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족하기에 우리에겐 형제애가 절실합니다
[[휴심정] 김형태변호사의 공동선]
지난 여름 비가 참 줄기차게 내렸지요. 마당이 늘 축축하게 젖어 있다 보니 생명력 강한 국화들도 잎이며 줄기가 시커멓게 녹아내렸습니다. 봉숭아도 꽃은 피고 졌지만 손대면 툭 하고 터질 것만 같은 씨방들은 도통 볼 수가 없네요. 파란 하늘 아래 수백개의 진홍색 감들이 매달려 있던 창문 밖 풍경도 올해엔 겨우 몇십개, 모과나무에도 모과가 없어요. 잦았던 비 때문인지 벌들이 사라져서인지. 둘 다겠지요.
이른 새벽 잠이 깨어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예수회 소책자 <이냐시오의 벗들> 10월호를 읽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10월 기도 지향이 “연대와 형제애와 환대의 공동체가 되어서 시노달리타스를 실천하는 것”이더군요. 시노달리타스는 “공동합의성”이라 번역하긴 했지만 마땅한 우리말이 없어서 그냥 원어 그대로 쓴다네요. 기도 지향에서 표현한 대로 시노달리타스란 ‘연대, 형제애, 환대의 공동체’를 뜻하는 거겠지요. 그런데 소책자에 실린 다른 글을 읽으면서 새삼 이 기도 지향의 뜻을 되새기게 되었습니다.
일본에 파견된 한국 예수회 신부님이 칠팔십대 할아버지 신부님들 세 분과 공동체를 이루어 살고 있답니다. 공동체 식사 시간에도 적막강산이라, ‘형제애’를 나누려고 말을 걸면, 귀가 안 들리는 한 노인네는 인생 일대기를 끝도 없이 되풀이하신다네요. 하긴 구순 우리 어머니도 늘 반복하시는 몇 가지 레퍼토리가 있지요. 치질 수술 이야기, 이북에 두고 온 고모 이야기, 가게 물건 도둑맞은 이야기.
어느 날 한국 신부님이 평소 거의 말이 없는 한 노인네 신부님께 “행복하세요?” 하고 물었더니 그런 질문 하지 말라며 화를 내더라네요. “왜 내게 그런 것을 묻습니까? 나는 이제까지 행복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고, 그저 맡겨진 ‘일’과 ‘파견된 곳’에서 내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나는 수도회와 형제들에 대해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습니다. 내게 ‘행복한가 어떤가’라는 그런 질문을 하지 마십시오.” 신부님은 글에서 매일 세 번 얼굴 맞대고 있는 네 수도자들을 상상해보라며 한탄을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결론을 맺습니다. 좌충우돌 살아가는 이 모습에도 나름의 조화로움을 깨닫게 해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린다고. 그 약함들 덕분에 하느님께 또 형제들에게 의지하며 살아간다는 것에 새삼 대견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고. 계속 지치지 말고 노력하기를 멈추지 않도록 하느님께 간절히 청해본다고.
우선 놀랍지요? 평생을 하느님께 바친 수도자가 행복한 적이 없고 형제들에게 아무런 기대도 없고 그저 맡겨진 일을 할 뿐이라니요. 그리고 지나온 자신의 삶을 레코드판처럼 반복하는 신부님 역시 팔십 평생 자신을 비우는 수도자 길을 걸었음에도 여전히 ‘나’로 꽉 차 있다는 거 아닌가요. 겨우 네 사람 모인 수도자 공동체도 이런 모습이니 그저 내 한 몸 살아가기 급급한 이 속세 사람들 수십, 수만, 수억 명 모인 공동체들은 오죽하겠나요. 이 세상은 온통 싸움과 부조리, 슬픔, 고통이 넘쳐나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바로 그렇기 때문에’ 교황님은 “연대, 형제애, 환대”의 시노탈리스를 말씀하시는 거라고 나는 알아듣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거룩한’ 하느님의 백성들이라면 굳이 연대며 형제애라는 말이 필요도 없겠지요. 하지만 우리는 저마다 다른 몸, 다른 성격, 다른 인품, 다른 사고방식을 가지고 태어나 아무리 하느님 백성이라도 도저히 서로 넘을 수 없는 한계에 갇혀 있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시노탈리스, 공동체 연대, 형제애가 기도 지향인 것이죠.
