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를 파괴하는 질병”...경제학자 고집이 인플레 잡았다 [BOOKS]
빈야민 애펠바움 지음, 김진원 옮김, 부키 펴냄
경제학자는 학문의 상아탑에서만 고고하게 존재할 수 없다. 성공한 혁명가가 되거나, 가짜 예언가가 될 운명이다. 이들의 이론이 정책이 될 때 위대한 번영도, 재앙도 일어난다.
뉴욕타임스 편집위원이자 경제·비즈니스 분야 주필인 빈야민 애펠바움이 쓴 ‘벽돌책’이 나왔다. 2008년 금융위기 취재로 퓰리처상 후보에 올랐고, 연방준비제도(연준)를 오랫동안 취재한 베테랑 기자의 첫 책은 경제사를 다룬다. 그는 1969년부터 2008년을 책의 원제처럼 ‘경제학자들의 시간’이라 명명한다.
1950년대 까지도 미국에서는 경제학자의 현실 참여가 드물었다. 1950년대 초 폴 볼커는 뉴욕 연방준비은행에서 출세를 포기하고 인간 계산기처럼 일하며 윗사람을 위한 자료 정리 같은 허드렛일을 했다. 경제학자들이 하위직에 몰려 있을 때 고위직은 은행가, 변호사, 돼지 축산업자 등이 차지했다.
그런 시기에 혁명적인 경제학자가 등장했다. 밀턴 프리드먼을 위시한 경제학자들은 과세와 공공지출을 제한하고 규모가 큰 경제 부문에서 규제를 완화하고, 세계화를 향한 길을 마련했다. 닉슨 대통령을 설득해 징병제를 폐지했고, 연방 법원이 독점금지법을 적극 집행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1970년 아서 번스는 경제학자가 중앙은행을 이끄는 시대를 열었고, 미국 정부가 임용한 경제학자 수가 1950년대 2000여명에서 1970년대 말 6000여 명으로 폭증했다. 어떤 경제학자보다 전 세계인 삶에 큰 영향을 미친 프리드먼의 장점은 언변과 설득이었다. 저자는 그를 ‘타고난 영업가’로 표현한다.
다채로운 학자들을 탐구하는 이 책에서 일단 눈이 가는 챕터는 3장 ‘인플레이션과의 전쟁’. 오일쇼크 이후 미국은 물가와의 전쟁을 벌였다. 프리드먼에게는 원인이 명확했다. 물가가 오른 이유는 경기가 하락했기 때문이며 인플레이션이 오른 이유는 정부가 통화를 남발했기 때문이었다. 미국 통화 공급률은 60년대에 44%, 70년대에 78%가 올랐다. 포드 대통령은 1974년 인플레이션을 주제로 연 회의에 프리드먼을 초청했다. 그는 “이 질병을 저지하지 않으면, 개인적, 정치적, 경제적 자유가 파괴될 것을 비롯해 막대한 피해를 안길 것”이라며 “이 질병을 치료하는 데는 오직 통화 발행을 줄이는 것뿐”이라 역설했다.
하지만 후임인 카터 대통령은 아서를 연준 의장으로 임명하고 통화를 오히려 더 풀었다. 70년대 말 10% 넘게 폭등한 물가는 카터와 케인지안의 시대를 동시에 침몰시켰다. 카터가 마지막으로 임명한 연준 의장은 키 2m의 거인 폴 볼커였다. 그는 10년 일찍 대학에 간 누나가 받은 25달러 용돈을 자신도 동일하게 받은 경험을 통해 ‘단돈 25달러’로 인플레이션의 위험을 배웠다. 케인스주의를 ‘헛소리’라 말해왔고, 값싼 양복에 싸구려 시가를 피웠던 짠돌이였다.
1979년 9월 취임 직후, 볼커는 인플레이션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그해 상반기 기준 금리는 9.75~10.5%였다. 볼커는 통화공급 고삐를 바짝 조였고 은행 우대 금리는 20%를 넘어섰다. 사람들은 더 이상 차와 식기세척기를 사지 않았고 노동자 수백만 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볼커는 팔리지 않는 차 열쇠들과 건설 목재 더미를 선물로 받았다. 건설업자들은 볼커 수배 전단을 찍었다. 죄명은 ‘아메리칸드림 살해범’이었다.
1981년 취임한 레이건 대통령은 10년 전부터 친분을 쌓은 프리드먼에게 직접 통화주의를 배운 인물이었다. 그는 고통을 받아들였다. 볼커 이후 40년 동안 미국 정규직 남성 노동자의 소득은 과거 수준을 넘지 못했다. 높아진 금리로 대출 기관이 번영하면서 금융산업은 새로운 경제 성장동력이 됐다. 볼커 이후 90년대까지 호주, 캐나다, 이스라엘 등이 물가 안정 목표제 실험을 이어받았다. 인플레이션을 잡으려는 노력은 종교적 현상이 됐다.
경제학자들의 크로니클은 흥미진진하다. 1974년 칵테일 냅킨에 곡선 하나를 그려 감세를 공화당 경제 정책 기조로 정한 아서 래퍼, 시각 장애인 경제학자로 닉슨이 징병제를 폐지하도록 이끈 월터 오이, 항공 여행 규제를 완화한 알프레드 칸, 게임이론가로 인간 생명을 달러 가치로 환산하는 방법을 고안한 토머스 셸링 등이 이 책이 소개하는 영웅들이다.
반면 정책 입안자가 된 경제학자의 실패도 많았다. 효율성만 추구하면서 값싼 제품을 수입하면서 고임금 일자리와 맞바꾸기도 했다. 교육과 사회 기반 시설 지출을 줄였고, 환경 규제를 풀어 지구를 병들게 했다. 부의 불평등은 건강의 불평등으로도 이어져 미국의 평균 기대 수명도 낮아지고 있다. 저자는 ‘민물파’‘짠물파’로 불리곤 하는 프리드먼학파와 케인스학파 양측 모두 불평등 문제 해결에는 실패했음을 꼬집는다.
이 책은 무분별한 규제 완화와 통화 공급으로 어업권을 사고파는 ‘종이 물고기’조차 천정부지로 올랐던 아이슬란드가 금융위기로 맞게 된 몰락 이야기로 책을 끝맺는다. 프리드먼의 영광의 시대를 소묘하는 책의 극적인 마침표다. 저자는 “경제학자의 시대에 이뤄진 정책 전환으로 미국은 경제적 진화를 앞당겼다. 하지만 그 편익을 소수 특권층의 호주머니 속으로 쏟아 넣었다”라면서 이 시대를 향한 비판적 시각도 놓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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