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각의 무대에 아이들을 세운다
요즘 딸들의 영어교육 코칭을 받고 있다. 딱 2주밖에 안 됐지만 지난 칼럼에서 다룬 육아 권태기도 극복할 겸 배움의 시간을 가지고 있다. 한 주 동안 학습한 일지를 보면서 이런저런 피드백을 받았다. 이를 놓칠세라 하나도 빠짐없이 다이어리에 깨알같이 받아 적었다. 그중에서 무릎을 딱 치게 만든 이야기가 있었다.
"리액션을 적극적으로 해주셔야 해요. 절대 당연하다고 여기지 말고 반드시 리액션을 해줘야 합니다"라는 동기부여와 함께 "아이 스스로 '내가 영어를 잘하는 게 맞나?' '내가 잘 못하는 건가?'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도록 해야 해요. 심지어 아이가 '착각'에 빠질 정도로 칭찬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외국인에게 다가가 영어로 말을 걸 수도 있고, 영화를 보면서 대사 한 줄을 따라 할 수 있는 거예요"라는 말이었다.
◇ 착각의 무대에 서는 용기
착각(錯覺)은 '어떤 사물이나 사실을 실제와 다르게 지각하거나 생각하는 것'이다. 그릇되게 해석하는 오해와 착각을 해 잘못을 저지른 착오의 중간에 위치하며 선을 넘지 않는 단어다. 누구나 착각할 수 있다. 착각은 오해와 착오처럼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 아닌 느낌이 든다. 스스로 착각의 무대에 서기도 하고, 타자의 등에 떠밀려 오르기도 한다. 누구나 나름의 착각들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영어 코칭에서 들은 말처럼 아이들이 착각 속에 살도록 두는 것도 꾀 재미난 일이다. 오히려 독려하도 좋을 것 같다.
내가 지금 이 모양인 것이 나 스스로 착각 속에서 살아가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얼마나 나의 착각을 이어가고 확장하며 살아왔는지 되돌아보게 됐다. 유년 시절 '내가 잘 생겼다는 착각' '선생님이 나를 좋아해 줄 것이라는 착각', '미래에 지구를 구할 것이라는 착각' 등 돌이켜보면 소중한 착각들이 즐비했다. 이런 착각 속에는 '나는 정말 가치 있는 사람이야'라는 소망이 담겨있는 것 같다. 착각 속에 산 기억들 속에서 행복감이 느껴졌다. 그 과정에 일군 것들이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귀하게 다가왔다.
그런데 어른이 된 지금 내 분야에서 최고가 될 수 있다는 '착각' 조차하지 못하고 살고 있다. 착각 없이 산다는 것은 외롭고, 가여운 일이다. 착각의 무대에 서고 싶지만 내심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랬다. 그것은 '용기'의 문제였다. 착각의 무대에 서는 용기는 혼자서 만들기 어렵다. 누군가 바라봐 줘야 하는 것이다. 불혹을 보고 있는 나도 그런 시선을 받고 싶고, 주고도 싶다.
◇ 컴퍼스의 날카로운 바늘처럼 살아라
청소년기까지 '자기중심경향성'이 있다. 쉽게 말해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을 가진다는 것이다. 컴퍼스의 날카로운 바늘은 나를 향하는 구심점이라 할 수 있다. 그 힘으로 세상으로 뻗어나가는 원심력을 발휘한다. 구심력이 강해야 보름달처럼 크고, 둥근 원을 그릴 수 있다. 마음껏 착각하도록 무대 위에서 춤을 추도록 해야 한다. 하지만 간혹 착각 속에 머물고 싶은데 기어코 거기서 꺼내주는 얄미운 어른들이 있다.
나는 잘 하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눈치를 잘 살폈다. 축구를 할 때 악착같이 공을 빼앗고, 패스를 했다. 종횡무진 쉬지 않고 그라운드를 누볐다. '너 축구 잘하는구나' 이 한 마디를 듣고 싶어서였다. 축구 선수처럼 잘 한다고 착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을 수 없었다. 내심 마음이 상했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는 그림을 열심히 그렸다. 거의 성인만화가 수준으로 그림을 그리는 친구가 '너 그림 좀 잘 그리는 것 같아'라는 말 때문이었다. 그렇게 잘 그리지 않았지만 녀석은 칭찬의 달인이었다. 나를 착각의 무대에 세워준 것이다. 펜촉에 잉크를 묻혀 그림을 그렸다. 그 친구는 나와 몇 명을 더 모아 월간으로 그린 만화를 모아 연재했다. 반응은 아주 뜨거웠다. 그 친구의 영향으로 나는 중학교 때까지 그림을 그렸는데 제법 잘 그렸다. 그때까지도 축구를 포기하지 못해 축구만화를 그렸다. 주인공은 나의 분신과도 같았다. 하지만 학원 영어 선생님이 자신이 그려도 이것보다 낫겠다며 몇 개월 공들인 만화책을 갈기갈기 찢었다. 그것도 친구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말이다. 찢긴 것은 그냥 종이가 아니다. 나의 성스러운 '자기중심성'이었다.
◇ 착각이라는 최고의 몰입
니체는 인간의 정신이 낙타에서 사자로 사자에서 아이로 변화한다고 했다. 여기서 아이의 정신은 자신의 삶을 긍정하며 삶 자체를 놀이로 몰입하는 경지를 말한다. 아이의 정신이 되기 위해서는 착각은 필요조건이다. 착각의 또 다른 정의는 자신의 삶을 고결하게 만드는 창조적 놀이라고 볼 수 있다. 두 딸의 착각에 냉소를 보내지 않고, 숭고한 정신활동의 유희를 함께 즐기는 아빠가 되고 싶다. 첫째에게 질문했다. 넌 뭘 좋아하고, 무엇이 되고 싶냐고 말이다.
"나는 화가가 될 건데. 그러면 홍대를 가야 한대..."
첫째의 대답이 속으로 우습긴 했지만 이렇게 말했다.
"뭘 그런 데를 가. 지금도 충분히 멋진 화가잖아. 홍대를 가서 화가가 되는 게 아니라 지금 벌써 화가인걸."
첫째는 오늘도 그림을 두 장이나 그렸다. 아이 스스로 잠재력을 발휘하게 하기 위해서는 결코 한계를 둬서는 안 된다. 착각을 일찍 거둬들이는 혹독한 사회에서 마음껏 착각하고, 안주하지 않고 마음껏 넘어지고 성취하는 것을 놀이처럼 여기도록 해야 한다. 여기에는 곧 마흔을 바라보는 나도 포함된다. 이렇게 멍석을 깔았으니 내가 하고 있는 착각을 하나 공유해 본다. 아동문학 작가를 꿈꾸는 나의 성스러운 착각이다. "나는 백희나 작가님 같은 최고의 아동문학 작가의 피가 흐르고 있다!"
당신의 착각은 무엇인가?
*강점멘토 레오(본명 문선종)은 아이들을 좋아해 대학시절 비영리민간단체(NPO)를 시작으로 사회복지법인 초록우산어린이재단에 이르기까지 아동상담 및 교육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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