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미엄 리포트] 지하 1000m 실험실에서 우주기원 밝힐 '유령' 찾는다

정선=김소연 기자 2022. 11. 12.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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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과학연구원 '예미랩' 현장 르포
IBS 지하실험연구단의 고심도 지하실험시설 ‘예미랩’에서 가장 큰 실험구역인 LSC 실험구역에 기자와 관계자가 서 있다. 과학동아 DB

예미산 지하 1000m에서 가장 완벽한 어둠을 만났다. 실험실로 이어진 터널에는 빛이란 게 없었다. 휴대전화 조명에 의지해 터널을 빠져나오자 높이 28m, 지름 20m의 거대한 공간이 펼쳐졌다. 숨이 턱 막혔다. 실험실보다는 고대 신을 숭배하기 위해 마련한 신전 같았다. 콘크리트벽에 아로새겨진 얼룩조차 벽화로 보였다. 그러나 과학자들이 이곳에서 기다리는 건 신이 아니라 우주의 비밀을 풀 열쇠다. 중성미자와 암흑물질을 탐구하기 위해 문을 연 지하실험실, 예미랩에 다녀왔다.

9월 29일 오전 강원도 정선 예미산으로 향했다. 가을 하늘이 쾌청한 날이었다. 바람에 휘날리는 들꽃을 보니 이 땅 아래 1000m로 내려갈 거란 사실이 더욱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예미산을 찾은 건 고심도 지하실험시설 ‘예미랩’에 가기 위해서였다. 기초과학연구원(IBS) 지하실험연구단이 지하 1000m에 실험실을 마련하는 데만 6년이 걸렸다. 10월 5일 준공식으로 공사가 공식적으로 완료된다. 기다림도 이제 끝이 보인다. 지상연구실에서 만난 연구원들의 표정이 한껏 들떠 있었다.

“실험 공간은 전체 3000평방미터(m2)입니다. 면적으로 보면 세계에서 6번째로 넓은 지하실험시설이죠. 독립적인 실험을 할 수 있는 구역이 13개 마련돼 있어 활용 공간 면으로는 어느 지하실험시설에도 뒤지지 않습니다.”

예미랩의 운영과 구축을 총괄하고 있는 박강순 책임기술원이 모형을 가리키며 설명을 이어갔다. 박 책임기술원은 “이곳은 원래 민간기업이 수십 년간 철광석을 캐던 광산이라 지하 600m까지 갱도가 뚫려있었다”며 “400m를 더 내려가는 진입 터널을 추가로 팠다”고 했다.

수직거리만 따져봐도 1000m니 갈 길이 멀다. 우선 지상에서 수직 왕복 승강기(케이지)를 타고 지하 600m 지점까지 내려간다. 그다음엔 진입 터널이 이어진다. 차량으로 갈아타 경사로를 782m 더 달려야 실험실이 나온다.

케이지에 타기 전 수직 터널 바닥을 슬쩍 봤다. 실수였다. 잠실 롯데 타워가 약 555m니 한국에서 제일 높은 건물을 꽂아 넣어도 약 40m가 남는 깊이다. 시커먼 어둠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가슴이 두근거리는 와중에 무전 소리가 들려왔다.

“케이지 내려갑니다.”

지하 1000m 지점에 닿기 위해선 600m 깊이를 왕복하는 수직 왕복 승강기에서 내린 뒤에도 7도 경사의 진입 터널을 800m 가까이 달려야 한다. 과학동아 DB

덜컹, 하는 소리와 함께 케이지가 하강하기 시작했다. 지상에서 방기문 연구위원이 한 말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비상시에 정전이 되면 지하는 불빛 하나 없이 암흑이 될 터다. 방 연구위원은 “그 경우 케이지가 운행하지 않으니 꼬불꼬불한 램프웨이를 따라 6km 걸어 올라오면 된다”며 “운동이 필요해서 걸어 올라오겠다고 하면 말리진 않겠다”고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러면서도 “수십 년간 철광석을 캐던 곳이라 갱도가 길고 복잡하다”며 “길을 잃을 수 있으니 개인행동은 금지”라고 했다. 사뭇 진지한 경고였다. 실험실에 가는 길이라기엔 너무 험난하다. 과학자들은 왜 지하로 향했을까.

과학동아 DB

예미산이 허락한 고요 속 '유령' 사냥

진입터널을 달려 내려갔다. 환기 시스템이 작동하는 소리가 머리까지 ‘웽웽’ 울렸다. 하지만 IBS 지하실험연구단이 땅속을 찾은 건 아이러니하게도 그곳이 고요한 곳이기 때문이다.

