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를 ‘그친구’라 부르는 운동권 남자들···이미상 작가 ‘이중 작가 초롱’[책과 삶]
이중 작가 초롱
이미상 지음 | 문학동네 | 356쪽 | 1만5500원
‘김’은 “1988년 자주민보 대신 ‘한겨레신문’이라는 제호를 지지했던 것처럼” 첫딸 이름을 ‘김보미나래’라고 지었다. “영원한 동지이자 연인”인 아내 ‘규’가 임신했을 때 “백민투, 조민중, 이애국 같은 이름”은 짓지 말자고 각오했다. “작은 소반에 앉아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전수하는 것”이 김이 꿈꿔온 부녀상(像)이다. 보미나래는 아버지 꿈에 부응하지 못했다. 더뎠다. 학교에선 “멍때려서 선생님의 설명을 놓치는 게” 아니라 “설명을 못 알아들어서 멍때리는 거”였다.
부부는 대학 입시를 앞두고 딸을 고등학교에서 중퇴시킨다. 보미나래는 대안학교로 갔다가 1년 휴학한다. 부부가 포트폴리오를 위해 미국 버지니아주 에코 공동체에 보내기로 결정한 것이다. 공동체 생활을 다큐멘터리로 찍어 청소년영화제에 출품해 수상한 뒤 경기권 대학의 사회학과에 지원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김이 영상을 편집해 대학에 제출할 것이다.
미국에서 1년 뒤 돌아온 보미나래는 “제 몸의 세 배쯤 되는 히피풍 원피스”를 입고 다녔다. 임신을 숨기려 입은 옷이었다. 보미나래는 건강하고 피부가 검은 아기를 낳는다.
이미상의 소설집 <이중 작가 초롱>에 실린 2018년 데뷔작 ‘하긴’의 내용이다. 이미상은 이듬해 이 소설로 ‘젊은 작가상’을 받았다. 이미상은 이 소설에서 입시제도의 과열과 부정, 86세대의 위선과 거짓을 건든다. 이런 점 등등이 웹진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거대하지 않지만 의미 있는 ‘팬덤’을 이루기도 했다.
다음 장면은 지금도 회자된다.
김은 석형네 딸이 조기졸업하고 카이스트에 갈 예정이란 소식을 듣고는, 석형 아내가 규처럼 ‘학출’이 아니라 ‘여공’이라는 걸 떠올린다. 친구들에겐 조지타운 로스쿨을 나온 사위가 연방정부에 일할 예정이라고 거짓말한다. 규는 보미나래가 흑인에게 ‘그런 거’(강간을 암시)를 당하지 않았을까 괴로워한다. 이미상은 직접적인 서술 없이 간접적으로 인종차별 의식을 드러낸다.
문학평론가 소영현은 ‘문학과 사회’ 2022년 봄호에 기고한 ‘ ‘하는’ 여자들? 이미상론’에서 첫 단편 ‘하긴’을 두고 “주인공 화자와 그의 친구들, 청년 시절 그들이 믿었던 이념 전부가 거짓이었을 리 만무하지만, 적어도 그들이 외쳤던 정의와 공정 앞에 ‘나만 빼고’라는 괄호가 내내 숨겨져 있었음을, 그들의 삶을 지탱하던 그 위선의 무의식에 대해 이제 모두가 알게 되었다고 말해도 좋다”고 썼다.
‘하긴’ 인물들은 다른 단편 ‘그친구’에서 등장한다. 김과 규는 한 영화모임 원년 멤버였다. 김은 이 모임의 ‘지경’과 바람피운다. 규가 남편 휴대폰에서 두 사람의 섹스 동영상을 발견한 것이다.
이미상의 페미니즘은 적극적인 선언과 주장을 드러내기보다는 인물의 세부 심리 묘사나 대사에서 때로는 중의적 모습을 띠며 나타낸다. 한 예로 규는 동영상을 보며 괴로워하다가도 영상 속 지경의 표정을 보곤, 불법촬영이 아니라 “다행히 합의하에 촬영”한 것 같아 조금은 마음을 놓는다. “추문 끝에 살아남는 건 남자들이다” 같은 대사가 이어진다.
제목으로 단 ‘그친구’는 운동권 남자들이 아내를 부르는 호칭이다. “아내를 그친구라고 부르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니까. 동지의 대체어로서의 그친구. 그렇게 부르는 한 자신은 아직 젊고, 아직 투사니까.” 대상화와 혐오가 녹은 대사가 이어진다. “그친구. 예전에 정말 멋졌죠. 결기가 있었다고나 할까? 나는 존경할 수 있는 여자랑 결혼했어요. 그러나 역시 애엄마가 돼 그럴까요? 이젠 관점이 쥐똥만큼 좁죠, 쥐똥만큼.”
오지(본명 최현숙)란 인물을 다루면서 남성 중심 사회에서 배제되고 추방되는 여성을 그린다. 규, 김, 오지 세 사람은 야학 활동을 하다가 만났다. 오지는 동년배 남자들이 교수로 대학에 자리 잡아갈 때 ‘보따리 장사’ 즉 강사 자리를 전전했다. 그러다 귀촌했다.
‘하긴’에서 “중학교를 중퇴하고 삭발하고 사르트르 따위를 읽다가 최연소로 등단”한, 보미나래와 동갑인 초롱은 표제작 ‘이중 작가 초롱’의 주인공으로 나온다. ‘하긴’에서 학원 운영을 하던 ‘문’의 딸이다. 이 단편에선 초롱의 습작과 신인 문학상 수상작이 주요 소재다. 둘 다 불법촬영이 제재다.
