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 인터넷 시대 예견…백남준 작품이 돌아왔다

김유태 2022. 11. 11.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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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디오 예술 거장' 백남준 탄생 90주년…국립현대미술관서 추모전시
백남준 '나의 파우스트'.

'예술 깡패.' 백남준(1932~2006)이 생전 '비디오 예술'을 두고 내린 은유다. 1993년 9월, 그는 한 칼럼에 이렇게 쓴다.

"비디오 예술이란 예술이 고급화되던 당시의 정서에 반하여 만인이 즐겨 보는 TV라는 대중매체를 예술 형식으로 선택한 일종의 예술 깡패였다."

비디오 예술은 백남준에게 TV의 '오락적 기능'에서 벗어나 초월적 새 담론을 제시하는 비판적 예술 실험의 무기였다. "아름답게 변하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변하기 때문에 아름답다" "영원성의 숭배는 인류의 가장 오래된 질병"이라는 그의 평소 예술론은 평온했던 전통을 전복하고 해체하려는 주문(呪文)처럼 우리 곁에 남았다.

'비디오 예술' 거장 백남준의 탄생 90주년을 맞아 국립현대미술관이 백남준 전시만 2개를 선보였다. 백남준이 한국 미술계에 끼친 영향을 되짚는 전시 '백남준 효과', 그의 작품 '다다익선'(1988) 복원 과정을 통해 '예술의 원본성'을 되새김질하는 전시 '다다익선: 즐거운 협연'이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열리고 있다. 지난 9일 두 전시장을 천천히 걸어봤다.

백남준 '칭기즈칸의 복권'. '다다익선' 설치를 구상하는 생전의 백남준. 【매경DB】

◆ 인간의 방황, 시간의 질문

전시실 1층. 백남준 대표작 '칭기즈칸의 복권'(1993)이 입구에서 관객을 맞는다. 백남준이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던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 독일관 출품작이다. 네온관이 삽입된 철제 TV 케이스 10개를 자전거 짐칸에 실은 사내가 막 질주 채비를 마쳤다. 본인을 "황색 재앙(yellow peril)"이라 선언한 30세 백남준이 서구 중심의 세계 예술계를 '통째로' 쓸어버리려 했던 포부가 상징화됐다. 이수연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는 "유럽을 휩쓴 칭기즈칸의 실크로드가 '광대역 전자 고속도로'로 대체된 것을 표현한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대작 '나의 파우스트'(1989~1991)는 감탄사를 자아낸다. 2.6m 높이의 종교 제단을 연상시키는 6개 작품은 '교통, 통신, 인구, 농업, 민족주의, 예술'로 분화된다. '예술' 제단엔 토르소가, '민족주의' 제단엔 지구본이 매달렸고 각 첨탑 내부엔 25개 TV에서 전환되는 이미지가 재생된다. '악마(메피스토펠레스)의 장난'과 '인간의 방황'을 주제 삼은 괴테의 희곡 '파우스트'가 백남준화(化)돼 속도와 자본에 노출된 인간 내면을 보여준다. "리움미술관, 에코랜드, 개인이 소장 중인 백남준 '나의 파우스트'는 총 13점인데 6점을 나란히 모았다. 절반에 달하는 '나의 파우스트'가 한곳에 모인 건 국립현대미술관이 아니면 어림도 없는 일"이라고 미술관 측은 설명했다.

◆ '백남준의 손', 그날을 복기하다

겸허한 숭배의 대상인 불상이 모니터 안으로 들어선 'TV 부처'(1994), 모니터에 나타난 구형 달을 바라보는 토끼를 전시한 '달에 사는 토끼'(1996) 등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백남준의 주요 작품 43점이 생생하게 가동된다. 전시 '백남준 효과'의 백미는 그의 장난스러운 가족사진 한 장에서도 드러난다. 백남준의 어머니 조종희 여사의 '장난스러운' 제안으로 찍은 이 사진 제목은 '비밀이 해제된 가족사진'(1984)이다. 피사체의 절반은 남장(男裝)을 하고 있다. 사진관 주인이 이 사진을 외부 진열장에 떡하니 내거는 바람에 가족들이 남우세스러워 한동안 문밖에 나가지 못했다는 설명은 웃음을 자아낸다. 이날은 1988년부터 백남준의 작업을 도왔던 '백남준의 손' 이정성 장인(아트마스타 대표)이 함께해 자리를 빛냈다. 세운상가 최고의 기술 장인이었던 그는 암호같은 백남준 예술 세계의 기술 실무를 담당했다.

그는 항시 8㎜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백남준의 영상을 찍었다. 그가 찍은 1995년 백남준의 '메가트론' 구상 영상,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 폐막식 영상은 아카이브 형식으로 세밀하게 공개돼 백남준의 예술 집념을 현재화한다.

백남준 '비밀이 해제된 가족사진'.

◆ 악기가 중요한가, 악보가 중요한가

1층 전시실을 나와, 백남준의 최대작 '다다익선'(1988)을 보며 3층까지 걸어 올라가면 또 다른 전시 '다다익선: 즐거운 협연'이 대기 중이다. 이 전시는 작품이 낙후돼 오랫동안 불이 꺼져 있던 작품 '다다익선'이 복원되는 과정을 기록한 아카이브 전시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로톤다(미술관의 중앙 원형 공간)에 자리 잡은 '다다익선'은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유명한 작품으로, 올해 9월 재가동에 성공했다.

'다다익선' 재가동은 미학의 오랜 질문인 '예술의 원작이란 무엇인가'를 곱씹게 한다. 모니터 사용 시간을 7만시간으로 산정하면 1일8시간 가동했을 때 10년 후 모니터 전량 교체가 불가피하다. 백남준은 생전에 "모니터를 교체해도 좋다"고 동의했고, 교체 시 작업 전권을 테크니션 이정성에게 일임하는 각서까지 썼지만, 예술의 수용자는 작품의 원본성이 깨지는 것을 극도로 경계한다. "민주 정부가 들어서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겠다"고 했던 백남준이 35년 만에 귀국한 이유, 1986년 내한한 그가 국립현대미술관을 3차례 방문해 3억원의 예산 반영을 요청한 사실, 1987년 백남준이 삼성전자 수원공장에 방문했고 1988년 삼성전자가 '다다익선'용 분배기 개발 성공과 함께 모니터 1300대를 기증한 사실 등이 자세하게 언급된다. 특히 뇌졸중 발병 후 투병 중이던 백남준이 휠체어에 앉아 드로잉하는 모습을 찍은 이은주의 사진 한 점은 예술의 한 정신을 압축해낸다.

두 전시는 내년 2월 26일까지 열린다. 한편 백남준아트센터는 초기 작품을 다룬 '백남준의 보고서 1968~1979'를 내년 3월 26일까지, 백남준 작품 중 아날로그성을 조명한 '바로크 백남준'을 내년 1월 24일까지 연다. 이달 18일엔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대강당에서 백남준 국제 심포지엄 '나의 백남준'이 열린다.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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