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모습으로 만나자" 용산서 간부 극단 선택... '곁가지'만 훑는 특수본

김도형 2022. 11. 12.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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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서 삭제' 의혹 받던 전 정보계장
"고맙다" "사랑한다" 죽음 암시 통화
'윗선' 수사는 "감감무소식"… 변죽만
11일 스스로 목숨을 끊은 서울 용산경찰서 전 정보계장 자택 앞에서 경찰관들이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뉴시스

‘이태원 핼러윈 참사’ 전 인파 사고를 경고한 정보보고서를 참사 후 삭제한 혐의로 경찰청 특별수사본부(특수본) 수사를 받던 서울 용산경찰서 전 간부가 11일 숨진 채 발견됐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추정되지만, 참사 원인과 책임 규명보다 현장 경찰관들 책임 추궁 등 사후 처리에 초점을 맞춘 특수본의 곁가지 수사 방식이 영향을 미친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특수본 "소환 통보 안 했다"... 용산서 침통

경찰에 따르면, 용산서 전 공공안녕정보외사과(정보과) 계장 A경감이 이날 낮 12시 44분쯤 강북구 자택에서 숨진 채 가족에 의해 발견됐다. 경찰은 그가 극단적 선택을 했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구체적 경위를 조사하고 있다.

A경감은 이달 2일 용산서 정보관이 작성한 핼러윈 안전 사고를 우려하는 내용의 정보보고서를 사무실 PC에서 삭제하는 데 관여한 인물이다. 앞서 경찰청 특별감찰팀은 7일 해당 보고서가 삭제된 사실과 이 과정에서 A경감과 상관인 전 정보과장 B경정이 직원들을 회유ㆍ종용한 단서를 잡고 특수본에 수사의뢰했다. 이들은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ㆍ증거인멸ㆍ업무상과실치사상 혐의로 입건된 뒤 대기발령 조치됐다.

특수본 관계자는 “두 사람에게 아직 소환 통보를 하지 않았다. 압수물 분석을 마친 뒤 조사할 예정이었다”고 말했다.

5일 서울 중구 시청역 인근에서 대규모 인원이 참석하는 '이태원 참사 추모 촛불 집회'가 열리자 경찰이 펜스를 치고 보행로 우측통행을 안내하고 있다. 뉴시스

용산서는 침통한 분위기다. A경감은 전날 몇몇 동료들에게 전화해 “고마웠다” “사랑한다” “다음엔 좋은 모습으로 만나자” 등 죽음을 암시하는 말을 했다고 한다. 고인과 통화한 한 동료는 “그게 작별 인사가 될 줄 몰랐다”고 비통해했다. 용산서 소속 정보관도 “대통령실이 용산으로 온 뒤 밖에서 늘 고생하던 분이었다”며 안타까워했다.

A경감의 사망 소식이 알려지자 일선 경찰관들은 모든 참사 책임을 경찰에 떠넘기고 있다는 비판과 불만을 쏟아내고 있다. 서울 일선서 과장급 간부는 “윤석열 대통령은 ‘경찰이 왜 현장에서 4시간 동안 쳐다만 보고 있었느냐’고 했는데, 우리가 정말 그랬느냐”면서 “대통령의 호통을 쉽게 견뎌낼 경찰관은 없을 것”이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특수본은 이날 입장문을 통해 “국가에 헌신한 고인의 명복을 빌고 유가족에게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며 “이태원 참사 수사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경찰청은 특별관리 방안을 마련해 B경정 등 수사 대상에 포함된 용산서 관계자들을 보호할 계획이다.


사후 문제점만 파헤치는 수사... '윗선'은 언제?

A경감이 숨진 정확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참사를 유발한 근본 원인과 책임 소재는 외면한 채 결과만 두고 파헤치는 데 골몰한 특수본 수사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많다.

1일 특수본 출범 후 열흘 넘는 기간 입건된 이는 이임재 전 용산서장(총경), 박희영 용산구청장, 최성범 용산소방서장, 류미진 전 서울경찰청 상황관리관(총경), B경정, A경감, 해밀톤호텔 대표이사 등 7명이다. 참사 당일 경찰ㆍ소방당국의 현장 지휘 계통을 제외하면, 사실상 보고서 삭제와 주변 현장의 불법증축 수사만 속도를 내고 있는 셈이다. ‘토끼 머리띠’ ‘각시탈’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떠돌던 사고 원인 제공자 수사도 모두 ‘혐의 없음’으로 결론 났다.

경찰 관계자는 “보고서 삭제는 사고 후속 조치와 관련한 잡음이고, 호텔은 2013년부터 불법증축 이행강제금을 내 참사 발생과 직접적 인과 관계가 없다”면서 “누군가 희생양을 찾기 위한 ‘마녀사냥’ 수사로 흐르는 게 아닌지 우려된다”고 비판했다.

4박 6일간의 동남아시아 순방에 나선 윤석열 대통령이 11일 경기 성남 서울공항에 도착해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의 배웅을 받고 있다. 성남=서재훈 기자

‘윗선’ 수사도 감감무소식이다. 특수본은 행정안전부나 서울시 등 지휘보고 체계의 꼭짓점에 있는 기관들에 대해선 압수수색 같은 강제수사를 개시하지 않고 있다. 김동욱 특수본 대변인은 이날 “법리 검토를 진행하고 있다. 어느 정도 구체적 사실 관계가 확인돼야 한다”는 원론적 입장만 되풀이했다. 재난 규명은 신속한 증거 수집이 중요하다며 용산서, 용산소방서, 용산구청 등을 즉각 압수수색한 것과 대비된다. 한 지구대 경찰관은 “정무적 책임을 지고 물러나는 고위공직자가 하나도 없다”며 “실무 인력이 ‘독박’을 쓰라는 신호”라고 직격했다.

특수본은 이날 박 구청장을 출국금지했다. 그는 업무상과실치사상 혐의와 함께 참사 당일 현장 인근을 두 차례 점검했다는 해명이 거짓이었다는 의혹도 받고 있다. 현재까지 출국금지된 피의자는 박 구청장과 해밀톤호텔 대표 등 2명이다.


서울시 안전 공무원도 극단 선택

한편, 서울시 재난안전 관련 업무를 담당했던 안전지원과 소속 공무원도 이날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유서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경찰은 극단적 선택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안전지원과는 폭염, 한파, 지진 등 자연 재해와 관련된 종합대책을 맡고 있는 부서다. 다만, 서울시는 해당 직원이 이태원 참사 당일 재난상황실이나 사고 현장에서 근무한 사실은 없다는 입장이다. 특수본 관계자도 “지금까지 서울시 관계자 가운데 수사 대상에 오른 피의자나 참고인은 없다”고 말했다.

김도형 기자 namu@hankookilbo.com
원다라 기자 dara@hankookilbo.com
강지수 기자 s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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