초롱의 습작 ‘이모님의 불탄 진주 스웨터’는 불법촬영 피해자의 괴로움을 남일 보듯 하며 묘사한다. “경쾌한 블랙 코미디”다. 수상작 ‘테라바이트 안에서’는 불법촬영 피해자의 내면과 고통을 독백으로 풀어낸다. 습작 공개 뒤 독자들이 배신감을 느끼면서 초롱은 문단에서 쫓겨난다.
“피해자의 고통에 쌀눈만 한 관심도 없으면서 등단하기 위해 피해자인 척 가장해 알량한 글솜씨로 피해자가 쓸 법한 일기 같은 소설”을 써서 ‘새 시대의 리얼리즘’ ‘일반화된 피해 서사에 저항하는 한 개인의 이야기’란 찬사를 받은 것에 분노했다. 온라인엔 ‘초롱조롱파인드닷컴’이 만들어진다. 초롱은 습작 유출자를 찾아 나선다.
이미상의 여성 문제 고발은 소설에서 겹겹을 이루며 복합적으로 표현된다. 성폭력을 저지르지도 않은 남성이 셀프 고발을 한다. “영겁의 세월 동안 남자들이 저지른 성폭력의 죄를 홑몸으로 떠안아 여자들에게 용서받고 화합의 기운을 만들겠다는 다소 영적인 시도를 했다”고 초롱은 여기는 듯했다. 여성이 남성에게 기대하는 최소한의 사실 인정에 대한 바람 같기도 하다.
‘여자가 지하철 할 때’는 더 선명한 목소리를 낸다. ‘수진’이 20여분간 지하철 타면서 머릿속을 휘도는 두려움과 공포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승객 위험도> 남자1: 몸 수그림중. 위험 미정. 관찰 요망(※ cf. 품속 사물에 따른 위험도: 염산, 위험 10점. 칼, 위험 9점…).”
화장품 팩트 거울을 볼 때는 남자에게 다음 메시지를 전달해야겠다고 생각한다. “잘 보세요 저 지금 콘택트렌즈가 돌아가서 눈알을 굴리고 있는 거예요. 절대 화장을 고치고 있는 게 아녜요. 저 그런 여자 아니에요.”
수진 머릿속엔 “요즘 년들 참 대놓고 화장 고쳐. 얼굴 한번 대차게 망가져 봐야 저 짓거리 고치지” 같은 말이 들리는 듯하다.
다른 칸으로 이동할 때 행동 요령이다. “약한 냉방을 원하시는 고객님을 위한 차량입니다. 수진은 손부채질을 한다. 남자에게 다음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 ‘이 칸은 너무 덥네요. 아쉽지만 다음 칸으로 가야겠어요. 절대 당신을 피하는 게 아니랍니다.” 수진은 한 모임 자리에서 “테러의 비극적 희생자가 되는 게 아니라 잡범에게 잡스러운 죽음이나 당하겠구나. 갑자기 주제 파악이 돼”라는 대화 중 한마디도 듣는다.
이미상은 단편 ‘살인자들의 무덤’에선 이렇게 서술했다. “너무 많은 남자가 애인과 부인을 죽였다. 전 애인과 전 부인을 죽였다. 그들의 부모와 자매와 개를 죽였다. (전)애인/부인 살인자를 하나씩 묻기에는 땅이 부족하다. 그래서 20세기 이후에 입소하는 (전)애인/부인 살인자는 납골 빌딩을 이용해야 하며, 납골함 하나에 1000명이 수용된다. 우리도 사람이다! 인격적으로 대해달라! 1인, 1통! 1인.”
이 단편에서 “남편이 아내를 죽이면 앵커는 말한다. ‘올해 들어 벌써 서른여섯 번째입니다!’”. 이 대사에서 2016~2020년 살인 범죄자 중 남성이 78%인 1373명, 여성은 22%인 386명이란 수치를 떠올리게 된다.
이미상 소설은 ‘자의식’으로 가득한, 알 수 없는 이야기는 분명 아니다. 읽기 쉽지도 않다. 소영현은 “이미상의 소설은 진입 문턱이 높은 편”이라고 했다. “기우뚱한 구조와 파편적 서사” “과감한 생략” “층위 다른 이야기들의 병치” 등을 두고 한 말이다. 칼럼, 에세이, 온라인 게시 글, 독서 후기, 액자소설 등이 여러 맥락에서 갖은 형태로 삽입된 ‘브리콜라주’를 두고도 한 말이다.
소영현은 “낱낱의 조각을 다 맞춰보아도 끝내 알 수 없는 저편의 무언가가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독자를 이끌고 간다”고 했다. 이 말이 주례사가 아니라는 건 이미상 소설을 한 편만 읽어도 확인할 수 있다. ‘이미상 특유의 문체’도 이룬 듯하다. 여러 고민과 생각을 압축해 한 줄 한 줄 적은 듯한 문장을 곳곳에서 발견한다.
“한껏 꾸민 문장을 싱겁게 씻어내며 생각이 글을 짓고 글이 생각을 바꾸는 무한 루프 안에서 골똘해지는 경험, 뺨을 달아오르게 하는 기쁨이 이 책에 담겨 전달되면 좋겠다”는 작가의 말과 이어졌다.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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