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두툼한 슬픔
텔레비전에서 어른들이 하는 말을 들었다. 스마트폰 시대에 텔레비전을 보는 일은 고전적으로 느껴진다. 웃음도 슬픔도 텔레비전을 통해 처음 배웠기 때문일까. 나는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말에 대한 믿음을 간직하고 있는 편이었다. 재난이 발생하면 텔레비전을 먼저 켠다. 속보를 확인하고 여러 단계 책임자의 신중한 발표를 듣는다.
내 마음속 텔레비전은 얇고 평평한 물건이 아니다. 둥근 유리가 상자 같은 몸체와 달라붙어 있는 두툼한 것이다. 지금은 거의 사라졌지만, 음극선관(Cathode-Ray Tube)을 의미하는 ‘CRT’ 텔레비전은 20세기의 거실에서 늘 육중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발명가 카를 페르디난트 브라운을 기리며 브라운관 텔레비전이라고도 부른다. 미국에서는 텔레비전을 CRT의 T를 따서 ‘튜브’라고도 하는데 ‘유튜브’도 여기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이다.
어렸을 때 나는 텔레비전에서 어른들의 묵직한 말을 여러 번 들었다. 기억 속 1순위는 1980년 11월30일 동양방송이 문을 닫던 날이다. 동양방송에서는 <6백만불의 사나이>를 볼 수 있었는데 전두환 정부의 언론 통폐합 명령 때문에 그날 마지막 방송을 하는 것이었다. <호돌이와 토순이>를 진행하던 윤유선 언니도 끝인사를 했다. 고별인사를 하는 아나운서의 떨리는 목소리는 이것이 두렵고 부당한 일이라고 대신 전하는 것 같았다. 이은하씨는 그날 ‘아직도 그대는 내 사랑’을 부르며 펑펑 울었고, 정부로부터 3개월간 방송 출연을 금지당했다.
방송을 통해 말이 전파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공식적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슬픔과 아픔을 함께 나눈다는 것은 무엇일까. 기준을 두께로 잡는다면 얼마나 두툼해야만 하는 것일까. 지난 몇 주간 나는 이 기준에 큰 혼란을 느껴야만 했다. 초박형 모니터처럼 얇은 말들이 비극의 현장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흘러나왔다. 누구보다 책임을 느껴야 할 어른들은 초경량의 언어를 선보였다. 언어의 무게를 달아 책임을 지울까봐 달아나는 도망자들처럼 보였다.
어린이는 슬픔과 아픔을 어떻게 말할까. 그들의 슬픈 언어를 위해서는 슬퍼하는 몸의 두께를 옮길 번역가가 필요하다. 제자리를 찾지 못하는 입술로, 들먹이는 어깨로, 걷어차는 두 다리로 말한다. 이 비통함을 평평한 말로 옮기기는 어렵다. 우리는 그것을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이라고 부른다. 두툼하고 두툼하다. 어른들은 그 슬픔을 누르고 눌러서 더 얇게 표현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너무 얇아지면 안 된다. 그러면 우리는 그것이 과연 슬픔이냐고 물어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어른에게도 두툼하게 울 수밖에 없는 때가 있다.
고전학자인 앤 카슨에게는 오빠가 있었고 그는 타지를 떠돌다가 세상을 떠났다. 앤 카슨은 오빠를 애도하며 <녹스>라는 책을 만들었다. 종이를 한 장 한 장 옆으로 붙여서, 더 이어지기를 바라는 생명처럼 길게 펼쳐지도록 만든 이 책의 왼쪽에는 카툴루스의 슬픈 시를 번역하는 과정이 있고 오른쪽에는 단상과 기억을 적은 글, 유품의 조각 등이 실려 있다. ‘녹스’는 라틴어로 ‘밤’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이 책에서 앤 카슨을 휘감았던 눈물의 밤을 읽는다. 독자는 함께 슬퍼하고 그의 손처럼 책을 붙잡고 새벽으로 걷는다.
이 책은 앤 카슨의 애통함처럼 두툼하고 무겁다. 192쪽이지만 손으로 풀칠해서 제본했기 때문에 거듭 접힌 면이 두께를 만든다. 표지에는 수영복을 입고 물안경을 쓴, 어린 오빠의 사진이 있다. 첫 문장에서 앤 카슨은 “나는 나의 비가를 온갖 빛으로 가득 채우고 싶었다. 그러나 죽음으로 우리는 인색해진다. 그것에는 더 이상 허비할 게 없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그는 죽었어. 사랑도 이를 어찌할 수가 없다”고 쓴다.
두껍게 슬퍼해야 한다. 두툼하게 말해야 한다. 어린이처럼 무겁게 애도해야 한다. 인색함이 우리의 마음을 점령해버리지 않도록 공동체의 기억으로 남겨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회복해야 하는 감각이다.
김지은 서울예대 문예학부 교수·아동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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