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계를 두지 않았다는 말에 감명 받았죠” 또 한 번 각성한 신진서, 당찬 선전포고를 외치다[인터뷰&]

윤은용 기자 2022. 11. 11.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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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바둑의 최강자 신진서 9단이 9일 한국기원에서 스포츠경향과 인터뷰한 뒤 포즈를 취하고 있다. 정지윤 선임기자



한국 바둑의 1인자 계보는 조남철 대국수를 시작으로 김인-조훈현-이창호-이세돌-박정환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지금은 두 말이 필요없는 신진서 9단(22)의 시대다. 상대가 어떻게 공략해도 무너지지 않고 승리를 따내는 그를 주변에서는 ‘절대 1강’이라는 말로 칭송한다. 2020년 1월 1위에 오른 뒤 그 자리를 지켜온지도 어느덧 35개월이 됐다. 그를 압도할 수 있는 기사는 현 시점에서는 어디에도 없다.

신진서는 지난 8일 끝난 제27회 삼성화재배 월드바둑마스터스에서 개인적으로 또 다른 이정표를 세웠다. 어지간한 대회는 다 우승해본 그가 ‘미완의 고지’로 남겨뒀던 대회에서 최정 9단을 꺾고 생애 첫 삼성화재배 우승을 차지한 것이다. LG배, 춘란배에 이어 세계 메이저대회 3연속 우승이자, 통산 4번째 세계대회 우승이다.

우승 후 다음날인 9일 한국기원에서 만난 신진서는 “이번 대회는 꼭 우승한다는 생각으로 임했다. 삼성화재배를 앞두고 대국이 많이 없어서 감각이 떨어질 것 같아 국가대표팀 코치님들을 귀찮게 하면서까지 많은 연습대국을 부탁했다”며 “그 과정에서 약간은 떨어진 실전 감각을 키웠다. 우승하고 난 뒤에는 다행인 마음, 그리고 기쁜 마음의 두 가지 감정이 들었다”고 말했다.

우승을 해 기쁜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다행이라는 것은 선뜻 이해하기 힘들다. 이는 그가 지난 2년간 삼성화재배에서 겪어왔던 일들을 생각하면 납득할 수 있다.

신진서는 2020년 처음으로 삼성화재배 결승에 올랐다. 상대는 중국 최강자 커제 9단. 온라인으로 진행된 결승 제1국에서 신진서는 팽팽한 접전을 펼치다 마우스 클릭 실수로 인한 착점 오류로 허무하게 패했다. 그리고 2국마저 내주며 준우승에 그쳤다. 지난해 신진서는 다시 결승에 올라 우승에 도전했는데, 박정환 9단을 만나 1국을 잡고도 2~3국을 내리 패하며 다시 한 번 좌절했다. 신진서는 “그동안 성적을 내온 것에 비하면 이상하게 삼성화재배에서만 부진했다. 운도 잘 따르지 않았고, 나도 부족했다”며 “이번에도 정말 열심히 준비했는데 우승을 못하면 ‘앞으로 삼성화재배 우승을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느꼈던 압박감을 토로했다.

사실 그 외에도 압박감을 느낄 요소가 또 있었다. 최정이 결승에 올라오면서 바둑사에 유례가 없는, 세계 메이저대회 결승에서 최초로 남녀간 성(性)대결이 성사됐기 때문이었다.

강자와 약자의 싸움에서는 늘 도전자가 더 많은 응원과 관심을 받기 마련이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신진서의 압승을 예상했음에도 포커스는 최정에게 집중됐다. 마치 지난 6일 막을 내린 2022 리그 오브 레전드(LoL) 월드 챔피언십(롤드컵)에서 밑바닥부터 시작해 결승까지 올라 끝내 최강 T1과 ‘페이커’ 이상혁을 꺾고 우승한 DRX, 그리고 ‘데프트’ 김혁규의 상황과 유사했다.

놀랍게도 신진서는 최정과의 대국 자체는 큰 압박감이 없었다고 했다. 상대를 무시하는게 아니라, 자신이 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뛰어난 최정의 기력을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최정은 16강에서 일본 최강 이치리키 료 9단을 눌렀고 8강에서는 신진서도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중국의 양딩신 9단까지 제압했다. 그리고 4강에서는 한국랭킹 2위 변상일 9단마저 꺾었다.

신진서는 “사실 4강에서 최정 사범과 변상일 사범이 만났을 때 객관적으로는 변상일 사범이 우세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대국에 들어가니 최정 사범의 자세에서 뭔가 알 수 없는 기세가 느껴졌다”며 “최정 사범의 경험과 기세가 무섭게 다가왔다. 괜히 초일류기사들을 꺾은 것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면서 내가 진다고 해도 개인적으로 큰일이 나거나 그러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최정 사범과 대국한다는 것보다, 앞선 2년간의 기억 때문에 결승 자체에 대한 부담이 더 컸다”고 설명했다.

이력에 삼성화재배 우승을 추가하면서 그의 1인자 위치는 더욱 공고해졌다. 2020년부터 이어져 온 그의 치세는 꺾이기는 커녕 날이 갈수록 환히 빛나고 있다. 이제는 스스로도 1인자라고 인정해도 될법한데, 신진서는 그 얘기가 나올 때마다 고개를 젓는다. 1인자가 되기에는 아직 멀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신진서는 “지금 당장을 놓고 보면 나도 1인자라는 말에 동의한다. 그런데 난 아직 현재진행중이고, 더 발전할 수 있다. 여기서 멈추면 후대의 1인자로 남아있을 수 없다. 이창호 사범님, 이세돌 사범님이 우승을 매번 하는게 아니었어도 1인자라는 평가를 받은 것은 오랫동안 꾸준했기 때문이었다. 나도 앞으로 최소 2~3년은 지금의 기세를 더 유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 바둑 역사상 최고의 기사로 불리는 이창호의 기록을 하나씩 넘어서고 있는 신진서가 거기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이유다. 올해 GS칼텍스배 5연패를 달성하며 이창호를 넘어 사상 처음으로 선수권전 방식 대회에서 5연패를 달성한 기사가 된 것을 두고도 “이창호 사범님이 활동할 당시에는 선수권전이 거의 없었다. 그 때 지금처럼 선수권전이 많았다면 못해도 10연패는 하셨을 것”이라고 했다.

매번 목표를 달성하면 그 다음 목표를 정해 새로운 동기부여를 찾는 신진서는 삼성화재배 결승이 끝난 후 최정과 함께한 공식 인터뷰 자리에서 최정의 말을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했다. 당시 최정이 한 말은 “결승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나 자신에게 한계를 두지 않았기 때문이었다”였다. 신진서는 “솔직히 이창호 사범님과 이세돌 사범님만큼 세계대회 우승을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다만 커제가 8번을 우승했는데 그것보다는 많이 하고 싶다”며 “그 동안은 한 11~12번 정도 세계대회 우승하는 것을 목표로 했는데, 최정 사범의 그 말을 듣고 나도 많은 것을 느꼈다. 그래서 개수는 정해두지 않으려고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세계 바둑계를 향한 신진서의 무시무시한 선전포고다.

윤은용 기자 plaimston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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