IBS 지하실험연구단의 목표는 암흑물질과 중성미자의 비밀을 밝히는 것이다. 암흑물질은 그 이름부터 정체가 암흑에 싸여있는 물질이란 뜻이다. 별, 성운 등 눈에 보이는 물질이 아닌, 미지의 물질이 있어야만 설명 가능한 현상이 속속 관측되면서 고안된 이론 속 물질이다. 질량이 있어 주변 물질과 중력을 통해 상호작용한다는 점 외에는 밝혀진 바가 거의 없다. 

중성미자는 우주를 구성하는 기본 입자다. 관측된 적은 있지만, 아직 질량이나 반입자의 특성 등 많은 부분이 베일에 싸여있다. 이 때문에 중성미자에 대한 연구는 노벨상의 단골손님 중 하나였다. 김영덕 단장은 “암흑물질의 정체와 중성미자의 특성을 밝히는 것은 우주 기원을 푸는 중요한 열쇠”라며 “현대물리학의 가장 큰 질문 두 가지”라고 했다.

문제는 두 물질을 감지하기 어렵다는 데 있다. 암흑물질과 중성미자 모두 우주에 널리 분포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모두 다른 물질과 쉽게 상호작용하지 않는 데다가 질량도 매우 미미하다. 앞에 물체가 있어도 원자 사이를 스르륵 빠져나갈 수 있다. 이 문장을 읽는 지금도 암흑물질 또는 중성미자가 당신의 몸을 뚫고 지나고 있을지도 모른다. 마치 유령처럼.

예미랩 내부 전경. 아직 실험장비가 다 들어오진 않아 비어있다. 2023년 초엔 사다리 모양으로 뚫린 굴에 각각 다른 실험공간이 꾸려질 계획이다. 과학동아 DB

암흑물질이나 중성미자를 잡을 가장 확실한 방법은 이들 물질이 우리가 알고 있는 물질과 충돌할 때를 기다리는 것이다. 유령을 잡기 위해 세상에서 제일 예민한 동작 감지 센서를 집안 곳곳에 설치한다고 하자. 우리가 원하는 건 유령이 지나가며 발생하는 아주 약한 신호를 잡아내는 것이다. 그런데 집에는 유령 외에 당신도 살고 있고, 당신의 가족이나 심지어 날파리도 있다. 물체가 지나갈 때마다 동작 감지 센서가 울린다면 유령의 신호를 구분해 내기 어려울 것이다.

마찬가지다. 지상에는 우주방사선이나 뮤온과 같은 입자가 비처럼 내리고 있다.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암흑물질이나 중성미자의 충돌을 감지할 수 있을 정도의 장비라면 우주방사선이나 뮤온이 지나가도 매번 신호를 보낼 것이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지하 수천 m의 고요 속에 검출기를 설치했다. 우주방사선이나 뮤온은 땅에 가로막힌다. 대신 암흑물질과 중성미자는 땅을 통과해 검출기에 도달할 수 있다.

땅을 ‘입자의 체’로 활용하겠다는 전략이다. 박 책임기술원은 “초당 300번씩 오는 뮤온 신호를 차단하고, 1년에 2~3번씩 올 것으로 예측되는 암흑물질이나 중성미자 신호를 기다리는 격”이라고 설명했다.

 
더 깊고, 더 무겁고, 더 가까워진 실험

이재승 연구위원과 김성현 선임기술원의 안내를 받아 예미랩을 구석구석 둘러봤다. 중앙 통로 양옆에 거대한 굴이 늘어선 모습이 거대한 개미집에 들어온 것 같았다. 김 선임기술원은 “땅을 판 다음 콘크리트에 물을 섞어 분사해 벽을 만들었다”며 “벽에 흰색 특수페인트를 발라 미처 차단하지 못한 입자를 차폐한다”고 설명했다. 이렇게 마련된 실험구역 13곳에는 IBS 지하실험연구단 외에도 기상청, 지질자원연구원, 경북대 등 다양한 연구기관의 실험장비가 들어설 계획이다. 

공간은 마련됐지만, 시설이 모두 자리 잡진 못한 상태다. 3개 통신사 중에서 KT를 제외하고는 데이터 통신이나 통화 서비스 사용이 불가능했다. 화장실은 간이 화장실만 마련돼 있었고, 실험구역도 아직은 빈 곳이 더 많다. 이 연구위원은 “2023년엔 본격적으로 실험이 시작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IBS 지하실험연구단의 주요 연구가 이뤄질 실험구역은 총 네 곳이다. 우선 암흑물질의 후보 중 하나인 윔프(WIMP)를 찾는 COSINE(코사인)-200 실험이 두 구역에 걸쳐 진행된다. 윔프는 이론물리학자인 이휘소 박사가 스티븐 와인버그와 함께 제안한 입자이기도 하다. 국내에선 1999년부터 이 박사의 후예들이 윔프를 탐색하고 있다.

