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온사상 거처로 찍혔지만, 더 나은 미래 꿈꿨던 ‘책방’

나윤석 기자 2022. 11. 11.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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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점의 시대 | 강성호 지음 | 나무연필

19세기 선교사들이 속속 개점

종이 팔던 지물포가 서점 역할

일제 땐 억압 맞선 문화투쟁 場

해방이후엔 노점책방 대거 등장

70년대 도심 대형서점들 출현

90년대 온라인 배송까지 확장

순천서 골목책방 운영했던 저자

100여년 서점史로 문화 되짚어

“서점은 지식 유통의 공간이자 사회에 저항하는 ‘출판운동’의 매개체였다. 근현대 서점 역사를 살피는 일은 지성사와 문화사를 되짚는 일이다.”

30대 프리랜서 역사연구자인 강성호의 ‘서점의 시대’는 19세기 후반부터 현재까지 100여 년을 가로지르는 한국 서점의 역사를 담아낸다. 독립서점 열풍 속에 서점에 관한 다양한 책이 쏟아졌으나 정작 통사를 다룬 책은 드물었다는 점에서 희귀하고 값진 연구다. 저자는 일제강점기 책을 통해 새 세상을 열망한 혁명가들을 소환한 전작 ‘혁명을 꿈꾼 독서가들’을 쓰면서 책이 아닌 서점, 즉 책을 사고파는 장소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다고 한다. 몇 년 전 아내와 전남 순천에서 골목 책방을 운영해본 경험도 이런 욕심을 부추겼다. 꼼꼼한 자료 조사와 성실한 취재로 완성된 책은 시대마다 변화무쌍하게 모습을 달리한 서점이 얼마나 역동적인 공간인지 드러내면서 각자 기억에 자리한 서점을 추억하게 한다.

조선 시대엔 책값이 매우 비쌌을 뿐 아니라 양반들이 책을 사고파는 행위를 ‘불경스러운 짓’으로 여긴 탓에 서점이 발달하지 못했다. 이런 분위기가 바뀐 건 19세기 후반 인쇄술 유입으로 대량생산이 가능해지고, 서구 지식을 담은 책에 대한 수요가 커지면서다. 1886년 선교사가 서대문 바깥에 차린 ‘대동서시’를 시작으로 ‘주한영책사’ ‘회동서관’ ‘신구서림’ 등 서울과 인천 등지에 140여 개 서점이 문을 열었다. 이들 책방에 진열된 신서적은 조선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한편 제국주의 질서에 맞서는 저항의 논리를 제공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종이를 파는 가게인 지물포(紙物鋪) 중에서 책 출판과 판매를 겸하는 ‘출판서점’이 많았다는 점이다. 지물포 운영으로 돈을 번 업자들은 출판을 선도적이면서도 전망 밝은 ‘문화산업’으로 인식했다. “근대 서점은 종이라는 물성에 새로운 지식과 가치를 부여하면서 등장했다. 출판사가 곧 서점이고, 서점이 곧 출판사였다.” 1950년대까지 이어진 출판서점은 자신들이 발간한 책과 함께 ‘상호 교환’ 조건으로 확보한 다른 출판사 책을 팔았다. 전국을 아우르는 서적 도매상이 없던 시절이라 물물 교환을 통해 책을 유통한 것이다.

초창기엔 중국 서적이나 ‘춘향전’ ‘심청전’ 같은 딱지본 고소설, 한의학 서적 등을 주로 판매하는 ‘전문서점’과 다양한 분야의 책을 펴내는 ‘종합출판서점’이 공존했다. 이 가운데 고소설을 제외한 모든 출판물을 취급한 회동서관은 종합출판사의 효시 격으로 평가받는데, 이곳에서 1909년 펴낸 옥편 ‘자전석요’는 10만 부 이상 팔리며 근대 출판 사상 최초의 베스트셀러가 됐다. 이 같은 출판산업의 성장세에 제동을 건 것은 일제의 탄압이었다. 서점을 ‘불온한 사상의 거처’로 인식한 일제는 은밀히 유통되는 좌익 서적과 우화 소설을 무차별적으로 압수해 강변에서 불태웠다. “서점은 더 나은 미래를 꿈꾸는 자와 이를 억압하는 권력 간에 ‘문화 투쟁’이 벌어지는 곳이었다.”

식민지 해방은 곧 책의 해방을 의미했다. 출판계에 자유가 찾아오면서 1945년 말 45개 수준이던 출판사는 불과 3년 만에 790여 개로 대폭 늘었다. 문제는 이들 출판사가 펴낸 책을 팔 곳이 마땅치 않았다는 점인데, 이런 공간적 한계는 ‘노점책방 전성시대’를 불러왔다. 길거리 좌판에서 책을 파는 서점들이 줄줄이 등장한 것이다. ‘세계 소년소녀 문학 전집’ 등 아동 도서 시리즈로 한 시대를 휩쓴 계몽사 역시 대구역 앞에 좌판을 깐 노점책방에서 출발한 출판사였다.

거리 책방과 소규모 서점이 경쟁하던 출판 시장에 기업형 대형 서점이 출현한 건 1970년대다. 한국출판금고(현 한국출판문화진흥재단)가 1972년 개관한 중앙도서전시관과 종로서적센터, 1981년 개점한 교보문고 등이 대형화 물결을 주도했다. ‘서점은 뒷골목에 자리해야 한다’는 통념을 깬 이들 서점은 도심 한복판에 네온사인이 빛나는 알루미늄 간판을 달고, 클래식 음악이 흐르는 공간에 유니폼을 입은 직원을 배치해 책방의 새 이미지를 창출했다. 출판업계와 서점업계의 자율협약에 기반한 도서정가제가 도입된 것도 이 무렵이다. 도서정가제는 무분별한 덤핑으로 무너진 시장 질서를 회복하기 위한 타개책이었다. 하지만 1990년대 후반 출현한 온라인 서점들은 공격적인 할인 전략을 내세우면서 업계의 협약을 무력화했다. 빠른 주문·배송 시스템을 통한 출판산업 선진화가 온라인 서점의 공로라면, 도서정가제 붕괴와 오프라인 서점의 연이은 폐업은 온라인 서점이 남긴 그림자였다.

1980년대 후반 이후 부쩍 늘어난 각종 전문서점은 시대의 초상을 반영한 ‘지적(知的) 바로미터’였다. 산업화 시기엔 과학기술 전문서점이 잇달아 출현했고, 1990년대엔 그림책과 아동 교육에 대한 관심이 어린이 전문서점 열풍을 불렀다. 이들 서점은 단순히 책을 판매하는 것을 넘어 취향과 가치를 공유하는 문화공간이었다. 이와 함께 저자는 옛 문화와 우리말을 보전한 고서점, 대학가에 자리한 사회과학서점, 청계천 헌책방 거리 등을 세밀히 스케치하며 ‘서점의 역사’를 완성한다. 서점이 변모해온 풍경은 디지털 기술이 진화한 미래에도 확장된 사유로 새 시대의 비전을 그리는 문자와 책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을 남긴다. 264쪽, 1만8000원.

나윤석 기자 nagija@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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