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아리] 슬픔을 정치에 이용하지 말라?
尹 수습책 내놓는 국민회견 없어 이례적
가장 빨리 보고받은 대통령실, 결과는?
편집자주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선보이는 칼럼 '메아리'는 <한국일보> 논설위원과 편집국 데스크들의 울림 큰 생각을 담았습니다.
서울 영등포역에서 무궁화호 탈선 사고가 발생한 지 나흘 만인 지난 10일 KTX열차가 고장으로 멈춰 섰다. 승객 400여 명이 탑승하고 있었다. 이태원 참사 이후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속담이 딱 들어맞는 요즘이다. 일본 신칸센(新幹線)은 1964년 개통 이래 자연재해가 아닌 정비불량으로 인한 탈선사고가 단 한 건도 없다. 2015년 6월 30일 승객 800명을 태우고 도쿄에서 오사카로 향하던 신칸센에서 한 남성의 분신으로 화재가 발생했다. 다행히 천장, 시트, 바닥은 특수소재였고, 옆 칸으로 불이 옮겨붙지 않았다.
도쿄 근무 당시 이 기사를 쓰던 필자는 일본 국토교통성이 192명이 숨졌던 2003년 대구지하철화재 참사 때 조사팀을 파견해 한국 사례를 연구한 뒤 강화된 내화기준을 마련한 것을 알고 가슴 쓰렸던 기억이 생생하다. 우리는 왜 성수대교 붕괴, 삼풍백화점 붕괴 같은 대형재난과 희생을 치르고도 바뀌었다는 느낌을 갖기 힘들까. 2014년 세월호 침몰은 가장 참혹한 참사로 기억된다. 정부가 세월호 사태를 계기로 내놓은 첫 조치는 국민안전처 신설이었다. 안전행정부의 안전관리본부, 소방방재청, 해양경찰청이 융합돼 차관급 3명, 소속인원 1만여 명의 거대조직이 태어났다. 그러나 2년 8개월 만에 국민안전처는 없어졌고 지금의 행정안전부로 흡수통합됐다. 뭐가 되든 연속성이 없고 용두사미로 느껴진다.
대형재난은 정부의 신뢰를 갉아먹는 결정적 요인이다. 그러다 보니 대통령의 대국민 사과가 불가피해진다. 취임 첫해부터 사고공화국이 된 김영삼(YS) 대통령은 그때마다 국민에게 고개를 숙여야 했다. 1994년 10월 21일 성수대교 붕괴 7시간 만에 이원종 서울시장을 경질했다. 이어 10월 24일 청와대에서 “대통령으로서 부덕함을 뼈저리게 느낀다”며 TV 앞에 나서 고개를 숙였다. 참사 발생 사흘 만에 이뤄진 민심수습책이었다. 대국민 사과에 관한 한 노무현 대통령은 측근비리로 임기 초 위기에 몰렸을 때, 전면적 사과 대신 ‘불법대선자금이 한나라당의 10분의 1을 넘으면 정계를 은퇴하겠다’는 역공을 펴기도 했다. 하지만 2005년 11월 쌀협상 국회비준에 반대하는 농민 1만여 명이 국회로 진입하려다 2명이 숨지자 기자회견을 열어 국민에 사죄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사과에 무척 인색했다. 304명의 목숨을 앗아간 세월호 참사가 난 지 34일 만에야 떠밀리듯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최종책임은 대통령인 저에게 있다”고 허리를 굽혔다.
사과를 주저할수록 뒤끝은 안 좋다. YS는 외환위기 당시 대통령 퇴임 후 경제청문회 개최의 필요성이 등장한 뒤에야 “모든 책임은 저에게 있다”며 다시 한번 제대로 고개를 숙였다. 역대 사례를 보면 지지율이 높을수록 상대적으로 사과에 주저했던 흔적이 역력했다. 그러나 윤석열 대통령은 저조한 국정지지도에도 형식을 갖춘 대국민사과나 각료 문책에 머뭇거리는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 “행안부를 중심으로 신속한 구급 및 치료가 이뤄지도록 만전을 기하라”는 윤 대통령의 지시가 언론에 처음 공개된 건 지난달 29일 밤 11시 36분께다. 소방에 최초 신고(밤 10시 15분)가 접수돼 구급차가 출동한 지 1시간 20여 분 만이었다. 이날 가장 빨리 보고받은 컨트롤타워는 용산 대통령실이었다. 국가기능부재의 총체적 실패에서 컨트롤타워가 어떻게 작용했는지 구체적 내용은 나오지 않고 있다. 재난상황에서 가장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위기관리 주체는 대통령제에서 가장 압도적인 통치수단을 가진 대통령 자신이다. 향후 수습·문책과정에 국민이 동의하지 않는 한 정권과 국가 모두가 불행해진다. “슬픔을 정치에 활용하지 말라”는 게 아직도 용산의 입장인가.
박석원 논설위원 spar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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