윔프를 탐색하는 국내 지하실험실은 예미랩 이전에도 있었다. COSINE-200의 선행연구 격인 COSINE-100 실험이 강원도 양양 양수발전소 연구시설(Y2L)에서 2016년부터 진행됐다. 아이오딘화나트륨(NaI) 섬광단결정체를 활용해 결정 속 원자핵에 충돌하는 윔프를 감지하는 실험이다.

당시 실험실이 위치한 장소는 지하 700m, 윔프를 검출할 NaI 섬광단결정체의 무게는 100kg이었다. 예미랩의 COSINE-200 실험구역은 아직 텅 빈 공간에 이름표만 붙어있는 상태다. 하지만 실험이 시작되면 NaI 섬광단결정체의 무게를 200kg로 늘려, 두 배 더 커진 그물로 윔프를 잡아낼 계획이다.

COSINE-200 실험구역을 나오는 길목엔 AMoRE(아모레)-Ⅱ 실험구역이 있다. 몰리브데넘(Mo)-100 이중베타붕괴를 연구해 중성미자의 특성을 밝히는 실험이다. 이 실험도 Y2L에서 진행했던 AMoRE-Ⅰ실험의 규모를 키웠다. 약 30kg이었던 리튬 몰리브데이트(Li2MoO4) 섬광단결정체를 178kg로 키워 진행할 계획이다. 이중베타붕괴 현상의 관측확률을 높였다.

‘잡음’을 제거하는 일도 중요하다. 뮤온은 엄지손톱만한 면적을 기준으로 생각했을 때 지상에선 초당 1개씩 통과한다. 그리고 예미랩에선 분당 0.00000001개 통과한다. 잘 막아냈지만 AMoRE-Ⅱ 실험을 하기엔 부족하다. 때문에 AMoRE-Ⅱ 실험장치는 2층으로 구성돼 있다. 1층엔 검출기, 2층엔 스테인리스 수조를 설치한다. 스테인리스 수조에 초순수(아주 순수한 물)를 채우면 지나가는 뮤온을 검출할 수 있다. 만약 수조에 뮤온이 지나간다면 그 시간 동안 얻은 데이터는 모두 버린다.

전체 실험구역 중에서 가장 넓은 건 LSC(대형 액체섬광물질 검출기) 실험구역이었다. LSC의 목표는 중성미자 또는 암흑광자를 직접 만들어 관찰하는 것이다. 실험구역은 두 공간이 연결된 형태다. 각각 중성미자 또는 암흑광자를 생성할 가속기가 들어갈 공간과 가속기에서 생성되는 입자를 검출할 대형검출기가 들어갈 공간이다. 대형검출기가 들어갈 공간의 높이는 28m, 지름은 20m다. 이 안에 수조를 놓고, 약 2500t(톤)의 액체섬광물질을 채운다. 올림픽 경기용 수영장에 들어가는 물의 양과 비슷하다.

이재승 IBS 지하실험연구단 연구위원이 AMoRE 실험구역에서 실험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과학동아 DB

실험을 계속하는 한 실패하지 않는다

암흑물질을 찾아도, 중성미자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아내기만 해도 노벨상에 가까워진다. 하지만 지하실험연구단 관계자들은 입을 모아 “앞으로 4~5년 사이에 전에 없던 관측결과가 나오긴 어려울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런데 표정이 좋았다. 이 연구위원은 “(암흑물질이나 중성미자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못 찾더라도 실험 그 자체로 중요하다“며 ”못 찾은 데이터를 활용해 다음 실험 방향을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노벨상을 받을 수도, 받지 못할 수도 있다. 산속 1000m가 일터니 주중엔 가족들과 떨어져 지내야 한다. 그럼에도 이 연구위원이 연구를 계속하는 이유는 뭘까.

“이유요? 모르죠. 그냥 너무 재미있어요. 전 너무 재미있어서 계속하고 싶더라고요. 예미랩은 우리가 ‘가진’ 첫 번째 지하실험실이에요. Y2L의 경우엔 수력발전소에 세들어 사는 실험실이라 오후 6시면 실험실을 비워야 했죠. 여기선 마음껏 실험할 수 있다는 게 제일 좋아요. 내년 이맘때 오시면 확 달라져 있을 겁니다. ‘여기가 저기였나?’ 하실 거예요.” 

[정선=김소연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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