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히’는 없었다, 행복에도 진실에도
손택수 지음
문학동네
시인은 관찰자거나 철학자다. 아니면 양심적인 위인이거나. 이 셋 중에 하나가 아니라면 우리가 굳이 시인의 시집을 읽을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이다. 우리가 시집에서 기대하는 건 어떤 발견이나 깨달음, 위안 같은 것들이다.
손택수 시인의 새 시집은 그런 점에서 권하고 싶은 시집이다(물론 독자에 따라 감상이 다르겠지만). 실은 세 요소가 골고루 들어 있다고 말하고 싶다. 대체로 시집은, 특히나 좋은 시집은 줄달음쳐 읽게 만드는 페이지터너(page-turner)가 아니다. 시간을 들여, 시행과 대화하며 읽어 나갈 때 새록새록 재미가 돋아난다. 이 시집도 그렇다는 얘기다. 다음은 사례 연구.
①발견: 시의 오래된 형식은 얼핏 우스꽝스럽다. 제목이 있고 제목을 풀어쓴 본문이 있다. 여기서 벗어날 수는 없다. 물론 제목은 시를 이해하는 키워드다. 시집에 실린 ‘단도’는 여울의 “유속이 돌을 만나 더/ 빨라지는 지점, 꼿꼿하게/ 역류하던 피라미들”을 그린 작품이다. 그런데 ‘단도’라니. 시인은 유연한 지느러미로, 꼿꼿하게 물살을 헤치고 튀어 오르는 피라미의 모습에서 숫돌에 날을 벼리는 단도를 발견한 것이다. 눈썰미의 승리다.
②깨달음: 나무에 관한 상상력은 손씨의 전문 분야다. 2010년 시집 『나무의 수사학』에서 선보였던 바다. 이번 시집의 ‘녹색평론’의 첫 4행은 다음과 같다. “나무의 중심은 죽음이다/ 바깥쪽에서 안쪽으로 밀려난/ 세포들이 단단한 심재부를 이루어/ 우뚝해지는 것이 나무,” 나무의 생태학이 별안간 철학적 색채를 띤다.
③위안: 고만고만한 열등감에 휩싸인 존재인 우리는 남의 고통에서 위안을 받는다. ‘완전한 생’은 실은 불완전한 생에 관한 이야기다. 시인은 “완전히 행복했던 적”도 “완전히 불행했던 적도 없는 것 같다”고 썼다. 완전히 진실했던 적도, 완전히 진실하지 않았던 적도 없다. 진실의 중심에서조차 얼마간 스스로를 의심했고, 위선의 중심에서는 수면장애를 앓았기 때문이다. 시인은 쓴다. 나라는 존재는 “조금씩은 어긋나 있는 생을 자전축처럼 붙들고 회전하는” 신세라고.
완전한 삶을 누리는 경우라면 손택수의 시집을 읽을 필요 없다. “그 많은 잎들 다 어디 가고/ 혼자 떨고 있나 싶을 때”(시인의 말) 시집 책장을 펼치자.
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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