 사진을 걸었고, 좋은 데생도 알맞게 걸어놓아있어 어쩐지 실내 실외가 혼연조화되고 그리고 실내에 떠도는 기분이 손님에게 안온한 심정을 준다. 이것이 ‘낙랑팔라’다.’(박옥화, ‘인테리 청년 성공직업’, 삼천리 1933년10월)

필자는 낙랑파라를 ‘서울 안에 있는 화가, 음악가, 문인들이 가장 많이 모이고 그리고 명곡연주회도 매주 두어번 열리고 문호 괴테의 밤같은 회합도 가끔 열리는 곳’이라고 소개했다. 이곳은 문인, 화가들이 커피잔을 놓고 축음기를 통해 울려퍼지는 음악을 들으며 취향과 감수성을 공유하는 감각의 공동체였다. 낙랑파라의 ‘파라’는 응접실, 거실을 뜻하는 단어 ‘parlour’의 일본식 표기에서 왔다. 일본에선 양과자와 음료수를 주로 파는 경음식점을 가리키는 단어로 사용됐다고 한다.

낙랑파라는 2층짜리 한양절충식 건물이었다. 1층은 다방, 2층은 화실로 꾸몄다. 목조로 뼈대를 만든 후 벽돌로 벽을 쌓고 지붕에는 기와를 얹고, 양식 유리창을 설치했다. 밖에서 보면 양식 건물로 보였을 것이다. 실내엔 등나무 의자와 테이블을 놓고, 야자수를 들여놓아 이국적 분위기를 냈다. 당시 일본과 유럽의 고급 호텔이나 카페에서 사용한 인테리어 아이템이었다.

경성부청(현 서울도서관)앞 낙랑파라 단골 멤버들. 왼쪽부터 이상 박태원 김소운이다. 낙랑파라는 모더니스트 예술가들의 아지트였다.

◇커피, 홍차 1잔에 10전, 토스트도 팔아

낙랑파라의 분위기는 단골 박태원 덕분에 소상하게 알 수 있다. 1934년 8월1일부터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한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엔 낙랑파라가 자주 등장한다. ‘다방의 오후 2시, 일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그곳 등의자에 앉아 차를 마시고 담배를 태우고, 이야기를 하고, 또 레코드를 들었다. 그들은 거의 다 젊은이들이었고, 그리고 그 젊은이들은 그 젊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자기네들은 인생이 피로한 것같이 느꼈다.’

백수나 다름없는 인텔리 청년들이 커피를 마시며 소일하는 곳이었다. 박태원 친구였던 이상이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삽화를 그린 덕분에 낙랑파라의 내부를 더 알 수있다.

낙랑파라 메뉴는 커피와 홍차, 소다수, 아이스크림, 칼피스 등이었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 토스트를 먹는 손님이 나오는 것으로 미루어 간단한 음식도 팔았던 모양이다. 낙랑파라의 커피, 홍차 가격은 10전이었고, 아이스크림, 코코아, 칼피스는 15전 정도였다.

◇투르게네프 50년제, 길진섭 소품전시회 열려

낙랑파라에선 ‘삼천리’ 소개처럼 미술전시회, 출판기념회, 음악회 같은 이벤트가 수시로 열렸다. 1933년 8월 22일 저녁 8시, 러시아 소설가 투르게네프 50주기 기념제가 이곳서 열렸다(‘투르게네프 50년祭 기념’, 조선일보 1933년8월22일) 함대훈 이헌구 이하윤 등이 발기인으로 나선 문단 행사였다. 주요한 임화 김상용 김억 이선근 이태준 정지용 등 당대의 문인들이 모여 투르게네프를 추억했다.