20여년 전 성철 스님 열반에 드셨을 때 해인사 일대에는 수십만 인파가 몰렸었지요. 지금도 성철 스님을 기리는 이들이 아주 많습니다. 그런데 나는 스님의 세 권짜리 <백일법문> 책들을 두어 번 되풀이해 읽으면서 이런 물음이 떠오르더군요. 스님은 늘 ‘돈오돈수’(頓悟頓修), 즉 단박에 깨닫는 거고 그러면 단박에 닦는 거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면서 깨닫는 건 단박이지만 그 뒤에도 꾸준히 닦아야 한다는 ‘돈오점수’(頓悟漸修)는 제대로 깨닫지 못한 자들의 엉터리 가르침이라고 단호하게 꾸짖습니다. 돈오돈수냐 돈오점수냐는 중국 불교의 오랜 논쟁거리였습니다. 당나라 때 육조 혜능 스님이 돈오돈수의 창시자라면 그 한참 뒤 제자 종밀 스님이나 고려의 보조국사 지눌 스님은 돈오점수를 말씀하셨지요.
나는 도대체 깨달음이란 게 무언가, 어떤 상태인가, 무얼 깨닫는다는 건가에 대해 아주 오랜 세월 동안 궁구(窮究)해왔습니다. 궁구, 끝까지 파고 들어본 뒤 현재까지 나름 다다른 결론은 이렇습니다. 붓다가 깨달으신 깨달음이란 이 세상만사가 어떤 독립적이고 변하지 않는 실체가 아니라는 걸 아는 것이라고. 만사가 서로 얽혀져 존재하면서 끊임없이 변해가는 걸 아는 것. ‘그걸 누가 몰라?’ 하고 쉽게들 생각하지만 사실 우리는 이 이치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합니다.
나는 나로서 독립되어 있고, 그래서 사람이건 다른 생명들이건 사물이건, 나가 아닌 ‘남’은 나의 수단으로 여기고, 또 이 나는 죽은 뒤에도 영원히 존속할 거라고 믿고 행동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늘 나 중심입니다. 내가 등산 가는데 산길에 걸리적거리는 사람들이 많으면 짜증이 나고, 성당 늘 앉는 내 자리에 누가 먼저 와서 앉아 있으면 더럭 화가 납니다. 하지만 내 윗대 수천 수만의 조상들 유전자들이 오늘 나를 이룬 거고, 내가 먹는 식물, 동물이 내 몸을 이룬 거고, 태평양 바닷물이 하늘에 올라가 비가 되어 내린 물이 내 피가 된 거니 어디 독립 불변의 ‘나’랄 게 없음은 너무도 분명합니다. 우리 모두는 그저 하나의 사건일 뿐, 독립 불변의 실체가 아닌 피조물에 불과하고 이 세상 삼라만상이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이런 이치를 제대로 아는 것, 이게 바로 깨달음이라고 나는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걸 얼마나 실감나게 알아 모시고 행동하느냐에 따라 깨달음의 수준은 천차만별이겠지요. 그리고 이 이치를 잘 알았다 해서, 피조물에 불과한, 불교식으로는 조건들의 만남으로 잠시 이루어진 즉 연기(緣起)된 사건에 불과한 ‘내’가 무슨 천국이나 열반이라는 ‘어떤 곳’에 도달하는 건 전혀 아닐 겝니다.
살아가는 동안 남이 나와 한 몸 한 형제라는 걸 순간순간 잊지 말고, 그리고 나에게도 다른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으면, 이 자유로움이 바로 구원이요, 열반이라고 나는 믿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로지 ‘나’의 깨달음을 주제로 삼고 있는 돈오돈수 논쟁은 이제 접어야겠지요.
‘나’의 깨달음, ‘나’의 구원을 넘어선, 삼라만상의 하나됨을 불교는 ‘화엄’(華嚴)이라, 기독교 전통은 ‘공동체의 연대, 형제애, 환대’, ‘시노탈리스’라 가르치고 있지요.
그렇습니다. 약하고 부족한 우리들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형제애와 화엄을 열심히 닦아갑니다. 중세 때 성인 요한 베르흐만의 말씀대로 나의 가장 큰 수행은 공동체 삶입니다.
글 김형태 변호사·공동선 발행인
*이 시리즈는 김형태 변호사가 발행하는 <공동선>과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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