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월의쉼표] 우리 둘만 아는 이야기

2022. 11. 11. 2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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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물었다.

알아볼 수 없도록 휘갈겨 쓰는 나의 서명이 무엇을 쓴 것이냐고.

엄마는 옆집 새댁에게 그것을 보여주었고, 새댁은 그것을 친한 동네 아주머니에게 주었으며, 아주머니는 그것을 나보다 한 살 아래인 딸에게 건넸는데 딸이 학교에서 그것을 읽다가 담임선생에게 압수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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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물었다. 알아볼 수 없도록 휘갈겨 쓰는 나의 서명이 무엇을 쓴 것이냐고.

열한 살 때였다. 인광석(燐鑛石). 사람 인(人)과도 빛 광(光)과도 상관없는 그 단어를 어디서 접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사람과 빛과 상관있을 것 같은 특별한 돌멩이를 떠올렸고 그것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홀린 듯 이야기를 지어 썼다. 오묘한 푸른빛을 내뿜는 주먹만 한 인광석을 품고 지구로 온 소년, 화성의 마지막 생명체에 대한 이야기를.

어설픈 공상과학(SF) 흉내에 권선징악 줄거리에 우연의 남발에 도식적인 결말까지 유치하기 짝이 없는 글이었으나, 그것을 쓰는 동안 나는 배고프지도 않고 졸리지도 않고 몸과 정신이 한없이 맑고 뜨겁게 깨어 있는 놀라운 경험을 했다. 스프링 노트 한 권을 꽉 채운 그 이야기를 엄마에게 보여드렸다. 엄마는 옆집 새댁에게 그것을 보여주었고, 새댁은 그것을 친한 동네 아주머니에게 주었으며, 아주머니는 그것을 나보다 한 살 아래인 딸에게 건넸는데 딸이 학교에서 그것을 읽다가 담임선생에게 압수당했다. 그리고 선생은 그것을 분실했다며 돌려주지 않았다.

괜찮았다. 다시 쓰면 되니까. 다 외우니까. 하지만 실제로 다시 쓰지는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옆집 새댁이 집에 왔다. 친한 동네 아주머니의 딸, 담임선생에게 내 노트를 압수당했다는 그 애가 그것을 다시 읽고 싶어 한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너무 좋아하여 수차례 읽었는데 선생에게 빼앗겨 상심했다고. 그리고 그 애가 지금 대학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다고.

그날 나는 다시 연필을 잡았다. 독자가 생겼으니까. 새댁에 따르면 그 애는 인광석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다고 했다. 결말이 슬프다고도 했다. 나는 결말을 해피엔딩으로 바꾸었다. 인광석 묘사에 노트 한 장을 통째 할애했다. 결과적으로 결말은 더욱 작위적이 되었고 인광석은 너무 장황한 묘사로 글의 흐름을 깨뜨렸다.

괜찮았다. 그 애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해 들었으니까. 더 구체적인 독후감을 그 애에게 직접 듣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 애의 자리였다는 빈 책상 위 흰 국화꽃들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우리는 만난 적도 말 한마디 나눠본 적도 없지만 우리 둘만 아는 이야기로 연결되어 있다고. 그것을 잊지 않기 위해 이야기의 주인공 이름을 내 평생의 서명으로 삼겠다고. 화성에서 온 소년, 엘레프. 그것을 휘갈겨 쓴 것이 내 서명이다.

김미월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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