1936년3월15일 서양화가 길진섭 소품전이 열린 곳도 낙랑파라였다. 낙랑파라 주인인 이순석이 친구의 곤궁한 생활을 도와주기 위해 마련한 작은 전시였다. ‘서양화가 길진섭씨는 그동안 재차 도동(渡東)하여 빈한한 서생의 생활을 무릅쓰고 일심전력 화도에 정진한 결과, 중앙미전 및 백일회 등 상당히 권위있는 미전에 입선되는 동시 백만회 회원으로 추천,친우 이순석씨 외 몇 분은 씨의 생활이 너무나 군간함을 민망히 생각하고 씨의 소품전을 열어 다소의 도움을 이루어 주고자 방금 그 준비에 분망중이인데…'(‘길진섭씨 개인소품전’, 조선일보 1936년3월15일)

길진섭(1907~1975)은 길선주 목사의 막내아들로 1932년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한 화가였다. 정지용 첫 시집 ‘정지용시집’(1935)과 ‘백록담’(1941), 이육사의 유고집 ‘육사시집’(1946)을 디자인하고, 요절한 이상의 데스 마스크(안면상)를 떠 준 마당발이었다.

◇도쿄미술학교 도안과 출신 이순석이 주인

‘낙랑파라’ 주인 이순석(1905~1986)은 광복 후인 1946년 서울대 미대 교수로 부임해 1970년 정년퇴임까지 후학을 양성한 디자인, 석조 공예분야 1세대다. 1931년 동경미술학교 도안과를 졸업한 이순석은 그해 동아일보사 강당에서 국내 첫 공예도안전을 개최했다. 화신백화점 대표 박흥식에게 스카우트 돼 광고부 주임으로 일하다 1년여 만에 관두고 낙랑파라를 차렸다. 당시 덕수궁 박물관에 수시로 다니면서 공예공부를 했는데, 근처에 화실을 낼 겸, 카페를 낸 것이다.

‘삼천리’에 따르면, 이순석은 시설비 1100원, 유동자본 500원 등 2000원 정도 들였는데, 매달 매상은 300원에 비용이 200원쯤 들고, 순수입은 불명(不明)이라고 썼다. 이순석은 ‘프랑스 파리에 유행했다는 살롱과 비슷해서 문인, 화가 등 예술가나 예술가 지망생들이 주로 모여 고전음악을 감상하면서 예술을 논하고 작품 구상을 하는 등 일종의 예술가들의 집회소 구실을 했다’(‘노교수와 캠퍼스와 학생’141, 경향신문 1974년 3월11일자)고 회고했다. 경영이 시원찮았던지 이순석은 1935년 경 배우 김연실에게 넘긴다. 김연실은 가게 이름을 ‘낙랑’으로 바꿨지만, 그 후에도 종종 ‘낙랑파라’로 불리기도 했다.

◇복혜숙의 ‘비너스’, 유치진의 ‘플라타느’

카페는 1920년대~1930년대 도회적 분위기를 즐기는 곳이자, 모던의 상징인 ‘핫플’로 떠올랐다. 예술가들이 직접 운영하는 끽다점, 카페도 하나둘씩 늘어났다. 영화감독 이경손이 차린 ‘다방 카카듀’(1927년 개업), 영화배우 복혜숙의 ‘비너스’(1928년 개업), 영화배우 겸 미술감독 김인규의 ‘멕시코’(1929년), 이상의 ‘제비’(1933)는 종로의 명물이었고, 극작가 유치진의 ‘플라타느’가 낙랑파라와 함께 소공동을 지켰다. 카페의 르네상스시대였다.

◇참고자료

오윤정, ‘1930년대 경성 모더니스트들과 다방 낙랑파라’, 한국근현대미술사학 제33집, 2017 상반기

박현수, 식민지의 식탁, 이숲, 2022

서울대미대 응용미술학과 동문회,하라 이순석, 1993

박옥화, ‘인테리 성공직업’1, 삼천리 1933년 10월, 99

‘깍다점평판기’, 삼천리 제6권 제5호 1934.5

김소운, ‘李箱 異常’, ‘하늘 끝에 살아도’, 동화출판공사,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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